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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읍성에 CCTV 달아야 겠다

by 실비단안개 2014.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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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8일 흐리다 비, 억수비, 다시 흐리다 비 반복

 

임진왜란 진해 3대해전지비를 찾아 나선 길, 합포해전지로 가기전에 있는 웅천읍성으로 갔습니다.

날씨가 궂다보니 읍성 견룡루(동문)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웅천읍성(熊川邑城)
웅천읍성은 경남기념물 제15호로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 남문동, 서중동 일대입니다.
1434년에 세종대왕의 명으로 축성된 진해구 성내동 일대 웅천읍성의 성곽 401m, 해자(성 주위에 판 도랑) 408m, 동문루 1채 등이 복원되어 있으며, 복원공사는 계속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웅천읍성(熊川 邑城)은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주민들을 보호 하기위하여 세종 16년(1434년)에 처음으로 축성하였으며, 세종 21년(1439)년에  축조했는데 일본사신은 제포왜관에서 나와 웅천읍성의 현감에게 보고하고 창원을 거쳐 한양으로 이동했습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세종 16년에 김해읍성과 웅천읍성을 다 같이 수축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세종 17년에는 웅천읍성이 완공되지 않아 결국 그 포진의 수군(水軍)을 동원하여 완공하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 성안에는 웅천초등학교, 웅천고등학교, 웅천 우체국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인근에는 웅천 빙고지, 주자정동강당 등이 있으며, 웅천왜성과 웅천읍성과의 거리는 직선거리로는 대략 2km 내외입니다.

 

견룡루 좌우에 석환(石丸)이 있습니다.

석환은 재질과 형태 가공도 및 용도에 따라 뇌석, 비석, 석탄, 난석, 단석, 린석, 수마석의 용어로 다양하게 불리우고 있는데, 성곽주변의 하천이나 해안가에 산재한 돌을 구해 성위에 마련해 두었다가 접근하는 적을 내려다보고 던져서 제압하는 무기의 일종입니다.

이외에 석포나 대포의 포탄으로도 사용되고 있음을 문헌상으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석환은 원형, 타원형, 부정원형으로 어른 주먹만한 것에서 부터 성인남자 머리만한것 까지 있습니다. 

조선시대 당시에는 이런 돌을 전문적으로 던지는 부대가 있었으며, 삼포왜란 당시 왜인들이 웅천읍성을 점령하고 있자 김해에 있는 투석부대를 데리고 와서 웅천읍성에서 전투를 치루었다고 합니다. 당시 투석꾼이 던진 돌에 왜인의 방패가 부서지기도 했다고 할 정도로 돌의 위력은 강했습니다.

 

웅천읍성은 경남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는 우리가 아껴야 하는 우리 고장의 소중한 문화재며 자산입니다.

그런데 2년전과 달리 석환 수가 줄어 들었음이 한 눈에 보입니다.

 

▲ 2014년 7월 8일

 

▲ 2012년 9월 1일

 

2012년 석환무더기는 온데간데없고 2014년 7월 8일, 석환은 달랑 한 개 남아 있습니다.

 

▲ 2014년 7월 8일

 

▲ 2012년 9월 1일

 

반대쪽(웅천초등학교)은 석환이 아예 없습니다.

 

▲ 2014년 7월 8일

 

▲ 2012년 9월 1일(석환과 치성)

 

7월 18일 흐렸다 해가 났다 돌풍에 비

 

▲ 2014년 7월 18일

 

날이 개이기에 웅천읍성으로 가니 견륭루에 마을 주민들이 있었기에 석환이 왜 없어졌을까요 하니, "웅천읍성 복원 자체가 엉터리다, 성벽은 3단이었으며 2단에 돌이 많았었다, 그 돌은 유사시에 언제나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성벽돌도 당시의 자연석을 누군가 대부분 가져가고 지금 공사를 한 돌은 모두 썩은 돌이다... "

그러면서 마을 주민들이 가져가지 않았겠느냐고 하더군요.

석환도 문화재 일부인데 석환을 가져가면 문화재법 위반이 되지 않을까요 하니, 아마 그렇겠지 하였습니다.

웅천읍성에도 CCTV 달아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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