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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읍성, 책임 연대 위해 공사 실명제城

by 실비단안개 2012.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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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토요일,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http://cafe.daum.net/jjmkssm1545-1598)의 임진왜란 전적지인 가덕도와 진해 웅천 일대 답사, 웅천읍성(熊川邑城)편입니다.

 

안골왜성에서 내려올 때 비가 그쳤기에 걸음이 제법 가벼워졌습니다.

가벼워진 이유 중 하나는 제포성지와 웅천왜성답사가 시간관계로 취소되었기에 웅천읍성 답사후 저녁식사장소로 바로 갈 수 있기 때문이었기도 했습니다.^^

 

웅천읍성(熊川邑城)
웅천읍성은 경남기념물 제15호로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 남문동, 서중동 일대입니다.
1434년에 세종대왕의 명으로 축성된 진해구 성내동 일대 웅천읍성의 성곽 401m, 해자(성 주위에 판 도랑) 408m, 동문루 1채 등이 복원되어 있으며, 복원공사는 계속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웅천읍성(熊川 邑城)은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주민들을 보호 하기위하여 세종 16년(1434년)에 처음으로 축성하였으며, 세종 21년(1439)년에  축조했는데 일본사신은 제포왜관에서 나와 웅천읍성의 현감에게 보고하고 창원을 거쳐 한양으로 이동했습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세종 16년에 김해읍성과 웅천읍성을 다 같이 수축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세종 17년에는 웅천읍성이 완공되지 않아 결국 그 포진의 수군(水軍)을 동원하여 완공하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 성안에는 웅천초등학교, 웅천고등학교, 웅천 우체국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인근에는 웅천 빙고지, 주자정동강당 등이 있으며, 웅천왜성과 웅천읍성과의 거리는 직선거리로는 대략 2km 내외입니다.

 

견룡루가 있는 웅천읍성의 동편성벽입니다.

교과서처럼 잘 복원된게 좀은 못 마땅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데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솔직한 마음입니다.

 

 

붉은줄쪽이 견룡루(동문)와 성벽, 해자가 복원된 웅천읍성 동편입니다.

 

 

동편성벽은 웅천초등학교 담장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객사가 있었던 자리입니다.

 

 

웅천읍성 고지도와 객사인데, 객사 자리에는 현재 웅천초등학교 본관건물(▲)이 있습니다.

웅천초등학교 앞에 '읍성으로 가는 길' 안내와 고지도 등이 있습니다.

안내에 따르면, "웅천동은 진해의 뿌리가 발원된 유서깊은 역사의 고장으로 조선시대 삼포개항지 중 제일 큰 규모의 제포(내이포)와 이순신 장군의 승전지인 웅포해전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이곳으로 부터 전방 150m 지점에 있는 웅천읍성(경남기념물 제15호)은 세종 16년에 둘레 1,064m, 높이 4.5m로 남해안 일대 왜구들의 노략질에 대비하여 동헌, 객사, 향사단, 해자와 6개의 우물 등으로 축성되었습니다.

 

이렇듯 웅장했던 웅천읍성은 경술국치로 말미암아 일제의 신작로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하나둘씩 문화재가 사라져 마침내 성터 흔적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하 생략

 

 

동헌터로 추정되는 웅천고등학교의 느티나무와 웅천초등학교의 느티나무입니다.

두 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웅천고등학교 보호수는 수령 280년, 웅천초등학교 보호수는 270년으로 추정하며, 2006년 보호수로 지정되었습니다.

 

 

 성벽 주변을 둘러보겠습니다.

웅천읍성에서 눈에 가장 먼저 띄는게 해자입니다.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으로 성 주변을 싸고 있는 넓고 깊은 해자는 이 성이 얼마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는지를 짐작하게 해 줍니다.

 

2007년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 현장에서 인골과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동래읍성의 해자로 밝혀졌는데, 동래읍성 전투에서 죽거나 처형 당한 동래읍성 병사들과 백성들을 왜군들은 해자에 버리고 메운 것으로 추측한다고 했습니다.

웅천읍성 해자에도 동래읍성과 마찬가지로 바닥에는 촘촘히 깐 나무말뚝 시설물인 '목익'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성벽의 숨은그림찾기입니다.

성벽을 보면 쌓은 시대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웅천읍성 성벽의 기초가 되는 부분에는 네모진 돌을 쌓았으며, 그 위에 사각형 또는 삼각형의 돌을,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모양이 되게 쌓았으며, 벽면은 땅과 수직으로 쌓았고 큰 돌 사이사이에는 작은 돌을 끼웠습니다.

 

가까이 김종영 생가와 고려동 재령 이씨 종택에서 확인이 가능한 옛날 양반가의 담장에 구멍이 있는 것을 봤을 텐데요, 담장 중간쯤에 있는 구멍은 외부와 소통하는 도구며, 담장 아래부분의 구멍은 배수시설로 '수구'라고 합니다.

웅천읍성의 수구(水口) 설명입니다.

"웅천읍성에서 확인되는 水口(성벽에 마련된 배수시설 중 규모가 작은 것)는 동북벽에 1개소, 남벽에 1개소 2개소가 확인되고 있다. 이곳 동북치성 북쪽 하단 수구는 기단석 위에 치석한 두께 30cm의 석재 2기를 내벽까지 관통시키고, 그 위에 두께 50cm 정도의 장방형 석재를 올려 놓았으며, 그 위에 성석들을 세워쌓기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폭 25cm, 높이 40cm로 조사 당시 입구는 파손된 기와로 폐쇄되어 있었으며, 수구  하부에 토층을 확인한 결과 장기간에 걸쳐 물이 흘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수구 내부를 확인한 결과 수구는 내벽으로 관통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ㄱ 자상으로 굴설된 것으로 현재의 웅천초등학교가 과거에 객사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객사에 딸려 오수를 방출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습니다. 

 

 ▲ 창원부사(팬저)의 설명

 

요즘 다리 등 건축물은 대표의 이름이 각석되어 있으며, 옛날 객사나 동헌 등 편액에는 누구글씨라는 것이 분명하지만 성벽에 책임자의 이름이 있다는 건 웅천읍성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이를 명문석(銘文石)이라 하는데, 웅천읍성의 동벽과 남벽에는 5개의 명문석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확인된 명문석의 내용은 읍성 축성구간을 담당한 군현(郡縣) 및 감독의 성명을 각석하여 축성후에도 그 책임을 연대하기 위해 실시한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관련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공사실명제로 하자가 있을 경우 벌을 받게 되니 열과  성을 다하여 축성했을 것입니다.

 

몇 년전 부산 영도다리 석축에 녹색테이프가 붙어 있더군요.

하여 근처주민에게 녹색테이프 정체를 물으니 다시 다리를 놓을 때 원래의 돌을 기억하기 위해 임의로 번호를 붙여둔다고 했는데 웅천읍성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착되어져 있는 녹색테이프가 예전에 있었던 성돌이고 나머지는 요즘 축성한 돌입니다.

 

웅천읍성 성벽에서 여러가지를 알게 되었는데요 복습입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인 '해자'와 해자에 박힌 나무말뚝 '목익', 배수시설인 '수구',  실명제 확인이 가능한 '명문석'과 청색테이프를 붙인 예전 구분하는 것 까지 입니다.

 

 

견룡루에 올라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어디서나 빛나는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 회원을 옹성과 함께 담았습니다.

 

옹성(甕城)은 성문을 엄호하기 위해 성문 바깥쪽에 반원형으로 쌓은 성으로 성벽과 높이가 같았는데, 적의 침략시 해자를 건너 옹성 공격후 성문을 공격하게 되니 목익을 합하면 두 세번을 거쳐야 성문공격이 가능하니 당시로서 대단한 방어시설이라고 하겠습니다.

웅천읍성의 경우 서문 옹성으로 추정되는 곳을 7월 답사시 확인했는데, 서문 복원시 어떤 모습이 될지 벌써 궁금합니다.

 

 

성벽에서 다시 한 번 찍어 본 옹성입니다.

 

 

옹성과 생김은 다르지만 비슷한 역할을 한 치성(雉城)이 있습니다.

치성이란 성곽의 요소에 성벽으로 부터 돌출시켜 전방과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과 성벽에 붙은 적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치성의 '치(雉)'는 '꿩'이란 뜻을 가지는데, 이는 꿩이 제 몸을 숨기고 밖을 잘 엿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웅천읍성의 치성은 총 6개로 이곳의 치성은 동문을 보호하기 위해 축조된 적대로 치성은 체성부에 덧대어져 축조된 것으로 길이 8.4m 너비 5.5m 규모입니다. 축조수법은 체성에 비해 조잡한데 마치 쌓다만 것 같습니다.

 

전언에 따르면 조선시대 웅천현감이 이곳에서 동쪽의 사대를 향해 활을 쏘았다고 전해지며, 치성의 정상부와 주변에서 당시 건물에 사용했던 암·수 기와편이 주변에 산재되어 있어 누각과 같은 건물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 치성

 

견룡루 좌우에 석환(石丸)이 있습니다.

석환은 돌로 어른 주먹만한 것에서 부터 성인남자 머리만한것 까지 있습니다. 

조선시대 당시에는 이런 돌을 전문적으로 던지는 부대가 있었으며, 삼포왜란 당시 왜인들이 웅천읍성을 점령하고 있자 김해에 있는 투석부대를 데리고 와서 웅천읍성에서 전투를 치루었다고 합니다. 당시 투석꾼이 던진 돌에 왜인의 방패가 부서지기도 했다고 할 정도로 돌의 위력은 강했습니다.

 

견룡루에서 웅천 남산의 웅천왜성 윤곽이 보입니다.

지나고 나면 아쉽기 마련인데요, 답사날인 그날 연대봉을 올랐기에 지친상태라 웅천왜성 답사 취소라는 말에 좋아라 했지만 기록을 하려니 부족합니다.^^

읍성과 왜성간의 거리는 직선거리로 약 2km라고 하니 가까운 거리지만 요즘 이런저런 공사관계로 웅천왜성 입구 찾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웅천왜성은 남문동의 남산(해발184m) 산봉우리에서 능선을 따라 산기슭까지 뻗친 석성으로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소서행장이 구축하여 수비하던 곳으로 정유재란에 재침하여 다시 구축하였다고 합니다.
성내의 넓이는 약 5,000 여평 정도이고 성벽의 둘레는 1,250m, 높이는 3~8m에 이릅니다. 
          

웅천왜성은 1985년 1월 14일 경상남도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남해안에 왜군들이 축조한 18개 왜성 가운데 하나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진을 치고 왜군의 제2기지로 활용하던 곳으로 남산왜성(南山倭城)이라고도 하며 그동안 증, 개축은 없었습니다.

구조는 일본식으로 복잡하게 축조되었고 정상부에 본성(本城)을 두고 점차 산록을 따라 이지성(二地城)·삼지성(三地城)이 질서있게 배치되었습니다. 육지로의 방비를 철저히 하기 위해 남쪽으로 긴 나성(羅城)을 두었고, 성내 면적은 17,930㎡(5423.825 평)이고 성벽 높이는 3∼8m에 이릅니다.

현무암과 청석을 써서 쌓았는데 큰 것은 1.5m×1.5m×2m에 이르는 것도 있고, 현재 남은 성벽 길이는 700∼800m입니다. 해안의 선박과 연락하기 위한 통로가 있으며 양 측면에 외호(外壕)가 남아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2012년 5월 31일 진해탐방시 찍은 것이며, 웅천왜성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됩니다.

-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 진해2차 웅천왜성 탐방후기

  

 

 

파란색 표시는 웅천왜성에서 보일락말락하는 안골왜성입니다.

 

 

아래 풍경은 (위 사진) 남문휴게소(흰돌메공원)에서 볼 수 있는 웅천왜성입니다.

 

 

웅천왜성은 올려도 그만 올리지 않아도 그만이겠지만, 예정되었던 답사코스며 웅천읍성에서 보이기에 링크와 함께 기록했습니다. 

2012년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 틈새답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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