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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웅장해진 통영 세병관 / 전쟁의 시작, 한산도대첩지 가다

by 실비단안개 2014.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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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일 토요일 약간흐림

 

전쟁의 시작, 한산도대첩 2 - 통영 세병관(統營 洗兵館) / 길 위의 인문학(마산도서관)

 

먼 거리가 아니지만 시간을 아껴야 하기에 충렬사에서 세병관까지 차량으로 이동했습니다.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줄인 말이 통영(統營)으로 선조37년(1604) 통제사 이경준이 두룡포(지금의 통영시)로 통제영을 옮기면서 통영의 명칭이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8년에 걸친 복원 작업을 거쳐 지난 3월 선보인 세병관으로 갑니다.

세병관 맞은편 도로에서 보면 예전에 없었던 주차장이 있으며, 통영벅수와 하마비가 이어 있는데, 하마비가 있는 자리니 주차장이 있어야 하는 자리가 옳은 듯 하지만 세병관을 찾아 만나는 첫풍경으로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 (동그라미)통영 벅수와 하마비

 

세병관을 들기전에 돌아보면 주차장은 보이지 않는데 잔디가 있는 아래가 주차장인데 이렇게 보니 또 괜찮은 듯 합니다.

 

 

세병관으로 오르면서 만난 통영 문화동벅수입니다.

2008년 푸른통영21 김형진 선생님과 함께 문화기행에서 초정거리 - 청마거리 - 중앙동우체국 - 문화동 벅수 - 통영향토역사관 - 세병관 - 간창골새미 - 서문고개 - 박경리 생가 - 공덕귀(윤보선 전대통령의 부인) 살았던 곳 - 함안 조씨 정문 - 통영충렬사 - 정당샘 - 전기불터 -이중섭 살았던 곳을 걸었는데 당시 통영벅수를 만났었는데, 세병관을 지척에 두고 있는 벅수에게 "그 벅수가 이 벅수네" 했습니다.

 

 

2008년에 벅수 가까이서 찍은 풍경입니다.

벅수만 찍은 걸로 봐서 주변이 아마 산만했던 모양입니다.

담장이 있는 곳을 터 주차장이 들어 섰지만 그 벅수가 이 벅수가 맞으며, 세병관으로 오르다보면 벅수옆에 나전장 기능보유자 김봉룡 살았던 곳이라는 안내가 있으며, 하마비가 있습니다.

 

돌탑, 장승, 솟대는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서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며, 장승의 기원은 고대의 남근숭배설(男根崇拜說)과 사찰의 토지경계 표지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장승은 크게 분류하면 마을 수호신으로서의 장승과 이정표의 장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장승이라면 의례 남녀 한 쌍으로 두개가 서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으나 하나만의 경우도 간혹 있는데, 이것을 ‘독벅수’라고 합니다.

 

'벅수'는 장승에 대한 또다른 명칭으로 거리를 표시하는 푯말로 위쪽에 사람의 얼굴을 새겨 오리나 십리마다 세웠는데, 우리가 생각없이 멍한 모습으로 있을 때, '벅수같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벅수는 통영 문화동의 벅수로, 멍한 표정이 아닌 익살스러운 표정의 벅수입니다.

통영 벅수는 통영시 문화동 세병관 바로 밑에 있는데, 이 벅수는 현재 존재하는 전국의 벅수 중에서도 특이한 벅수로서 마을의 전염병과 액운을 막기 위해 만든 비보 벅수라 합니다.

이에는 풍수지리설이 결부되어 있는데, 문화동 일대가 통영에서 좋은 명당자리지만 동남방이 허하다고 하여 광무 10년(1906)에 이자리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벙거지를 쓴 벅수의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패여있고, 둥근 눈은 튀어나왔으며, 코는 삼각형으로 뭉툭하고 턱 밑에는 굵은 선으로 세 가닥의 수염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활짝 웃고 있는 입에는 송곳니가 길게 삐져나와 있는데, 험상궂은 모습이기 보다는 익살스럽기까지 합니다.

앞면 몸체에는 '토지대장군(土地大將軍)'이라 새겨져 있는 유례가 드문 독장승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중요민속자료 제7호(1968년 11월 23일 지정)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하마비(下馬碑)가 있는 곳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으며 하마비는 길을 보고 있어야 한다고 세병관으로 오르는 길이 아닌 도로를 보고 있습니다.

 

 

세병관으로 가는 첫 문 망일루 오른편, 왜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의식을 치렀던 수항루 앞쪽에 세병관 복원전, 복원발굴, 복원후의 사진이 있는데 세병관의 예전 모습과 비교할 수 있으며, 운주당에는 통영의 고지도 등이 있었는데 역시 통영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병관으로 드는 지과문입니다.

예전에는 밋밋한 비탈에 잔디가 있었는데 안내표지판과 함께 새단장을 했습니다.

止戈는 창을 거둔다는 뜻으로 전쟁이 그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래는 지난해 1월 복원공사때 풍경입니다.

 

 

드디어 세병관에 도착했습니다.

은하수로 병기를 씻는다는 세병관은 국보 305호(보물 제293호에서 국보 305호로 승격 지정. 2002.10.14)로 지정되어 있으며, 경상, 전라, 충청 삼도수군을 총 지휘했던 본부의 객사건물로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두보의 시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두보의 시 '세병마' 마지막 대목에는 "어떻게 하면 힘센 장사를 얻어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다가 병기를 씻어내어 길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하는 문구가 있는데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풀이됩니다.

 

처마 밑의 '세병관' 건물에 걸맞는 웅장한 편액글씨는 제136대 통제사인 서유대가 쓴 글씨로 글자 하나의 크기가 사람 몸통만한 거대 편액입니다.

세병관은 이경준(李慶濬) 제6대 통제사가 두릉포(한산도)에서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긴 이듬해인 조선 선조 37년(1604)에 완공한 통제영의 중심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창건 후 약 290년 동안 3도(경상·전라·충청도) 수군을 총 지휘했던 곳으로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앞면 9칸·옆면 5칸 규모의 웅장한 건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습니다. 세병관은 목조단층 건물로 경복궁 경회루(국보 제224호), 여수 진남관(국보 제304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에 속합니다.

 

 

흐린 날씨였지만 일행은 세병관 마루에서 해설사의 세병관과 주변 설명을 들었으며, 마당 또한 건물만큼 넓은데 마당 담장 안쪽에는 커다란 깃발을 꽂아두던 기삽석통旗揷石桶이 있는데 서쪽 1기는 남아있던 기삽석통이며 동쪽은 복원한 기삽석통입니다.

 

 

▲ 기삽석통旗揷石桶에 꽂힌 수자기帥字旗

 

아래는 액막이로 만든 석인으로 추측되며 세병관앞 장대석 석축 해체과정에서 발굴된 석인 5기입니다.

 

 

세병관에서 운주당으로 가는 오른편에 있는 통제사비군(統制使碑群)은 일종의 송덕비로 역대 통제사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인데 시내 일원에 흩어져 있던 것을 현위치에 모셨습니다.

 

 

다시 세병관입니다.

마루에서 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저는 사진을 찍기 위해 이리저리 다녀야 했는데, 이 큰 건물에 현판이 분명 있을텐데 어디있지하며 건물을 한바퀴 돌았는데 요란하지 않게 문위쪽에 있었는데 42개라고 합니다.

통영과 통제영을 학습하는 이도 있고 통영 앞바다와 시내를 조망하며 즐기는 이들이 있는데 모두는 가슴에 이순신을 품고 있었을 겁니다.

 

 

마루에서는 고개를 들어야 보이며, 세병관 뒷담장에서 건물을 보면 현판이 잘 보이는데 담장과 건물이 마치 그림을 그려놓은 듯 잘 어울립니다.

 

 

세병관 왼쪽으로 돌아가면 삼도수군통제영 12공방이 있습니다.

12공방은 열두 가지 공방이 아니라 많은 것을 뜻하는데  활·화살, 창 같은 무기, 나전이나 대나무발 같은 생활용품 등인데 통제영 군인들이 쓰기도 했지만 임금한테 공납도 했다고 합니다.

 

 

 

▲ (↓차례로)각종 지도 및 군사적목적의 장식화를 그렸던 화원방과 상자방은 버들가지 등을 엮어 상자를 만들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염장(대발)공방으로 사용하며, 총방입자방은 말을 엮어 망건, 탕건, 유건 등을 만들던 총방과 흑립이나 벙거지, 삿갓, 패랭이 등을 만들던 입자방을 합한 곳입니다.

 

아래는 각종 철물을 주조하던 야장방에서 만든 병기들입니다.

4월~10월까지 매주 토·일요일 운영하며 체험도 가능합니다.

 

 

세병관 뒷담장을 따라 운주당으로 갑니다.

세병관 동쪽에 있으며, 원래 운주당은 한산도 제승당 자리였으며, 통제영 정비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경남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를 거쳐 2003년에 복원되었습니다.

운주당은 통제사가 업무를 본 곳으로 운주당, 경무당, 병고, 내아 등의 건물이 있습니다.

 

 

▲ 운주당

 

문이 열려있는 충렬사 등 사당과는 달리 운주당의 주련은 기둥에 있는데 운주당 설명과 주련 풀이입니다.

 

 

앞의 충렬사 전시관에서 본 명조팔사품(明朝八賜品·보물 제440호)이 보입니다.

 

 

운주당 오른편에 있는 경무당은 출입이 가능한데, 영상이 있는데 통영과 한산대첩에 대해 알 수 있으며, 통영의 고지도와 통제영 전경도와 복식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시간에 쫒겨 마음껏 즐기지 못 했는데 혼자가 아닐때는 늘 이렇습니다.

 

 

무기기가 있는 병고입니다.

창, 총통 등이 있으며, 경무당을 나서면 통제사가 거처한 내아가 있습니다.

 

 

 

12공방과 운주당에서 만난 옥의 티입니다.

건물 아궁이마다 불을 지핀 흔적이 있었는데 마치 쓰레기도 태우라는 듯 관람객이 쓰레기를 버렸더군요.

쓰레기 종량제 실시후 도로나 시설물 등에 쓰레기통이 대부분 사라졌기에 우리는 비닐봉지를 가지고 다니며 처리를 하곤 하는데, 외출때마다 비닐봉지를 챙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보니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데, 한산도 제승당 가는 길에는 화로모양의 쓰레기통이 있었기에 섬을 어지럽히지 않아 참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12공방과 운주당에서 본 문고리입니다.

케이블타이가 자물통역할을 하는데 8년이란 긴 복원기간을 거쳐 선보이는 통제영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기에 안타까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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