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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이야기/진해 풍경

벚꽃에 가려진 시월유신탑,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아

by 실비단안개 2014.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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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포스팅해야지...

사진은 2년전 군항제때 찍은 사진도 있습니다.

 

창원시 아이세상 장난감 도서관과 진해 문화원 뜰에는 시월유신탑이 있습니다.

군항제때 여좌천변을 걸으니 꽃놀이를 즐기는 젊은 친구들은 "로망스라는 드라마를 모르지만 로망스 다리가 있다고 하더라"고 할 정도로 세월은 흐르며 우리는 알지만 우리 아이들 세대는 모르는 그런 것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시월유신입니다.

 

시월유신탑이 있는 아이세상 장난감 도서관은 원래 진해 시립중앙도서관이었는데 중앙도서관이 옛 주택은행자리로 이전개관을 하고 그 자리에 아이세상 장난감 도서관이 리모델링하여 개관했으며, 2층에는 진해 문화원이 있습니다.

 

- 진해 아이세상 장난감 도서관 구경하기

 

통신동 2-2 중원로터리에 위치한 도서관은 1975년 9월22일 중앙일보, 동양방송 창립 10주년 기념사업으로 건립한 뒤 진해시에 기증한 것으로 도서관 뜰에는 유신시대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10월 유신탑'이 여전히 세워져 있는데 철거냐 보존이냐를 두고 진해 우체국만큼 이야기가 나누어 지는 탑이기도 합니다.

 

 

시월유신은 1972년 10월 17일 당시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장기 집권과 영도권 강화를 위하여 헌법의 중요 부분을 정지시키고 비상조치한 사건입니다.

그때는 시월유신이 대단한 줄 알았는데, 국기하강식때는 태극기가 있는 방향을 향해 가슴에 손을 올렸으며, 국기에 대한 맹세, 국민교육헌장은 기본적으로 외워야 했던 그런 시절이었으며, 좀 더 자랐을 때 시월유신으로 우리는 더 잘 살게 될 거라는 그런 마음을 대다수 국민이 가지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릴때는 노는 게 일이었지만 늘 구경만 하는 소극적인 성격이었는데 친구들은 산토끼 가락에 시월유신 노래를 부르며 고무줄놀이를 했습니다.

'시월의 유신은 김유신과 같아서 삼국통일 되듯이/ 남북통일 되어요.'

 

당시 냉장고 값보다 비쌌던, 지금은 애물단지같은 민족문화대백과의 시월유신 설명입니다.

 

민족문화대백과(13권 536~537p)

시월유신 1972년 10월 17일의 정변을 일컫는 말, 대통령 박정희가 실시한 일종의 초헌법적인 헌법침해조처였고, 이로 인하여 이른바 유신체제라 불리는 강력한 권위주의체제가 성립되었다.  이른바 '10·17비상조치'의 내용을 살펴보면, ①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등의 정치활동을 중지시키는 등 헌법의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킨다. ② 효력이 정지된 일부 헌법조항의 기능은 비상국무회의가 수행하며 비상국무회의의 기능은 현행헌법의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③ 비상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헌법개정안을 공고하며 이 개정안은 공고한 날로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투표로써 확정한다. ④ 헌법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 절차에 따라 금년(1972년) 말 이전에 헌법질서를 정상화시킨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시월유신의 정치적 동기와 배경에 대해 박정희는 대통령특별선언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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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세력균형관계에 큰 변화가 일고 있어서 한국의 안보에 위험스러운 영향을 미칠 것이 예상된다. ② 남북한간의 사태진전에 많은 변화가 일고 있다. ③ 동족상잔의 민족적 비극의 재발을 막고 이산가족의 재결합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남북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④ 그런데 우리의 주변에는 무질서와 비능률이 활개치고 있고, 대의기구는 파쟁과 정략의 희생물이 되어 통일과 남북대화를 뒷받침할 수 없다. ⑤ 현행 법령과 체제는 냉전시대의 산물로서 오늘날의 상황에 적응할 수 없다. ⑥ 정상적 방법으로는 이러한 개혁이 어려우므로 부득이 비상조치로써 체제개혁을 단행하여야 하겠다. 유신의 이념은 10월 27일의 유신헌법을 위한 개헌안의 제안이유서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그 이유서에 의하면 현행 헌법하의 정치체제가 가져다준 국력의 분산과 낭비를 지양하고, 이를 조직화하여 능률의 극대화를 기하며, 민주주의의 한국적 토착화를 가능케 하는 유신적 개혁을 단행하는 것만이 국가의 안전과 조국평화통일을 기약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유신개헌안의 특징을 보면 ① 조국평화통일이라는 역사적 사명완수의 지향, ② 민주주의의 토착화, ③ 국력의 조직화와 능률의 극대화를 위한 통치기구와 관계제도의 개혁, ④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면의 안정을 유지하고 번영기저의 확고화, ⑤ 국민기본권을 우리 실정에 맞게 최대한 보장, ⑥ 항구적 세계평화에 이바지할 것을 다짐한다는 것 등이었다. 정부는 10월 27일 이 유신헌법개정안을 공고하고, 11월 21일 국민투표에 붙였다.

국민투표는 91.9%의 높은 투표율과 91.5%의 찬성을 얻었다(총유권자 84%의 찬성). 이와 같이 확정된 유신헌법에 따라 11월 2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과 그 시행령이 공포되고, 12월 15일 총대의원수 2,359명을 선출하는 선거를 1,630개의 선거구에서 일제히 실시하였는데, 투표율은 70.4%였다. 이어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제1차 회의에서 대통령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12월 27일 취임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성립된 유신체제는 기존의 정치체제와는 다른 여러 가지 제도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 특징들을 살펴보면, ① 조국통일정책의 심의 결정과 대통령선거 및 일부 국회의원선거 등의 기능을 갖는 통일주체국민회의가 헌법기관으로 설치되고, ② 직선제이던 대통령선거제도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한 간선제로 되었으며, ③ 대통령의 임기가 4년에서 6년으로 연장되었다. ④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의 후보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일괄 선출하고, ⑤ 국회의원의 임기를 6년과 3년의 이원제로 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의원은 3년으로 하였으며, ⑥ 국회의 연간개회일수를 150일 이내로 제한하고, ⑦ 국회의 국정감사권을 없앴으며, ⑧ 지방의회는 조국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구성하지 않을 것을 못박았다. ⑨ 대통령이 제의한 헌법개정안은 국민투표로 확정되고, 국회의원의 발의로 된 헌법개정안은 국회의 의결을 거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다시 의결함으로써 확정되도록 하였다.

 

그 밖에 1972년 10월 17일의 비상조치와 그에 따른 대통령의 특별선언 등은 제소하거나 이의도 제기할 수 없도록 헌법에 못박았다. 이것은 민주정치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간선제, 사실상 대통령의 임명제와 흡사한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에 대한 간선제 및 국회의 국정감사권의 박탈 등으로 가장 중요한 국민의 선거권과 국정감독권을 제한, 위축시켰기 때문이다. 더욱이, 헌법개정방법을 이원화하여 대통령이 원하는 헌법개정은 비교적 쉽게 하고, 대통령이 원하지 않는 헌법개정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합헌적인 체제개혁의 길을 봉쇄하였다. 한마디로 박정희는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에게는 원칙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대권을 장악하여 입법·행정·사법의 3권을 통합하고 조정하는 영도자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게다가 6년 임기만을 규정하고 중임이나 연임제한에 관한 규정을 전혀 두지 않음으로써 1인에 의한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하였다. 따라서, 비판론자들은 유신체제는 대통령 박정희의 장기집권과 영도권(領導權) 강화를 위한 정략적 조치에 불과하다고 비난하였다.

유신 이후의 박정희 정권을 신권위주의 혹은 관료적 권위주의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 정권이 구조적으로 이전의 권위주의정치와는 다른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첫째로 박정희를 정점으로 하는 권력집중의 상층구조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은 관·군·민의 기술관료진이었다. 다시 말하면 박정희의 리더십은 잘 훈련된 경제전문가 및 군인을 중심으로 한 기술관료들의 후견하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들은 고도의 경제성장을 위하여 '국력의 조직화'및 '능률의 극대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둘째로 유신체제는 민중을 정치·경제적으로 더욱 배제하는 새로운 권위주의 정치제도였다. 이것은 민주주의적 대의기구가 파쟁과 정략에 희생되어 국력을 크게 소모시키며 낭비적이라는 유신의 논리와, '사회안정'의 명분으로 경제성장과정에서 소외된 계층의 요구와 저항을 무질서와 비능률적 사회혼란이라고 규정한 데서 알 수 있다.

 

셋째로 국가의 강압장치가 비대화하고 그것이 남용되는 일이었다. 제1공화국이나 제2공화국에 비하면 제3·4공화국에서는 계엄령을 비롯한 여러 강압적인 수단들이 조직적으로 강화되고 남용되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긴급명령·국가비상사태선포·위수령·대통령긴급조치 및 비상계엄 등의 강압적인 방법들을 동원하였다. 그리고 마침내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행위를 초헌법적인 방법으로 처단하는 비상수단을 행사하였다.

 

넷째로 국가주도적인 산업화과정에서 국가의 자율성이 더한층 강화되었다는 일이다. 유신체제의 특징은 한마디로 과도한 국가자율성의 일방적인 확보에 있다. 광복 이후에 강화일로에 있었던 국가는 국가주도적 경제성장을 위한 외자의 도입, 특히 외국의 차관을 도입하여 배분하는 과정 등에서 그 물적 기초를 구축할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한 국가의 계획적이며 조직적인 주도적 구실은 국가의 자율성 강화를 가속화하였다. 상대적으로 사회적 자율성은 약화되고, 정치적 자율성은 크게 위축됨으로써 유신체제하에서는 정치부재상태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정치적 정통성을 능률적인 경제업적으로 상쇄하려는 '행정민주주의' 발상과 일맥상통한다.

 

다섯째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정치권력의 개인화와 경직화이다. 1969년의 3선개헌 파동으로 촉진된, 박정희에 대한 정치권력의 집중은 1971년의 대통령선거에서 거센 야당의 도전을 받게 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권력강화를 위한 또 다른 전략적 비상조치를 강구하게 하였다. 그러나 박정희가 추구하던 정치권력의 개인화는 1979년 10월 26일 마침내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다. 유신체제하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후퇴하였고, 합헌적인 체제개혁은 그 기간에 봉쇄되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권위주의정치는 제한된 정치적 다원주의가 그나마 인정되던 그 이전의 권위주의체제와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박정희가 죽지 않았다면 한국민족대백과에서 시월유신을 이렇게 상세하게 설명할 수 없었을 겁니다.

4월 2일 시월유신탑이 있는 옛 진해 시립중앙도서관으로 가 시월유신탑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진해 문화원으로 가니 마침 정 국장님이 계셨기에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주고 받다 중앙일보 기증 표시말이 보이지 않더라고 했더니 정 국장님도 전에 봤는데 요즘 보이지 않는 것 같더라고 하셨기에 우리는 함께  그 표지석과 함께 시월유신탑을 해부해 보기로 했습니다.

 

벚꽃과 수목에 가려 이곳에 시월유신탑이 있다는 걸 아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으며 탑은 보존정도이지 방치되고 있습니다.

 

 

도서관 뜰에 있는 중앙도서관 기증을 알리는 로뎅상인데 누군가 옥수수를 먹고 손에 쥐어 줬습니다.

중앙도서관은 1975년 중앙일보, 동양방송 창립 10주년 기념사업으로 건립한 뒤 진해시에 기증한 것인데 당시 진해는 소도시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정말 작은 도시였는데 중앙일보에서 기증한 '속'사연이 궁금합니다.

 

 

 

기증서는 2년전 장난감 도서관이 운영될 때에도 있었던 사진인데 당시에는 로뎅상 앞쪽에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없더군요.

 

 

군관민과 학생까지 합심하여 받들고 서 있는 전국에서 유일하다시피한 시월유신 기념탑이지만 수목에 가려 시월유신이란 글씨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탑의 뒷면 기단에 보면 아래의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탑은 1972년 시월유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1973년 3 관문교차로에건립하였다가 이곳에 이전하다 1976. 8 진해시장 박용범

 

진해시장은 유신 독재의 상징물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는데 당시 어떤 마음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관문교차로는 옛 육군대학자리로 일부 시민의 이전 요구로 1976년 8월 1일 현재로 옮겨졌는데 학생, 남성 회사원, 여성과 해군 1명이 유신헌법을 떠받들고 있습니다.

 

 

군관민과 학생까지 합심하여 받들고 서 있는 시월유신탑의 책이 유신헌법 책자인지 궁금해하니 정 국장님이 의자를 놓고 탑에 올라 요리조리 살폈지만 그 어떤 글자도 없는데 세월이 흘러 책자는 마치 어떤 도시의 지도같다는 답이었습니다.

한때는 조명이 이 탑을 비추기도 했던 흔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는 그런 탑입니다만 대한민국의 애국지사들이 이런 탑이 진해에 있다는 걸 알면 관광버스를 타고 와 단체로 묵념이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마침 장난감 도서관 사서님이 출근하시기에 정 국장님이 나를 소개하니 전에 한 번 다녀간 것을 기억했으며, 사서님께 어린이나 부모님이 탑에 대해 질문을 하느냐고 여쭈니, 장난감 도서관 개관 3주년이 가까웠지만, 어린이나 부모 누구도 탑에 대해 질문을 하거나 궁금해하지 않더라는 겁니다.

군항제를 찾는 전국의 관광객 또한 이 탑을 궁금해하지 않기는 마찬가질 겁니다.

 

 

시월유신탑을 보는 두 시선입니다.

 

진해문인협회 다음카페(http://cafe.daum.net/jhmunin)에 보면 '자랑거리 진해에는'라는 글이 있는데 몇 가지 더 있지만 아래는 생략했습니다. 

 

1. 리순신 충무공 1호 동상이 있다.

 

두 아들의 어머니 손으로 빚어

통제부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서

출근 퇴근의 작은 질서를 굽어본다.

 

2. 꿈을 키운 해군사관학교가 있다.

 

젊음을 불태우고 태워서 어제의

내일을 약속하고 손가락 걸었던

악문 이빨의 옥포탕을 시리도록 본다.

 

3. 우남 리승만 대통령 별장*이 있다.                         *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265호

 

장개석 총통과 저 바다를 낚시하면서

의형제의 의리를 둥근 의자에 앉히고

미래를 장담하며 컬컬히 소통하였다.

 

4. 하늘의 아들 천자봉 우뚝 솟아있다.

 

병풍으로 둘러친 동쪽 끝자락쯤

불끈 쥔 주먹으로 하늘을 세워

주원장을 키워낸 봉우리가 높다.

 

5. 책을 든 시월 유신탑이 있다.

 

햇빛 찬란하라던 팔거리 가에

민족중흥의 깃발을 펄럭이며

비바람을 맨몸으로 버티고 있다.

 

6. 월하 김달진 문학관이 있다.

 

좁은 공간을 바다처럼 넓힌 자유

맛 들어도 떫은 세상의 땡감의 아침에

시 읊고 쓴 눈물의 배 채우던 날들이다.

 

 

벚꽃피는 마을(이월춘 지음, 한국문학도서관)의 정일근 시인이 말하는 시월유신탑입니다.

 

탑, 그리고 / 정일근

 

왜 저 탑이 아직도 서 있을까

진해 시립도서관 앞을 지날 때마다

군관민과 학생까지 합심하여 받들고 서 있는

시월유신 기념탑을 본다

행정적 착오인지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는지

이미 학생들의 교과서 속에서도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 그 해 시월의 악법이

70년대의 목을 죄던 검고 피묻은 손들이

기념탑으로 서 있는 것을 본다

왜 저 탑이 서 있어야 하는지

탑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숨이 막히고

보이지 않는 역사의 검은 손들이 다시 살아나

내 목덜미를 힘들게 버팅겨온 80년대를

또 다시 낚아챌까 불안하다 불안하여

시립도서관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언제나 급하게 횡단보도를 건너간다

시민들은 그냥 무심히 탑 앞을 지나쳐

운동장으로 혹은 시내로 들어가고

오가는 병범한 시민들은 감히 알 수 없는

얽히고 설킨 큰 저의를 감춘 듯

진해 시립도서관 앞에는

오늘도 시월유신 기념탑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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