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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이야기/벚꽃 · 웅천요(熊川窯)

여좌천 로망스 다리와 벚꽃

by 실비단안개 2010.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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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좌천의 로망스 다리에는 변함없이 많은 연인들이 벚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로망스 다리 입구에는 남자학생 두 명이 '로망스 샌드위치'를 팔고 있기도 했고요.

드라마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곳이 로망스 다리입니다.

 

드라마 로망스(2002년 5월 8일에서 2002년 6월 27일까지 MBC TV 수목미니시리즈)가 방영되기전 여좌천은, 아름다운 벚꽃 터널이 있는 도심을 흐르는 하천으로 사람의 손때가 묻지않은 순수한 풍경이었습니다. 

그런데 드라마 방송 후 로망스 다리는 몸살을 앓기 시작했는데, 진해시가 솔선수범했습니다.

물론 진해시로서는 이익을 얻었겠지만, 여좌천의 본래의 모습을 아는 이라면 지금의 여좌천과 로망스 다리에는 사람냄새가 너무 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이, 유명세에 힘을 얻어 철재 다리는 나무로 바뀌었고, 미나리아재비 등 수초가 자라던 하천가에는 유채씨앗이 뿌려졌습니다.

 

그리고 여좌천 역사 등이 걸렸고, 여좌천을 따라 조명시설이 설치되기도 했습니다.

조명시설은 밤엔 그럴듯 하겠지만, 낮 시간대에 여좌천의 풍경을 담는데는 방해물이 되기도 하더군요.

 

또 여좌천변의 화단에는 바위모양의 스피커가 설치되어 종일 노래가 여좌천을 따라 흐르고, 어제 여좌천에 가니 주택의 벽면에 아트타일을 설치하기도 했더군요.

변화하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닐텐데, 사람들의 욕심으로 여좌천은 본래의 모습을 잃었습니다.

 

지금 여좌천을 찾는 청소년 내지 이제 막 성인이 된 이는 여좌천의 본래의 모습을 모를 겁니다.

여좌천을 찾는 외지인 또한 로망스 나무 다리를 보고 이게 로망스 다리구나 하지, 드라마 방영 당시의 철재 로망스 다리를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로망스 다리는 처음부터 이랬라고 하는 듯이 사람들은 로망스 다리 주변과 로망스 다리에서 기념 사진을 찍습니다.

 

로망스 다리도 사라졌고, 이제 진해시도 사라져 가기에 우울한 진해 시민이 주절거립니다.

진해의 청소년들은 여좌천을 진해의 세느강이라고 하지 로망스 다리에 혹 하지 않습니다.

여좌천을 사이에 두고 (약간의 거리가 있지만)진해 중고등학교와 진해 여중고가 있습니다.

내가 창원군에 살 때, 처음 본 진해의 벚꽃이 여좌천의 벚꽃이었는데, 당시 고모댁이 여좌천 근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부터 여좌천을 소개할 때 이렇게 소개합니다.

"연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여좌천은 진해의 세느강이라고 부릅니다.

진해의 입구인 파크랜드에서 진해여고까지 여좌천을 따라 약 1.5Km의 벚꽃터널이 펼쳐져 있으며, 각종 행사가 펼쳐지는 시내일원에 비해 덜 혼잡하여 벚꽃을 감상하며 산책을 즐길 수 있습니다.

여좌천의 '로망스 다리'는 사진촬영 장소로 인기가 높으며, 벚꽃길은 연인이 손을 잡고 걸으면 결혼에 이른다고 하여 '혼례길'이라고 합니다." 

 

2006년의 여좌천과 로망스 다리입니다.

인도와 여좌천을 가르는 나무울이 없었기에 철재 울 아래를 기어 돌을 타고 여좌천으로 내려가기도 했으며, 하천 위에 무대를 만들어 작은 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지정 된 곳만으로 여좌천으로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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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시(鎭海市)의 연혁과 여좌동(餘左洞) 이름의 유래

 

현재의 진해시는 본래 웅천현(熊川縣)의 영역이며, 옛 진해현(鎭海縣)은 창원시의 일부가 되어 명칭이 옛 이름과 맞지 않는다.

웅천현은 삼국시대에 신라의 웅지현(熊只縣)이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행정구역개편에 의해 757년(경덕왕 16)에 웅신현(熊神縣)으로 개칭되어 의안군(義安郡:昌原)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시대인 1018년(현종 9) 금주(金州:金海)의 속현으로 합속되었다가 조선시대 세종대에 첨절제사가 설치되고, 문종대에 웅천현으로 독립했으며 이때 완포현(莞浦縣)을 병합했다. 1510년(중종 5)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곧 현으로 복구되었다.

 

웅천의 별호는 병산(屛山)·웅산(熊山)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 진주부 웅천군, 1896년 경상남도 웅천군이 되었다. 1906년 8월 경상남도 진해만을 군항으로 지정하면서 군항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08년 9월 웅천군과 진해군을 폐지하여 창원부에 병합하고, 1909년 옛 웅천지역의 면을 통합하여 내동면·외동면을 웅동면으로, 상서면·하서면을 웅서면으로, 천성면·가덕면을 천가면으로, 읍내면을 웅읍면으로, 중면을 웅중면으로 개칭했다.

 

1910년 마산부가 설치되면서 마산부에 편입되어 면의 이름이 바뀌었다가, 1914년의 군면 폐합 때 진해면·웅읍면·천가면·웅동면은 그대로, 하남면·웅서면이 웅남면으로 통합되어 창원군에 편입되었다. 1931년 진해면이 진해읍으로 승격되었다.

 

1946년에 해양경비대, 1949년에 해병대가 창설되고, 1950년 6·25전쟁 때 한국과 국제연합(UN)군의 해군기지로 사용됨으로써 한국 해군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1955년 진해읍이 시로 승격·분리되었으며, 1973년에 창원군 웅천면, 1983년에 의창군 웅동면을 진해시에 편입했다.

 

1955년 진해시 시정이 펼쳐지면서 여좌동을 3개 행정동으로 나누어 새로운 행정동으로 획정되었던 여좌1가동과 여좌2가동을 1986년 에 통폐합하여 '여좌동'으로 개편하였다.

여좌동(餘左洞)이란 이름은 법정동명이 자행정동명이다.

 

1910년에 일본이 침탈하기 이전 고장은 여명리, 좌천리, 신좌천리로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일본 해군에서 우리 고장을 침탈하여 동양 최대의 진수부(鎭守府)로 건설할 야욕을 가지고 주민을 밀어내고 이름을 북방시가(北方市街라고 고치고, 도시계획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군비축소의 조류는 예정한 최대의 군항시설 계획을 요항부(要港部)로 격하하게 했고, 도시계획도 무산되어 주민들이 되돌아와 살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 육군부대인 소위 '진해만 요새 사령부'가 주둔하였고 2차대전 말기에는 일본 군속의 관사, 이른바 근로동원 학도들의 기숙사(현 대야초등학교자리)가 건립되기도 했다.

 

광복 후, 귀한동포의 입주, 6·25 피난민의 입주 등으로  오늘날과 같이 인구밀도가 조밀해 졌으며, 동명은 우리식으로 개칭하면서 '여명리(餘明理)', '좌천리(左川理)'의 머리글자를 따서 여좌동이 되었다.

 

(출처 : 진해시 홈페이지와 진해의 땅 이름 이야기)

 

어제 여좌천 풍경입니다.

 

 

 

 

                          ▲ 진해여고 앞 도로

 

여좌천을 덮고 있는 벚꽃입니다.

많은 이들이 벚꽃은 일본의 잔재라고 말하며 벚꽃 축제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진해의 벚꽃은 우리나라 제주도가 원산인 왕벚이며, 진해에 왜 많은 왕벚이 심어졌는지를 알려드리기 위해 여좌천변에 설치된 액자에 담겨진 설명을 담아와서 정리합니다. 

 

벚꽃이 우리 시의 시 꽃이 된 동기

우리 고장에 벚꽃나무를 관고아수로 심게 된 것은 일제가 우리 고장을 침탈하여  대륙 침략의 해군 병참기지로 이용하게 되면서 그들의 국민성에 맞는 벚꽃나무를 선택한 것이 그 연유가 된다.

 

일본의 국민성에는 천황과 국가를 동일시하고, 천황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목숨을 버려서도 좋다는 '야마토다마시이(大和魂)'라는 생명 경시사상이 있다. 제2차 서계대전 시 이른바 특공대라 하여  스물이 안 된  소년항공병들을 연습기에 태워 폭탄을 싣고, 미 ·영 함대의 목표까지만 갈 수 있게 연료를 주어서 자폭을 하게 한 사실은 생명 경시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 벚곷은 개화기가 짧아 이런 생명 경시사상과 닮은 것이다.

 

일제 해군은 군항 설치 공사를 하면서 1910년 이후 모두 10만 500 그루를 심었다.

그 가운데 2만 그루는  도만동과 공설운동장 근처에 심어서 벚꽃놀이를 할 수 있도록 '사쿠라노 바바(벚꽃장)'라고 하여 벚꽃이 만개하는 봄철에는 관광객을 유치하였다.

 

8·15 광복 후 벚나무는 냉대를 받았다. 일본의 나라꽃인줄 아는 주민들은 벚나무를 부러뜨리기도 하고 베어서 연료로 써서 통제 구역이 아닌 곳에 있는 벚나무들은 남아 있지를 않았다.

60년대에 접어 들자 경제발전에 따른 도시계획을 새로이 하면서 가로수(관광수)의 선택이 어려운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때 한국 식물학자들이 왕벚나무가 제주도가 원산임을 밝혀내어, 다시 벚나무를 관광수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묘목을 국내에서 구할 수 가 없었다.

진해시와 해군에서는 공동으로 우선 일본에서 묘목을 사들여 도만동 일대와 해군영내 제황산공원 등 시내 요소에 심었다. 그 뒤 제일동포 편수개 외 6명이 1만 그루를 진해시에 기증하여 일반적인 식수도 하게 되었고, 기증은 이어졌다.

 

이제는 국내에서도 육묘의 기술이 발달하여 필요에 따라 국내에서 공급이 될 수 있게 되어 관광수로 선택하는 곳이 많아졌다.

현재 우리 고장의 식수 상황은 약 350,000그루에 이른다.(출전 : 우리 고장 문화유산)

 

이 글은 여좌천변의 대형액자에 담겨 있는 글을 옮겼는데, 내용 중에  '제왕산 공원'은 '제황산 공원'이기에 진해시 산림과(055 - 548 - 2291)에 전화를 했으며, 관계처에 연락하여 고치기로 했습니다.

근래 부쩍 산림과와 통화가 잦은 데 이러다가 미움을 받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화사하고 아름다운 진해 벚꽃입니다.^^ 

 

 

 

 

 

 

 

 

- 벚꽃축제 군항제 자세히 알기 : http://gunhang.jinhae.go.kr/main/(진해시 문화관광과 055 - 548 - 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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