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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이야기/진해 풍경

안골왜성에 흐르는 대금가락 - 천년학

by 실비단안개 2010.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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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골왜성은 안골동에 있는 동망산 정상 위에 만들어져 있는 데, 산의 지형을 3등분으로 나누어 부분적으로 정상을 평평하게 깎은 뒤 본성, 제1외곽, 제2외곽을 나누어서 따로 돌로 쌓고, 외곽으로 각 부분을 연결하였는데, 외곽의 일부는 흙으로 쌓았습니다.

 

안골왜성은 일본군들에 의해서 축성된 일본식 성으로 협판안치,가등가명,구귀가륭등이 구축 하여 1년씩 교대로 수비한 왜수군의 본거지였습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는 해전에서 우리 수군에게 패전을 거듭하여 막대한 군사적 타격을 입고 본국으로 부터의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우리 수군을 해상에서 제어하고 장기간 주둔을 위한 최후의 기지로 활용하기 위하여 1593년 남해안 연안일대의 요지에 18개소의 성을 축성하였습니다.

 

성둘레는 594M, 높이는 4~7M정도이며 성내의 전체면적은 약 5000평 정도로 비록 일본군에 의해서 축성되기는 하였지만 성을 축성하는 노역을 담당했던 우리네 선조들이 흘렸을 눈물과 한을 무심히 간과할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과 관련된 한일관계사의 물적증거는 물론 일본과의 축성기술을 비교연구할 수 있는 좋은 자료입니다. 

 

가끔 안골왜성에 올랐으며, 그동안 1, 2성만 다녔는데, 지난해 12월 일본인 교수를 안골왜성에서 만나 도면을 확인하니 3, 4성이 있었으며, 4성은 토성이었는데, 제가 이 부분에 대하여 지식이 없다보니 당시 포스팅을 하지않고 넘겼습니다.

그때 일본인 두 사람을 만났으며, 그들의 복장은 작업복이었으며, 도면과 카메라를 들고 있었습니다.

몇 백년이 흐른 지금 그들은 선조의 무엇을 찾기 위해 안골왜성을 찾았는지 알 수 없지만, 받은 명함으로 접속하여 알려고도 하지않았습니다.

 

                          ▲ 천부인권 님과 일본인 교수

 

그리고 오늘 안골왜성으로 갔습니다.

안골왜성의 풍경은 이 블로그를 방문하는 이라면 1, 2성은 대충 그려질 겁니다.

왜성으로 가는 길에 갓꽃이 흐드러졌습니다.

 

 

성벽 아래에 철쭉이 피었습니다.

어쩌면 이역만리에서 고향과 부모를 그리다가 먼 나라로 떠난 왜군의 어린 병사의 넋일수도 있을 겁니다.

 

 

시루봉이 보이는 2성에서 대금 가락이 흐릅니다. 

 

 

서편제의 천년학입니다.

 

 

연주자가 대금을 내린 후 대금에 대하여 말씀을 주셨지만, 제가 모두 기억을 하지 못하기에 다음 지식에서 가져왔습니다.

 

대금의 유래 

대금은 신라시대의 대표적 악기인 삼현(三鉉)거문고, 가야금, 향비파과 삼죽(三竹)대금, 중금, 소금중의 하나로서 대나무로 만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악기 중의 하나이다.

대금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악지, 동국여지승람, 악학궤범 등에 여러가지 기록들이 나타나는데, 이 중에서 삼국유사 권2 만파식적(萬波息笛)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전한다.

 

신라 제 31대 신문대왕은 개요원년(681년) 7월 7일에 즉위하여 선왕인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를 창건하였다. 그 이듬해 5월 초하루에 해관(海官) 박숙청이 아뢰기를, 동해 한 가운데에 작은 산이 떠서, 물결을 따라 감은사(感恩寺)를 향해 떠 온다는 보고를 하였다.

왕이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여 일관(日官)인 김춘질에게 명하여 점을 쳐보도록 하였는데 점을 친 결과 대답하기를, 선왕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시어 나라를 보호하시고 문무왕과 김유신 두 성군이 덕을 같이하여 나라를 지킬 보배를 내려 주시려하니, 만일 왕께서 해변에 가시면 반드시 값을 헤아릴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으시리라는 풀이를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그 달 7일에 이견대에 행차하여 사람을 보내고 그 작은 산을 살펴보게 하니, 산의 모양이 거북이의 머리를 닮았고 또 산위에 대나무가 하나 있는데 낮에는 둘이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된다고 아뢰었다.

왕은 그날밤 감은사에서 유숙하였다. 다음날 정오가 되어 대나무가 합하여 지더니 천지가 진동하고 바람불고 비가오며, 암흑의 날이 7일간이나 계속되다가 그달 16일에 가서야 비로소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하여졌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받들고 와서 받치는지라, 왕이 용을 영접하여 같이 앉아서 물어 가로되 '이 산의 대나무는 나누어지기도하고 합하여지기도하는데 그 연유가 무엇이오' 라고 물으니, 용이 대답하기를 '한손으로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나지않고, 두손으로 손뼉을 쳐야 소리가 나는것처럼 이 대란 물건도 합한 연후에야 소리가 나는 법이라'하며, '성왕(聖王)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이니 이 대나무를 베어 저[笛]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이다.' '지금 왕의 선친 문무대왕께서 바다의 큰 용이 되고, 김유신이 다시 천신(天神)이 되어 두 성왕(聖王)께서 마음을 같이하여 이 큰 보물을 주시어 나로 하여금 갖다 바치게 한 것이라' 하였다.

 

왕이 놀라고 기뻐하며 오색금채(錦彩)와 금과 옥을 주고 신하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가지고 바다서 나오매 산과 용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왕은 감은사에서 자고 17일에 지림사 서쪽 시냇가에 와서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이때 태자인 효소대왕은 궁궐을 지키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타고 달려와 왕에게 하례를 드리면서 서서히 살펴보고 아뢰기를 '이 옥대(玉帶)의 여러쪽이 다 진짜 용이옵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르기를 '네가 어찌 이를 아는가'하고 물으니 태자가 대답하기를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소서' 하였다.

이에 왼편 둘째쪽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연못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연못을 용연(龍淵)이라고 하였다.

왕이 돌아와 그 대나무로 저[笛]를 만들어 월성(月星)에 있는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하였는데, 이 저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비가 오면 개이며, 바람은 가라앉고 물결도 평온하여 졌다.

그래서 이 저를 이름하여 만파식적이라하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대왕때 이르러 화랑(花郞)인 부례랑(夫禮郞)이 기적적으로 살아오게 되니 이러한 기이한 일로 인하여 다시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이름을 지으니, 자세한 것은 그 전기(傳記)에 보인다. 이와같은 기록으로 보아 그 당시에는 세상의 모든 파도를 잠재우게 한다는 뜻으로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이름짓고 국보급의 신기(神器)로써 취급했던 기록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설화를 근거로 해서 대금의 기원을 신라시대로 삼는 이도 있으나, 전문가들의 견해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미 가로부는 저[橫笛]가 우리나라에 널리 펴져서 불리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고려시대 이후로는 모든 악기를 조율(調律)하는데 표준악기로 삼아왔다. 

출처 : http://k.daum.net/qna/openknowledge/view.html?category_id=OJ&qid=2f7r4&q=%B4%EB%B1%DD%B0%FA+%B9%AE%B9%AB%B4%EB%BF%D5&srchid=NKS2f7r4

 

모르는 것을 배워 알게 된다는 것은 재미있습니다.

천년학을 들려주고 대금에 대하여 설명해 준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안골왜성에 가면 다음은 금수현 음악당입니다.

그동안 몇 번 방문을 했지만 아무도 만나지 못했는데, 빈걸음이 되더라도 또 갑니다. 

 

남자 한 분이 텃밭을 돌봅니다.

인사를 드리니 금수현 음악당에 거주하신다고 합니다.

오래전부터 임대로 음악당의 두 동 중 한 곳에서 생활하며, 총 3가구가 생활을 한답니다.

관리는 금수현 선생님의 친척이 되는 분이 하며, 가끔 이곳을 방문한다고 합니다.

 

지난 글(금수현의 '안골 음악촌' 복원 소문의 진실)의 댓글에 고니 님이 주신 이야기처럼 이곳은 40여명이 공동명의로 되어 있답니다.

그외는 임대인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숙제 하나를 한 듯 합니다.

다음 방문때 오늘 만난분을 만난다면 그때는 커피라도 달라고 해야겠습니다. 

 

                          ▲ 금수현 음악당 텃밭에서 보이는 안골왜성

 

                          ▲ 보아주는 이도 많지않은데 음악당 뒤에 괴불주머니꽃이 가득 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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