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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이야기/진해 풍경

세스페데스 신부공원과 최초의 미사 집전 성지

by 실비단안개 2010.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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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곡성군 석곡의 규화언니가 누리와 왔습니다.

지난해 8월에 진해를 방문(곡성의 어린블로거 진해를 방문하다)했으며, 우리는 그동안 몇 차례 만났습니다.

그동안과 달라진 게 있다면 누리가 중학생이 되었다는 겁니다.

 

중학생이 된 누리가 공부에 지치는지 볼살이 빠졌으며, 처녀가 되려고 이마에 여드름이 송송났습니다.

중학생이지만 누리가 학교를 쉰 건 가정학습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용정중학교의 가정학습 기간은 5월 4일(화) 오전11시에 귀가하여 9일(일)오후 5시까지 귀교해야 합니다.

용정중학교는 전학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며, 누리는 1학년입니다.

용정중학교가 궁금한 분은 학교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용정중학교

 

진해의 많은 곳을 자랑하고 싶지만, 언니가 벼르고 있는 곳은 마산의 문신미술관이며, 봉하마을도 방문을 하고 싶다기에 문신미술관, 봉하마을, 진해만 생태숲 중에서 누리가 원하는 곳으로 가자고 했지만, 욕심많은 누리는 장소를 정하지 못했으며, 우리는 일단 집을 나서면서 결정하자고 했습니다.

 

먼곳에서 온 규화언니와 누리는 차도 한 잔 마시지 않고 함께 나섰습니다.

착오는 집앞의 운동장앞에서 났습니다.

해안도로와 반대방향으로 향했기 때문인데, 양편을 살피고 후다닥 차를 돌려 해안도로로 갔습니다.

진해 해안도로를 규화언니와 누리는 잘 압니다. 그동안 해안도로가에 특별한 건물이 지어진 게 없으니 달리며 즐기다가 진해만 생태숲으로 가면 됩니다. 가다 못가면 다음에 가면 됩니다.

우리가 차를 처음으로 멈춘곳은 사도마을 근처의  세스페데스 신부 공원입니다.

 

우리나라에 온 최초의 서양인은 1593년 일본인 고니시의 초청으로 이 땅을 밟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1551~1611)입니다.

세스페데스는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종 신부로  스페인 출신의 그는 일본에서 사역하던 중 임진왜란의 와중에 조선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역사상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서양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하멜(1653년, 효종 4년 7월 64명의 선원과 함께 무역선 스페르웨르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를 향해 가던 도중 폭풍을 만나 8월 제주도 부근에서 배가 난파되어 일행 36명이 제주도 산방산(山房山) 앞바다에 표착漂着)보다 60년 앞섰으며, 통영에서 주장하는 멘데스(포르투갈 상인 ‘주앙 멘데스’. 1604년, 선조 37년 6월15일 34세의 멘데스는 당시 캄보디아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일본 무역선이 풍랑을 만나 통영 해안에 표류하면서 중국인 16명,일본인 32명,흑인 1명 등과 함께 조선 수군에 생포돼 조사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음.) 보다도 앞섰으며, 하멜과 메덴스가 일본으로 가던 무역선이 난파 ·포류한 것과는 달리 비록 일본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초청이지만, 우리나라를 밟은 최초의 서양인이 세스페데스입니다.

  

                          ▲ 세스페데스 신부에 대해 읽고 있는 규화언니와 누리

 

 

  

세스페데스는 1551년 마드리드에서 출생하였으며, 예수회 선교사가 되어 1577년 일본에 파견되었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이래로 1611년 12월 고쿠라에서 60세 일기로 사망하기까지 34년간 일본의 천주교 전파를 위해 일했습니다.

 

임진왜란때 평양성을 공격했던 고니시 고니시가 포르투갈 예수회에 의탁한 천주교도였습니다.

고니시의 딸 마리아는 당시 19대 대마도주 소오 요시토시(宗義智)의 아내였는데, 그 역시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소오는 조선의 지리를 꿰뚫고 조선말에도 능통해 왜군의 앞잡이로 선봉에 섰으며, 세스페데스는 이때 일종의 군종 신부로 온 것입니다.

 

                         

                          ▲ 세스페데스 방한 기념조형물

 

1577년 당시 일본에서는 불교 신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처음에 외래 종교인 천주교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나 1587년 7월 국력을 모으고 통일한다는 명분으로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천주교를 탄압하고 모든 선교사들의 추방을 명령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년 1592년(선조 25) 4월에 15만여 명의 군대로 하여금 조선으로 쳐들어와 7년 동안 왜란을 일으키며, 이때 천주교 신자 18,000명을 군대로 편성하여 조선 침략에 출정시킵니다. 그리고 그는 세스페데스를 침략 선봉장이며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 군종 신부로 배속시켜 조선에 보냅니다.

(세스페데스는 1597년 3월에 다시 내한했다가 도쿠가와의 선교사 추방령으로 수박골에 피신해 있다 두달 후 일본으로 되돌아갑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시에 따라 쓰시마를 거쳐 1593년 12월 27일 부산에 상륙하였으며, 고시니 유끼나가의 부대가 주둔해 있던 경남 진해 웅천성(熊川城)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인 28일이었습니다. 그는 이곳을 비롯하여 울산성까지에 이르는 여러 성을 돌아다니면서 일본군 신자들에게 고해성사 등을 주는 한편 길가에 버려진 전쟁고아들을 구제하며 일본으로 잡혀가던 조선인들을 돌봐주었으나, 그 밖의 조선인들은 모두 그를 피하거나 피란하여 접촉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 고니시 유키나가 는 평양성 전투에서 6살 난 전쟁고아 소녀를 데려가 ‘오타아’란 이름을 지어주고 길러 ‘줄리아’라는 세례명을 얻게 했으며, 도요토미가 죽은 뒤 천하의 패권을 두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벌인 대격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는 패하여 처형됩니다.

처형된 이후 그의 가문은 완전히 멸문되었으며, 자신이 소유하던 영토도 가토 기요마사가 가로챘습니다. 고니시가 할복을 거부한 이유가 로마 가톨릭 교회 때문라는 것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인식하면서 일본에서는 대대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 탄압이 실시되었습니다.

그의 사후 줄리아는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으며, 그녀 역시 막부의 기리시탄 탄압으로 유배되어 여생을 유배지에서 보냅니다.

한편 고니시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오는 마리아와 이혼하고 도쿠가와의 가신으로 들어갑니다.

세스페데스는 일년 가까이 웅천에 체류하면서 천주교 병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영세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그 후 일본으로 돌아가 동료 신부들과 함께 왜군에게 끌려간 조선 사람들에게 영세를 주어서 노예로 팔려 가는 것을 막았고, 끌려간 조선 사람들이 외국 노예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막으려고 1598년 6월 1일에 나가사키(長崎)에서 선교회의(宣敎會議)를 열어 포르투갈 상인으로 조선인을 매매하는 사람은 파문하고 벌금을 받을 것을 결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등 조선 사람의 구호 활동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고 합니다.

 

스페인 마드리드 시장의 아들로 태어나 신부가 되어 수없이 많은 우리 동포를 구출하며 조선 사람을 위해 헌신적이었던 세스페데스 신부는 일본의 나가사키 등지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1602년에는 고쿠라(小倉)에 수도원을 지어 원장으로서 활동을 하다가 1611년 12월 영원히 눈을 감았습니다.

 

웅천왜성은 산봉우리에서 능선을 따라 산기슭까지 뻗친 석성으로 임진왜란때인 1593년 고니시 유키나가 구축하여 수비하던 곳으로 왜군의 제1기지로 삼던 곳이었으며, 정상부근에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로 미사가 집전된 성지입니다.'라는 안내팻말이 있습니다.

 

조선에 상륙한 일본 침략군 제1군은 사령관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다수의 가톨릭 신자 병사들은 낮에는 전쟁터에서 무고한 조선 백성을 학살하고 밤에는 함께 모여 신부 세스페데스와 함께 미사를 드렸습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임진왜란을 목격한 최초의 서양인입니다.  

 


 

규화언니와 누리와의 진해 여행이 이제 시작인데, 글이 길어 삼포로 가는 길 노래비가 있는 삼포 바닷가는 다음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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