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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가옥·가야 배(船)와 패총이 있는 봉황동유적지

by 실비단안개 2012.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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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7일, 경남도민일보와 경남풀뿌리환경교육정보센터가 함께 하는 2012 생태·역사기행,  가야유적지  김해편입니다.

김해 민속박물관에 이어 봉황동유적지로 갔습니다.

 

봉황동 유적

2003년 2월 5일 사적 제 2호로 회현리 패총과 봉황대 유적이 봉황동유적으로 통합 지정된 문화재입니다.

김해 봉황동 유적은 김해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는 김수로왕릉 정면에 위치한 봉황대라고 불리우는 구릉과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한 대규모 생활유적입니다. 이 일대는 일찍이 청동기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이후 생산과 주거의 거점지역이었으며, 이후 대규모의 주거지, 고상건물지, 방어시설, 한국 최대 깊이의 패총 등이 발굴되는 점 등으로 보아 금관가야 지배층 집단의 중심 거주지역으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적2호로 지정되어 있는 봉황동유적은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던 곳으로 남동쪽의 조개무덤인 회현리패총과 봉황대 일대의 주거유적을 합쳐서 봉황동유적지로 확대지정 되었습니다

봉황동유적지가 있는 봉황대는 예로부터 가라대, 망해대, 여의현, 호현, 회현 순으로 불려 왔으며, 조선 후기 김해부사 정현석이 언덕의 생김새가 봉황이 날개를 편 모습과 같다고 해서 '봉황대'라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산 정상부 암벽에 '봉황대'라는 글귀를 새겨 놓았으며, 가락국 숙왕 때 황세 장군과 출여의 낭자에 관한 전설이 전하고 있는데 여의각, 황세바위 등이 남아 있고, 여의 낭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음력 5월 5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8월 17일 많이 더웠습니다.

일행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봉황동유적지로 갔습니다.

우리를 먼저 맞아준 건 기마무사상(騎馬武士像)이었습니다.

이 기마무사상은 국보 제275호로 지정된 기마인물토기와 가야시대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참고해서 청동주물로 만든 것으로 복원된 기가무사상은 창을 든 무사뿐만 아니라 말에도 철제투구와 갑옷을 입혀 보호하고 있어 가야의 우수한 철기문화와 강력한 군사력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또 화려한 금동제 말장식과 섬세한 말갖춤새는 가야 기마무사의 위상과 고도로 발달한 가야문화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보는이에게는 말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싶더군요.

우리가 걸은 이 길은 '가야사 누리길'입니다.

 

 

고상가옥과 망루

기마무사상주변으로 고상가옥과 가야의 배가 있었습니다.

금관가야 교역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이곳을 정비하면서 옛가야의 생활모습을 체험할 수 있는 시골 원두막같은 고상가옥과 가야선박을 재현해 놓고 있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고상가옥 건물터와 가야시대에 만들어진 집모양토기를 참조하여 복원한 고상가옥은 가야시대의 보편적인 주거형태인 수혈주거와 달리 바닥면이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로서 곡식이나 물건 등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례의식과 관련된 건물로 추정하고 있으며, 교역에 필요한 물품들을 저장하는 창고로도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 망루가 있는데, 여기에 세워진 망루는 가야시대 당시의 건축기술과 구조를 고려하여 추정 복원한 것으로 높이는 약 10m입니다.

망루는 주변을 효율적으로 관찰하고 경계하기 위하여 높은 곳에 지은 건축물로 외부침입으로 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시설의 일종입니다.

이러한 망루는 청동기시대의 취락유적지에서도 많이 확인되고 있으며, 가야시대에도 널리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봉황동유적은 금관가야의 도성유적으로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어 선박의 진출입과 외적의 침입을 관찰 감시하기 위해 어느곳보다 많은 망루를 설치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이는 해반천변의 발굴에서 열을 지은 대형 기둥구멍들을 확인한데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가야시대의 보편적인 주거형태인 수혈주거인 진해 용원의 삼한시대 움막입니다. 

시기적으로 기원후 2-4세기 경에 우리나라 삼한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주거유적으로 위치적으로 금관가야의 입구부에 해당되는데, 이 유적은 삼한시대 생활집단 유적의 특징을 알아보는 중요한 자료로서 당시의 생활상과 자연환경을 규명하는데 큰 역활을 할 수 있는 원형수혈 주거지를 가상복원한 움집입니다.

 

 

가야의 배(船)

봉황동 유적지는 해반천변에 공원처럼 있습니다.

가야는 고대 동아시아의 여러지역과 교역을 통해 성장한 정치체이며 수로와 해로를 통하여 왜와 한사군에도 철기를 수출하였습니다.

가야시대의 배를 본 떠 만든 배모양 토기가 여러점 남아 있어 구조와 형태, 크기 등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고 하는데 여기에 복원된 배는 호림박물관에 소장된 배모양토기를 토대로 당시의 항해술과 선박의 구조 등을 고려하여 제작한 것으로, 가야시대 조선술과 선박구조의 일면을 엿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야시대의 '배'가 김해시 봉황동유적(국가사적 제2호) 남단 끝부분에서 2012년 최초로 출토되었습니다.

진영 여래리 배모양 토기 등 그동안 토기는 출토된 사례가 있었으나 가야시대의 선박이 일부라도 실물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선체 일부뿐만 아니라 운항을 위한 노(櫓)와 닻으로 추정되는 돌도 각각 1점 출토되었습니다.

선박부재의 잔존길이는 약 3m 40㎝, 폭 약 60㎝로 구조선(構造船)의 한쪽 격벽으로 추정되며, 전체적인 규모는 대략 길이 30m, 폭 10m이상일 것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이번에 출토된 배의 부재는 신석기시대의 비봉리유적 배 이후 국내 2번째로 오래된 배로 가야의 우수한 선박제조 기술을 엿볼 수 있어 해상왕국 가야의 실체를 증명할 획기적 자료로 평가되며, 2000년 발굴된 봉황동유적 서편일대의 가야시대 대규모 창고유적과 더불어 이곳에 가야의 주요 항구유적이 있었음을 증명한다고 합니다.

발굴된 선박부재 등은 보존처리 과정을 거친 후 정밀실측 등을 통해 선박전체의 규모와 구조를 복원할 예정이며, 향후 이를 토대로 봉황동유적 남서쪽 일대를 가야시대 대규모 항구유적으로 정비복원 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가야의 배는 가야시대 선박접안시설을 재현해 놓고 있는 연못에 있으며 주변에 고상가옥이 있습니다.

 

 

 

회현리 패총(貝塚)

회현리 패총은 1907년에 발견되어 1920년 1차 발굴되었고 당시의 행정구역에 따라 회현리 패총으로 명명되었습니다.

패총은 조개껍질과 생활 쓰레기가 함께 버려 쌓여 있는 곳으로, '조개더미'라고도 하며 당시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장소로 봉황대 언덕 근처에 서로 시기가 다른 회현리 조개더미와 무덤유적이 있습니다. 회현리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토기, 뼈·뿔도구, 석기, 가락바퀴(방추차), 불탄쌀(탄화미), 중국 화폐인 화천, 동물뼈 들이 나왔다고 합니다. 토기는 적갈색이나 회청색을 띠며, 사슴뿔이나 뼈를 가공해 만든 칼자루가 많앗다고 하며, 불탄쌀은 고대의 쌀과 농경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합니다.

 

화천은 중국 신(新)나라의 왕망이 기원전 14년에 만든 화폐로 유적이 형성된 연대를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며 중국과의 왕래도 짐작하게 하는데, 배를 타고서 중국 땅에 있던 여러 나라와 일본 땅의 여러 나라를 왔다갔다하며 장사를 했다는 자료가 되겠습니다.

조개더미의 동쪽에서 고인돌, 항아리에 뼈를 넣었던 독무덤(옹관묘), 집터가 발견되었으며, 무덤들은 청동기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짐작)가락궁궐터와 회현리 패총전시관

 

김해 봉황동 유적은 1907년 8월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류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초기 발굴은 1907년, 1914년, 1915년, 1917년, 1920년, 1922년, 1934년, 1935년까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8차례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의 사용했던 방법은 계단식 조사방법이었는데, 당시에는 획기적인 인공층위 설정에 의한 현대적인 기법의 고고학적 조사라는 점에서 학문적 의미가 크다고 합니다. 이 방법은 일단 층위를 중시하는 근본 취지에서 출발하여 좁은 지역을 샘플로 선정, 계단식으로 발굴함으로써 짧은 시간안에 전체적인 유적의 성격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강제로 설정된 인공 층위를 통해 획일적으로 무조건 위쪽은 후대, 아래쪽은 선대의 것으로 적용하여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자연층위의 특수성을 전혀 감안하지 않은 모순을 안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계단식 발굴에 의한 층위 구분은 실질적으로 이용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패총의 퇴적에 따른 당시 사람들의 폐기, 그 이후의 지형 특징, 비, 바람, 물 등 자연여건에 따른 영향, 후대인들이 땅을 활용하기 위해 행한 훼손과 교란 등 일련의 연쇄과정의 이해를 바탕으로 패총의 층위와 시간적인 연관관계에 대해 논하여 할 것이라고 합니다.

 

 

전시관의 조개껍데기는 대부분 굴껍데기였습니다.

친정이 바닷가 근처이기에  어릴때 식사후 조개껍데기 등을 바닷가에 버리곤 했는데 조개더미는 그렇게 쌓인 건데 김해쪽은 옛날에 굴이 많이 생산된 모양입니다.

 

 

 

황세바위 전설

구릉위에는 황세장군과 여의낭자의 전설과 관련된 여의각, 황세바위 등이 남아 있는데 답사일 황세바위쪽은 못 갔지만 황세 장군과 여의 낭자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가락국 9대 겸지왕 때의 일이다. 그때 황 정승과 출 정승이 있었다.

이들은 국가의 동량으로 서로 사이좋은 친구간이었다. 어느 날 이들은 굳게 약속을 했다.

 

두 집안 모두 같이 아들이나 딸을 낳으면 의형제를 맺고 서로 다르게 아들이나 딸을 낳으면 혼인을 시키기로 하였다.
이후 불행하게도 몰락한 황 정승 집에서는 아들을 낳았으며 출 정승 집에서는 딸을 낳았다. 하지만 출 정승은 몰락한 황 정승과 혼인하여 같이 몰락하고 싶지는 않아 딸을 아들로 위장을 하여 의형제를 맺었다.

황정승의 아들은 황세, 출정승의 딸을 여의로 이름지었다.

황세는 여의가 아무래도 여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었다.

어느 날 여의에게 이 바위 위에서 오줌을 누어 누가 멀리 가는가 시합을 하자고 제의하였다. 여의는 삼대 줄기를 사용하여 위기를 벗어났다.
하지만 여의는 커갈수록 낭자티가 분명해졌다.

 

황세는 이번에는 거북내에서 같이 멱을 감자고 제의하였다. 여의는 마침내 여자임을 밝히고 혼인을 약속했다. 장군이 된 황세는 신라군과 싸워 크게 이겼으며, 가락 왕은 황세를 유민 공주와 혼인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를 알게 된 여의 낭자는 황세를 그리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유민 공주와 혼인을 한 황세 장군은 이 소식을 듣고는 자신도 슬퍼하다가 여의 낭자를 따라 죽었으며, 이를 비관한 유민 공주는 출가해 스님이 되었다.
황세 장군과 여의 낭자가 오줌누기 시합을 한 바위가 바로 황세 바위다. 여의 낭자가 순절하여 그 혼이 돌문으로 들어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하늘문, 여의 낭자와 황세 장군이 앉아 놀았던 여의좌, 여의 낭자가 책을 읽었던 독서대가 있어 황세 장군과 여의 낭자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아름답고도 가슴 아픈 이야기가 바위 틈새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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