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2일 토요일 약간흐림
마산도서관의 길위의 인문학(http://masanlib.or.kr/bbs/board.php?bo_table=b8_01&wr_id=1253) - 이순신 3대해전지(7월 한산도해전지, 8월 명량해전지, 9월 노량해전지) 탐방 7월 한산도 해전지 탐방에 동행했습니다.
마산합포초등학교앞에서 출발하다보니 다른 이들보다 일찍 집에서 나서야 했는데, 오전 7시 10분 얼라아부지와 마산으로 향했습니다.
먼 길이니 밥을 한 술 뜨면 좋을텐데 출근시간이라 길이 막힐 수 있다면서 합포초등학교 근처에서 해결하자고 하더군요.
8시 50분이 집합시간인데 1시간의 여유가 있었기에 마산도서관에 주차 후 합포초등학교 근처를 살폈지만 밥을 먹을만한 곳이 없었기에 준비한 간식은 아껴두고 마트에서 빵과 바나나우유를 구입해 정차중인 전세버스에서 아침식사를 했습니다.
준비해간 보리빵, 콩우유 등은 에너지 소비가 심했기에 중간중간 먹었으며, 버스는 9시 4분에 출발했는데 가면서 졸았는지 고성휴게소에서 깼습니다.
통영의 답사지는 충렬사, 세병관, 한산도의 제승당입니다.
간단한 안내지가 주어졌는데 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충렬사, 세병관, 제승당 안내와 일정이었습니다.
전쟁의 시작, 한산도대첩
한산도대첩은임진왜란 3대 대첩중 하나입니다.
▼ 출처 : 덕수이씨 정정공·풍암공 종회, 충무공파 종회(http://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sub_03/sub_03_03_03.asp)
한산도대첩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의 격군님의 '임진년 조선수군의 3, 4차 출전(한산대첩과 부산포해전)'에서 부분 가져왔으니 복습한다고 생각하고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개요
한산대첩은 일본의 침략전략을 송두리째 무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해전이었다. 이것은 조선과 일본의 정예 수군세력이 맞붙은 건곤일척의 결전이었다.
이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패했더라면 임진왜란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러나 이 해전에서 조선수군은 크게 이겼다. 국운이 걸린 한판의 전투에서 충무공을 정점으로 하는 조선수군이 승리함으로써 조국을 위기에서 구한 것이다. 이어서 한산대첩의 여세를 몰아 일본수군의 근거지 부산포를 공격하여 일본함대를 크게 쳐부수었다. 이 두 해전의 승리로 조선수군은 남해안에서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1592년(임진)에 있었던 제3, 4차의 출전에서 거둔 해전승리는 극히 불리했던 임진왜란의 초기전황을 반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여기서는 한산대첩과 부산포해전에 대하여 충무공의 전술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제3차 출전(한산대첩)
충무공은 1592년 6월 10일 제2차 출전을 마치고 전라좌수영으로 귀환한 이래, 다음 해전을 위해 공문을 돌려 서로 약속을 정하고 전선을 정비하는 등 준비를 갖추면서 경상도 해역의 일본 수군 동태를 탐문하였다.
한편 초기 해전에서의 연패 소식을 접한 일본군 수뇌부는 긴급대책으로 육전에 참가 중이던 수군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에게 남하하여 조선 수군과 대결할 준비를 하도록 조치하였다. 이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6월 23일에 해상 보급로 확보와 조선 수군 제거를 위해 위의 세 장수에게 일전을 펼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때 먼저 전투태세를 갖춘 와키자카는 7월 6일, 구키와 가토가 군선 정비 등 출전 준비를 하는 동안 단독으로 김해를 떠나 출전을 감행하였다. 이때 그가 거느린 세력은 총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으로 지금까지 해전에 참가한 일본 함대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충무공은 ‘가덕․거제 등지에 일본군선 10여 척 내지 30여 척이 출몰한다.’는 첩보와 함께 전라도 금산 지경에도 일본군이 다가와 수륙으로 침범할 조짐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에 충무공의 전라좌수군은 일본 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이억기가 이끄는 전라우수군과 7월 4일 좌수영에서 합류하였다. 전라좌우수영의 지휘부는 5일 작전계획을 논의하고, 6일에 역사적인 제3차 출전을 시작하였다. 이날 전라도함대가 출항하여 남해의 노량에 도착하자 원균이 그간 준비한 전선 7척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수군세력이 합한 연합함대가 결성되었다. 조선함대의 전선은 총 58척이었는데, 이중 거북선 3척도 포함되었다. 양국 수군세력을 비교하면 전투 능력을 갖춘 전선 수는 비슷하였지만, 조선수군이 대선인 전선이 많았고 전체 척수 면에서도 약간 우세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전투력이 없는 협선 50여 척도 참가하였다. 조선함대는 이날 진주 창신도에 이르러 정박하고 밤을 지냈다.
조선함대는 출항 둘째 날인 7월 7일에 동풍이 크게 불어 항해하지 못하다가, 저물 무렵 고성 땅 당포에 이르러 머물렀다. 이때 이 섬의 목동 김천손이 와서 ‘일본군선 70여 척이 오늘 오후 2시쯤 영등포 앞 바다를 지나 고성과 거제도의 경계인 견내량에 머물고 있다’는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이 정보에 따라 조선함대는 7월 8일 아침 일찍 일본함대가 있다는 곳으로 출발하였다. 견내량 근처 바다에 이르렀을 때, 일본의 척후선으로 보이는 대선 1척과 중선 1척이 조선함대를 발견하고는 저들의 본대가 있는 포구 쪽으로 들어갔다. 조선 함대는 이들을 추격하여 일본 함대가 있는 곳까지 도달하였는데, 첩보의 내용대로 대소 73척이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일본함대가 머무르고 있던 견내량은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아 대형 선박이 항해하기 어려운 긴 해협으로 최소 폭이 약 180미터, 최소 수심 2.8미터, 수로 길이는 약 4킬로미터인 곳이다. 그리고 당일 이 해역의 조류는 0.5노트 이하로 해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였다.
충무공은 이곳이 판옥선으로 해전을 치르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뿐 더러, 육지가 가까워 일본수군이 상륙하기 쉬운 점을 고려하여 일본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전선 5〜6척을 투입하여 일본 함대의 선봉과 전투하다가 거짓으로 패해 물러나는 것처럼 꾸미자, 적들은 돛을 펴고 추격에 나섰다. 이때 판옥선 5~6척을 인솔한 장수는 방답첨사였던 동명이순신(李純信)이었다. 일본함대가 추격을 멈추지 않고 한산도 앞의 넓은 바다에 도달하자, 충무공은 휘하 장수들에게 일시에 선회하여 학익진(鶴翼陣)을 형성하면서 일본 함대에 돌진하여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여기서 일부 책자에서는 학익진을 펼치도록 한 사람이 이운룡이라고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당시 학익진을 벌일 수 있는 세력은 전라좌우수군이었다. 경상우수군에 소속된 이운룡이 건의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에 먼저 거북선 3척이 출전하여 지자․현자 등 총통을 발사하면서 일본군 선봉선 2〜3척을 격파하자, 일본수군은 사기가 꺾여 물러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함대가 일시에 포위 공격을 펼치자 일본함대는 도주하지 못하고 참패하였다. 비록 양국 수군의 정예세력이 맞붙었지만 해전은 불과 몇 시간 만에 조선수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당시의 전투상황을 충무공이 다음과 같이 묘사할 정도로 한산도 해전은 통쾌한 승리였다.
제장과 군사들이 승기를 타고 서로 다투어 돌진하며 철환과 화살을 발사하기를 풍뢰와 같이 하여 적선을 불사르고 적병을 사살하는 것을 일시에 모두 다 해버렸다.[「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
한산해전의 결과를 종합하면 조선함대는 일본의 대선 35척, 중선 17척, 소선 7척 등 59척을 격침 또는 나포하였고, 나머지 14척 만이 겨우 탈출해 돌아갔다. 이 해전에서 일본함대를 지휘한 와키자카는 구사일생으로 도주하였다.
한산도 해전에서 크게 승리한 이날은 장병이 피로하고 날도 어두워져 조선함대는 견내량 안 바다에 진을 치고 밤을 보냈다. 다음날인 7월 9일에는 다시 ‘안골포에 일본군선 40여 척이 머물고 있다’는 탐망선의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즉시 삼도 수사가 모여 일본함대를 공격할 것을 계획했으나, 이날은 역풍이 크게 불어 항해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제 땅 온천도(현 칠천도)에서 다시 밤을 보냈다.
조선함대가 7월 10일 새벽에 출발하여 안골포에 도착하니 선창에 일본함대의 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 등 모두 42척이 정박 중이었다. 이곳에 있던 일본 수군장수는 구키(九鬼)와 가토(加藤) 등으로서 도요토미 직속의 정예 수군장이었다.
안골포는 포구의 지세가 좁고 수심이 얕아서 판옥선같이 큰 배가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충무공은 다시 한번 일본함대를 유인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견내량에서 주력함대가 참패한 소식을 들은 일본함대는 높은 곳을 의지한 채 나오지 않고 해전을 회피하였다. 이에 충무공은 전선 몇 척으로 하여금 교대로 포구에 출입하면서 각종 총통을 발사케 하는 동시에 장편전과 화전으로 집중 공격을 가하도록 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조선함대는 정박해 있던 일본군선을 격침시키면서 승선해 있던 장수를 비롯한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다. 이처럼 포구에서 전투가 종일 진행되자 일본 군선은 20척 정도 파괴되었고, 잔존 병력은 육지로 올라갔다. 충무공은 주변 산골에 숨은 우리 백성이 피해를 입을까 우려하여 공격을 중지하고 밤늦게 물러 나와 안골포 근처에서 밤을 보냈다.
조선함대는 다음날인 11일 새벽에 다시 안골포를 포위하였으나, 밤새 일본함대가 도주하여 전날 전투를 벌인 참혹한 흔적만을 확인하였다. 조선수군은 일본수군에게 함대가 오래 주둔할 것처럼 보이게 제반조치를 취한 후 그날 야간에 회항하기 시작하여 12일 오전에 한산도에 도착하였다. 이때 한산도해전에서 패하고 상륙한 일부 일본 패잔병들이 섬 안에 아직 있었지만 경상우수사에게 이들의 처리를 맡기고, 8일간의 제3차 출전을 종료하면서 7월 13일에 본영으로 돌아왔다.(해전상황도 참조:생략)
이상에서 살펴본 제3차 출전의 결과와 의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함대는 이번 출전을 통해 일본수군을 대표하는 함대세력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두 차례 해전에서 조선함대가 거둔 전과는 격침시킨 군선이 79척이고, 적 사살이 9,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반면에 조선의 전선은 1척도 손실 없이 사상자만 전라좌수군의 경우 전사 19명, 부상자 114명이었다. 비슷한 비율로 전라우수군과 경상우수군의 사상자를 추정하여 산정하더라도 전사자는 40명 안팎이 될 것이므로 그 피해는 매우 경미한 편이다. 한마디로 완승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한산도 해전과 안골포 해전의 승리를 총칭하여 한산대첩이라고 부른다. 한산대첩은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큰 해전이다. 특히 한산도 해전의 경우 해전의 작전지역이 다른 해전에 비해 넓었고, 충무공의 수군전술이 가장 유감없이 발휘된 해전이었다. 이를테면 해전장소를 조선함대에 유리하게 유인작전을 편 것, 학익진이라는 적절한 진형을 형성하여 공격한 사실, 그리고 거북선을 중심으로 선봉선을 공격하여 탄착점을 형성시킨 후 압도적인 화력으로 일본전선을 궤멸시킨 점들을 들 수가 있다.
또한 한산대첩은 임진왜란 전체 국면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를테면 한산도 해전과 안골포 해전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수군 장수들이 모두 대패함으로써 도요토미는 일본수군에게 ‘해전금지’의 명령을 내리고 해안에 성을 쌓고 기다리도록 하는 등 전략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 수군은 이 명령에 따라 한산도 해전 참패 이후에는 조선 수군과의 해전을 회피하는 전술로 일관하였다.(출처:임진년 조선수군의 3, 4차 출전(한산대첩과 부산포해전)
통영 충렬사(統營 忠烈祠)
경남 통영시 여황로 251 (명정동) 사적 236(1973.06.11)
임진왜란 7년 조선군의 승리로 끝을 맺었으나 통제영은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거제 오아포와 고성 춘원포 등지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1604년 이경준 제6대 통제사가 이곳 두룡포(거제현 두룡포(頭龍浦, 現 統營市)로 통제영을 옮겨옴으로서 통영의 새로운 역사가 개막되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통영 앞바다에서 한산대첩을 이룩하면서 역사의 전면으로 떠오르게 되며 통영은 이순신의 도시가 됩니다.
통영 충렬사는 임진왜란 중에 수군통제사로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으로 남해 충렬사와 함께 이곳에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데 서원철폐령에도 문을 닫지 않은 군영사당입니다.
선조39년(1606)에 왕의 명령에 따라 제7대 이운용 통제사가 창건 하였으며, 현종4년(1663)에는 남해 충렬사와 함께 임금이 내린 충렬사 사액을 받은 사액사당입니다다. 그 후에는 역대의 수군통제사들이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는데 봄의 탄신제와 춘계제향 제물의 차이는 탄신제는 익힌 제수를 사용 하나 춘계 제향에는 날것을 사용 하는데, 유교 제사예법이라고 합니다.
예기에 "지극히 공경하는 제사는 맛으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기와 냄새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에 피와 생육을 올린다." 라고 하여 혈식제사법이며, 탄신제는 잔치음식이기때문에 잔치상차리듯 음식 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매년 이곳에서는 춘추향사와 이충무공 탄신일, 음력 11월19일 기신제, 한산대첩축제 고유제 등 5차례의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고 합니다.
경내에는 본전, 정문, 중문, 외삼문, 동서재, 경충재, 숭무당, 강한루, 유물전시관이 있습니다.
경내에는 많은 비석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숙종7년(1681)에 60대 민섬통제사가 세운 통제사충무이공충렬묘비이며 충무공 후손통제사 비각 2동에 6기가 있고, 이운용 통제사 비각, 김중기 통제사 비각, 유형 통제사 비각이 있으며, 명나라 신종황제가 내린 8가지의 선물인 명조팔사품(보물440호)과 정조가 충무공전서를 발간하고 1질을 통영충렬사에 내리면서 직접 지어 내린 제문 등이 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충렬사 강한루로 향하다보면 아름 동백나무가 있습니다.
이 동백나무는 시도기념물 74호로 동백나무는 높이가 6.3m, 둘레가 1m이며, 나이는 약 300년으로 충렬사가 건립된 지 약 80년 후에 심은 것으로 추측되며, 매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꽃이 피는데, 예로부터 꽃이 유난히 붉고 탐스러워 풍어제를 지낼 때 동네 처녀들이 물동이에 동백꽃잎을 띄워 바쳤다고 하여, 통영시는 시목을 동백나무로, 시화를 동백꽃으로 하고 있어 동백은 통영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꽃과 나무라 할 수 있습니다.
충렬사에서 옷과 마음을 다시 여미고 참배를 했습니다.
사당 좌우에 은행나무가 있는데 두 나무는 수나무라고 합니다. 암나무는 열매를 맺기에 암나무가 없다고 합니다.
경건해야 하는 사당에 냄새가 풍긴다면 고약하겠지요.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 때 향기가 천리만리를 간다는 금목서가 사당 양쪽에서 꽃을 피우기에 향기에 끌려 충렬사를 찾는 이도 있다고 하니 은행잎이 물들때충렬사를 다시 방문해야 겠습니다.
명조팔사품(보물440호)으로 유명한 충렬사 전시관입니다.
정조가 충무공전서를 발간하고 1질을 통영충렬사에 내리면서 직접 지어 내린 제문 등이 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 정조가 내린 사제문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신종 황제가 충무공의 공훈을 기려 보낸 도독인과 영패, 귀도, 참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 등 '명조팔사품(明朝八賜品·보물 제440호)'이 소장돼 있는데 명조팔사품인데 팔사품을 받은 경로에 대해서 현재로서는 미궁입니다. 진품은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들 눈에는 전시품도 진품같지 않습니까?
▲ 도독인(都督印)
충렬묘비(시도유형문화재 113)는 외삼문 동쪽 첫째 비각에 모셔져 있으며, 아래 탁본은 우리가 참배한 전 날 전시했다고 합니다.
충렬묘비는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의 충절과 업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세운 비로, 현재 경상남도 통영의 충렬사 내 비각에 놓여 있습니다.
비는 각 면이 평평하게 손질된 길쭉하고 네모진 형태로 비문은 광해군 6년(1614) 좌의정 이항복이 지었던 여수 ‘이충무공대첩비’의 비문을 그대로 옮겨 온 것이라고 합니다. 내용 중 ‘통제사충무이공충렬묘비명’이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충렬사의 이충무공 신당에 세워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하며, 조선 숙종 7년(1681) 제60대 수군통제사 민섬이 비를 세웠고, 현종 때 좌의정을 지낸 우암 송시열 선생이 글씨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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