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나들이에도 들고 다니는 책이 있습니다.
'나루를 찾아서(박창희)'입니다.
이 책은 지율 스님의 낙동강 사진전을 하면서 만난 책이기에 낙동강과 지율 스님이 추천한 책입니다.
'나루를 찾아서'는 강 이야기입니다.
낙동강물이 1300리를 달려 다대포에서 바다를 만나는 과정에 그 강과 언저리의 이야기로, 그곳의 풍류와 역사, 인물 - 강을 지키며, 지켰던 사람들 - 이야기가 강물처럼 잔잔합니다.
부활을 꿈꾸는 낙동강역
삼랑진의 낙동강 모래톱을 밟기전에 들리는 곳은 낙동강역입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처음 찾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낙동강역은 그곳에 가면 낙동강을 만날 수 있다라고 바로 알려주는 역입니다.
삼랑진역에서 분기되는 경전선의 첫번째 간이역이 낙동강역입니다.
간이역중에서도 무인 간이역으로 삼랑진역과 낙동강역 모두 삼랑진읍이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간이역다운 역사(驛舍)를 가진 낙동강역의 역사(歷史)는 오래되었습니다. 1906년 12월 12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으며, 당시는 삼랑진나루 인근에 자리했다가 1962년 지금의 자리로 신축이전했는데, 역의 역사는 100년이 넘습니다.
여기까지가 그동안 알았던 낙동강역의 역사(驛史)였습니다.
박창희의 '나루를 찾아서'를 보면, 낙동강역은 삼랑후조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다른 역에서 볼 수 없는 역사(驛史)자료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낙동강역사라는 작은 책자에는 1906년 개설 당시부터 역대 역장과 역무 내역 등이 수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무 내역에는 연도별 승객수와 화물 수송량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역대 역장과 이들의 역무 소감을 기록해 두기도 했습니다. 초대 역장을 비롯 1944년까지는 모두 일본인이었으며, 1949년 7월에 한국인 역장이 등장합니다.
일제강점기때 역세권내 주민 현황을 내지인(內地人)과 조선인(朝鮮人)으로 구분하여 남의 나라를 침략한 일본은 자신들이 주인이라고 기록해 두었는데 그 수는 해가 갈수록 늘어 납니다.
삼랑진읍은 경부선과 경전선 철도가 생긴 1905년 이후 번성했는데 철도부설과 함께 들어온 일본인을 보호하기 위해 헌병대와 파출소가 생겼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과수원, 학교, 상점들이 앞다투어 들어서면서 일찍부터 도시화가 되었습니다.
낙동강역을 빠져나와 강변으로 가는 길에 하부마을이 있으며, 건너편이 내부마을이라고 했습니다.
내부마을은 조선시대 경상도 3조창 중 하나인 후조창이 있었으며, 일반 조창처럼 세곡을 모아 보관했다가 서울로 보낸것이 아니라 밀양, 김해, 창녕 등지로부터 모은 세곡을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는 통영으로 보낸 것입니다.
내부마을 주민들은 요즘도 이곳을 '통창골'이라 하고 마을 산등성이를 '조창산등이', '조창만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내부마을 일대에는 여러 창고건물과 객주집, 여인숙 등의 건물이 즐비했고 선주, 조군, 관노들이 뒤섞여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그동안 삼랑진에서 가졌던 일본 가옥에 대한 궁금증이 낙동강역과 삼랑나루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느 정도 풀렸습니다.
낙동강역은 복선공사중이었기에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았지만, 맞이방의 방명록 도배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사람의 온기가 없어 다소 허허로운 그곳 한 켠에 장문열의 간이역이 걸려있습니다.
간이역/장문열
잡풀이 쇠어가는 낡은 철로위 황갈낙엽이 적적히 자갈위에
무게를 더 해가는 가을 한날 지친 철마가 발 걸음을 멈추고
철길위에 부서지는 빗물 한 모금 먹으며
남은 여로에 한숨내어 쉬는 곳
차창에 기대 앉아 고요한 안식에 눈을 감는다
더러는 낙동강역이 폐쇄되는 게 아닌가 하며 연민의 시선으로 역사를 봅니다.
그러나 역 측은 낙동강역은 폐쇄되지 않을 것이며, 부산신항 배후철도가 개설되면 위상을 회복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낙동강역은, 저 어디쯤 역이 있(었)는데 하다가 잠시 딴 생각을 하면 스치고 마는, 늙은 나무 사이에 웅크려있습니다.
삼랑나루터가 사라져 갑니다
하부마을 경로당 마당에 주차를 한 후 강가로 갔습니다.
강변 마을은 적막으로 더 평화롭습니다.
철로가 들어서기전 삼랑진은 밀양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의 상부 하부 내부 일대가 중심지였습니다.
삼랑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나루인데, 삼랑나루 위로 조창나루, 뒷기미나루가 있었으며,
삼랑나루는 지금은 통행이 멈춘 삼랑진 철교와 삼랑진교 사이에 있으며, 텃밭이 편하게 기대고 있는 옹벽을 보니 수심표시가 적혀있었습니다.나루를 건너면 김해 생림 마사리입니다.
* 삼랑진교는 국도 58호선(진해~청도선)상의 김해시 생림면 마사리와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간 낙동강을 연결하는 다리.
삼랑진 어원은 밀양강이 낙동강 본류에 흘러들어 세 갈래(三) 물결(浪)이 일렁이는 나루(津)라 하여 삼랑진(三浪津)이라 하였습니다.
현지 주민들은 "낙동강이 아침저녁으로 밀물과 썰물로 밀려오고, 밀양강이 합류하니 세 물"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이해를 돕고자 지도에 두 강과 삼랑진교와 삼랑나루를 표시했습니다.
삼랑진교와 삼랑철교 사이에는 몇 척의 배가 물결에 일렁였으며, 한 척의 배에선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창녕의 임해진 나루 이야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을 거슬러 내륙을 넘나들었던 바닷물은 1987년 하구둑이 막히면서 바다는 차단되고 강은 갇힌 꼴이 되었습니다.
철교와 삼랑진교 아래엔 횟집 몇 있습니다.
아름되는 등나무가 있는 횟집은 등나무횟집이며, 삼랑나루를 약간 비킨 횟집은 낙동횟집입니다.
낙동횟집은 영업을 한지 46년째니 낙동강과 삼랑나루의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아는 곳입니다.
'나루를 찾아서'에 나온 사진을 보여주며, "딱 이곳에서 찍었군요"하니, 3살때 부모님과 이곳으로 왔다는 중년부인은 고구마순껍질을 벗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 놓았습니다.
어업으로 삶을 꾸리던 이들과 횟집은 영 손을 놓지못해 배를 강에 띄우며 횟집을 운영하긴 하지만 옛날처럼 메기나 웅어가 잡히지 않기에 대부분 양식어종으로 영업을 하는데, 낙동강 살리기 사업으로 보상문제가 해결되면 영업장이 헐릴 것 같다고 합니다.
그나마 나루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이곳을 이제 얼마나 더 볼 수 있을 지 모르는 삼랑나루터입니다.
메기매운탕을 주문해 두고 낙동강 12, 13공구 공사현장으로 갔습니다.
이곳은, 16~7년전 '무작정 기차여행'에서 우리 아이들과 강물에 발을 담그고 놀았던 곳이며, 몇 년전 '무궁화호 타고 서울역가기'때 겨울에도 딸기가 익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제 딸기밭과 모래위엔 잡풀이 그득하며 강속의 모래는 뽑아 올려져 강 건너 생림의 농지에 산처럼 쌓이고 있습니다.
생판 처음듣는 농지리모델링은 순한 농부가 토지의 질을 높이기 위해 땀을 흘리며 하던 객토가 아닙니다.
삼랑나루 아래로 삼랑진역이 있지만, 해가 지고 있다는 핑계로 스쳤습니다.
그 아래 작원관과 작원나루를 기차를 타고 가서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9월 23일)
낙동강이여/유치환
태백산 두메에 낙화한 진달래꽃잎이
흘러흘러 삼랑(三浪)의 여울목을 떠내릴 적은
기름진 옛 가락(駕洛) 백 리 벌에
노고지리 노래도 저물은 때이라네.
나일이여, 유프라테스여, 갠지스여, 황하여
그리고 동방의 조그만한 어머니, 낙동이여.
저 천지 개안(開眼)의 아득한 비로삼날부터
하늘과 땅을 갈라 흘러 멎음 없는 너희는
진실로 인류의 거룩한 예지(叡智)의 젖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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