9월 27일(토요일) 경남문학관 주최 문학기행, '찾아가는 문학관'으로 경북 안동에 위치한 '이육사 문학관'을 다녀왔습니다.
오전 6시 30분 집을 나서자마자 빗방울이 흩뿌렸습니다.
김달진 문학관 학예사님과 폴래폴래 선생님은 마산역에서 승차를 하시기에 1호차에는 아는 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으며, 창원 시청앞 승차에서 강선덕 선생님께서 승차를 하셨으며, 주 선생님과 이영자 선생님이 승차를 하여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칠곡 휴게소에서 진주와 마산의 문인이 승차한 2호차를 만났으며, 나는 폴래폴래 선생님이 승차한 2호차로 이동을 했는데, 강선덕 선생님께 좀 죄송했습니다.^^
많은 비는 아니었지만, 우리가 도산서원에 하차시에까지 계속 내렸으며, 도산서원 방문 시에 약간 멈추었다가 이육사 문학관에 도착하니 또 내렸기에, 시낭송회와 사인회는 실내 행사였기에 예정대로 진행되었으며, '가시연'의 공연은 실외 공연 예정이었는데, 비 때문에 실내에서 진행을 했습니다.
시노래패 가시연의 육사 문학관 공연 소식은 이동하는 버스에서 알았는데 반가웠으며, 이육사 문학관에서 흑백의 유경아 씨의 문자를 받았습니다.
시노래 가시연 일원으로 안동으로 가는 길이며 휴게소라고 하기에, 은근히 놀려주고 싶어서 조심하여 공연 잘 하고 오라는 답을 보냈습니다. 나중에 육사 문학관에서 만난 경아 씨와 김성관 씨가 놀라했지요.
이래서 사람은 죄를 짓고 살면 안되나 봅니다.^^
이 글은 이육사 문학관 관장님의 강의, 김필녀 시인의 구술, 찾아가는 문학관 '시여! 춤추어라', 이육사문학관 홈페이지를 참고하여 작성합니다.
이육사
시인·독립운동가. 본명은 활(活). 경상북도 안동(安東) 출생으로 육사는 호입니다.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의거에 연루 1년 7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는데 이때 수인번호가 264였으며, 二六四, 264, 대구264, 육사, 육사생 등의 필명이 있습니다. 학력은 어릴 때부터 형제들과 더불어 집안에서 조부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신식교육을 위하여 고향에 세워진 보문의숙을 거쳐 도산공립보통학교에 편입 졸업을 하고, 16세 되던 1920년에 형제들과 대구 남산동으로 가게되며, 그후 처자가 있는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보습과를 마친 후 그해 여름 백학학원 교원을 지내다가 일본 유학길에 오르며 유학 기간은 9개입니다. 후에 중국 베이징[北京] 조선군관학교와 베이징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1925년 대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고, 27년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대구지점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된 것을 비롯하여 29년 광주학생운동, 30년 대구 격문사건(檄文事件)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번에 걸쳐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잡지를 발간하고 신문기자로 활동하며, 사회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1930년 중외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조선일보>에 '말'을 발표했지만, 말은 투고 작품이고, 35년 <신조선>에 '황혼' '조춘삼제'를 발표하며, 37년 서울에서 신석초(申石艸)·윤곤강(尹崑岡)·김광균(金光均) 등과 시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하고, 목가풍의 시 '청포도' '교목(喬木)' 등을 발표했으며, 그의 시작세계는 '절정'에서 보인 저항적 주제와 '청포도' 등에 나타난 실향의식과 비애, '광야' '꽃'에서 보인 초인의지와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0여년간 자유시 36편을 포함 총 39편의 시를 남겼는데, 4편이 중등과 대학교의 교재로 채택되었습니다. 이육사는 중국을 왕래하며 독립운동에 진력하다가 43년 서울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송치된 뒤 44년 베이징감옥에서 순국했으며, 유저로는 친지들에 의해 발간된 《육사시집(1946)》 《광야(1971)》, 시와 산문을 총정리한 《광야에서 부르리라(1981)》 《이육사전집(1986)》 등이 있으며, 미아리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던 그의 유해를 고향 원촌에 이장해 온 건 1960년이고, 1964년 4월 청량동 낙동강 변에 세워졌던 시비 '광야'는 도로 확장으로 현재 안동댐 민속촌 입구로 옮겨져 있습니다. 그 외 시비로는 옥천 독립기념관에 시비 '광야'가 있고, 서울 양재동 문화센터에 '광야', 대구 대륜고와 포항 후미곶에 '청포도'시비가 있으며, 생가인 원촌리 터에 '청포도'시비가 있습니다.
이육사 문학관
이육사 문학관에 도착하니 청포도 대신 문학관앞으로 흐드러진 코스모스가 우리를 맞아주었으며, 안동에 유난히 많은 무밭이 낙동강 상류변에 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육사 문학관은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 시인 이육사(이원록.1904~1944)선생과 관련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을 한곳에 모은 곳으로 육사의 혼, 독립정신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하여 이육사 탄생 100주년 때인 2004년 7월에 개관했습니다.
이육사 문학관은 개관과 함께 시에서 직영되어 4년간 10만명 정도의 관광객들이 다녀갔으며, 또한 이육사문학축전, 이육사 백일장, 문학기행 등 문학관련 행사들이 년 중 개최되어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의 정신문화를 꽃피우며 문향으로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여 왔습니다.
지상 2층 규모의 이육사 문학관은 선생의 유물 및 유품을 전시하고 있는 전시실을 비롯해 영상실, 세미나실 및 선생의 생가를 모형한 육우당, 연못분수대, 청포도ㆍ절정 시비와 선생의 흉상 등의 부대시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입장료는 성인 2,000원, 학생 1,000원이며, 저항시인 이육사의 시 정신과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되새기고자, 이육사 문학관의 운영이 지난해12월부터 선생의 사상과 정신을 추모하는 모임인 (사)이육사 추모사업회에 위탁 운영중인데, 많은 문학인들이 즐겨찾는 곳으로 거듭났으며, 도산서원과 퇴계종택, 청량산 등 주변 관광지와 연계하여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합니다.
이육사 문학관 외부 풍경
문학관 왼편으로 '절정' 시비 앞에 이육사 동상이 있습니다.
'절정'은 암담한 식민지 시대의 절망적 상황 속에서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담은 저항시입니다.
절정 /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동상 뒤쪽에는 '청포도샘'이 있습니다. 청포도샘에서는 맑은 물이 흐르며, 샘가에는 청포도 나무가 있지만, 계절이 계절인만큼 청포도는 열려있지 않았습니다.
▲ 청포도샘
생가와 육우당
육사의 생가는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 있었던 것으로 안동댐 건설로 1976년 4월 안동시 태화동 672-9로 옮겨졌으며, 이육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세운 여섯 형제가 자란 육우당은 문학관 뒤편에 있습니다.
육우당에는 육사의 영애 옥비 여사께서 기거를 하시며, 재산관리는 양자로 들인 조카가 맡아서 합니다.
▲ 사랑채
▲ 안채
▲ 생가터의 육우당유허비와 청포도 시비 : 1993년 '청포도' 시비가 세워질 때 여섯형제를 기려 세워진 비가 '육우당 유허비'입니다.
▲ 생가터의 청포도 시비
청포도는 문학관 내의 벽에도 있으며, 문학관의 매점 장식용 접시에도 있고, 이달의 문화인물 기념주화에도 있습니다.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이달의 문화인물 선정 기념주화로 이육사 문학관과 조폐공사에서 구입이 가능합니다.
▲ 청포도 공원. 시화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문학관에서 100여 미터 거리에 있는 생가터로 가 보겠습니다.
▲ 좌측이 생가터로 가는 길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는 퇴계의 5대손 이구(1681~1761)가 정착하면서 ‘세간 명리를 부운같이 여기고 속진(俗塵)과 치욕을 멀리한다’는 뜻에서 ‘원촌(遠村)’이라 불린 마을이었으나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인근 천곡과 합치면서 ‘원천’으로 이름이 바꿨으며, 생가는 1976년 안동댐 건설로 만수선(滿水線)에 걸리면서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졌고 지금 그 집터에는 1993년에 세운 청포도 시비와 육우당 유허비만이 덩그렇게 서 있습니다.
낙동강 물이 마을 앞쪽으로 유유히 흐르고 남동쪽 강 건너로 왕모산성이 손에 잡힐듯 한 진성이씨 집성촌 원촌리는 백여 호를 이룬 큰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10여 호가 있는데 육사는 열두 살까지 이 마을에서 살았으며, 생가터는 마을의 중간에 있습니다.
▲ 생가터의 시비 '청포도'와 시비가 세워질 때 李 여섯형제를 기려 세우진 비가 '육우당 유허비'
생가터가 있는 마을 앞의 길은 도산서원과의 거리는 2.3km로 퇴계가 다닌 길로 제주의 올레 부럽지 않은 '퇴계오솔길' 복원 사업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마을에는 고택이 서너 채 있는데 그중에 대감집으로 불리는 집은 이육사 문학관을 찾는 이들의 숙소로 이용되며, 대부분의 고택은 옛영화를 잊은 듯 잡초가 무성한데, 퇴계오솔길 복원과 함께 고택도 정비가 될 예정이라고 하니, 다시 진성이씨 집성촌이 형성될 수도 있겠지요.
문학관 내부
1층은 육사의 생애와 문학세계, 독립운동의 자취를 다양한 방법과 매체로 구성했는데, '생애'코너에는 그의 삶의 여정을 엿볼 수 있고, 문학세계에서는 육사의 시, 소설, 수필 등 다양한 문학장를 접할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 코너에 들어서면 육사가 걸었던 항일운동의 가시밭길을 느껴볼 수 있는데, 일생을 재구성한 영상자료 상영 및 작품 발표 책자, 육필원고, 시집 등 문학적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육사의 감옥생활과 조선 군사간부학교 훈련 모습을 재현한 모형을 만날 수 있습니다.
1층 전시실 좌측에는 바닥의 아트타일에 청포도 있으며, 이육사의 생애와 흉상과 시 '광야'가 있습니다.
▲ 육사의 흉상과 광야
이육사 /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는 이육사의 생전에 활자화되지는 못했는데, 이 작품은 유고로 남아 전해지다가, 1947년 육사 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면서 거기에 실려 일반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왕모산의 칼선대 바위가 '절정'의 시상이라면, 한 눈에 들어오는 청량산은 '광야'의 시상이 된 장소인데, 안동댐 건설로 육사시의 배경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 육사의 친필 '바다의 마음'
▲ 독립운동 코너
이육사는 1904년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서 전통유학자인 이가호(李家鎬)를 아버지로 의병집안인 범산(凡山) 허형 (評街)의 따님인 김해 허씨를 어머니로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퇴계 이황의 자손이자 형조참판 이구운(李龜雲)의 6대 손으로서, 가계는 유가적 세계관을 길러주기에 충분한 환경이었으며, 외할아버지 범산 허형은 의병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왕산 허위의 사촌으로 허형 역시 의병장이었습니다.
육사의 친가와 외가 모두 창씨 개명, 신사 참배 등을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한 가문으로 선비집안과 의병집안의 피가 섞인 육사의 투철한 항일 의식은 그의 삶에 고스란히 녹아 담겨 있으며, 원기, 원유 형제와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3형제가 함께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 코너에는 표창장과 훈장이 전시되어 있는데,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83년 문화훈장, 1990년 건국훈장입니다.
▲ 1층 매점. 육사의 시집, 엽서 등과 접시와 컵 등을 판매하는 데, 안동 시인이 파견 근무하며, 판매금은 문학관 운영에 보탭니다.(시인 김필녀)
2층에는 체험코너, 세미나실, 기획전시실이 있는데, 기획전시실에는 근현대 문인들의 친필 원고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문학관 개관 당시 작고 시인과 유족, 친필원고를 보관한 분들이 보내 준 원고로 친일작가는 제외되며, 원고는 돌아가며 전시를 하는데, 김달진 시인의 '불암산'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 불암산
▲ 정지용 시인의 친필
▲ 세미나실. 조영일(시인) 육사 문학관 관장의 '육사 이원록의 삶과 유적' 강의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봇 뵈 옛 어른도 나를 못 보고 나도 그분들을 못 뵙네
고인을 못 봐도 녀던 길 알페 잇네 그분들은 못 뵈와도 그분들 행하던 바른 길은 앞에 있네
녀던 길 알페 잇거든 아니 녀고 어졀고 그분들 행하던 바른 길 앞에 있는데 아니 따르고 어찌할고
퇴계 이황의 도산십이곡 중 '고인도 날 못 보고'입니다.
비록 고인을 뵐 수 없지만, 퇴계와 육사의 정신은 안동인에게 지주가 되어 관장님과 시인은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육사와 이육사 문학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문학관 홈페이지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http://www.264.or.kr/
마지막 시간은 가시연의 시노래 시간이었는데, 세미나실이 좁아 1층 로비에서 진행되었으며, 관객은 앉거나 서거나, 계단에서 감상을 했습니다.
▲ 시노래패 '가시연'의 공연
안동의 가을은 그동안 만난 이곳의 가을과는 달랐습니다. 수수와 사과가 붉게 익고 은행나무가 유독 많았는데, 안동의 가을은 지금 이곳보다 짙었지만, 단풍을 맛보려면 2주쯤은 지나야 되겠더군요.
많은 것들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추석이 지난 후 이육사 문학관을 비롯 안동행을 계획세워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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