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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제승당과 한산정, 수루/전쟁의 시작, 한산도대첩 6

by 실비단안개 2014.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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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일 토요일 약간흐림

전쟁의 시작, 한산도대첩 6 - 한산도 제승당과 한산정, 수루 / 길 위의 인문학(마산도서관)

 

마산도서관의 [길 위의 인문학] '전쟁의 시작, 한산도대첩' 마지막편입니다.

제승당항에서 내린 일행은 바쁘게 혹은 느릿느릿 걸었습니다.

 

전날 부모님께 그랬습니다.

통영과 한산도 갑니더.

한산도는 통영시 한산면인데 왜 통영과 한산도를 마치 다른 두 곳을 가는것 처럼 이야기 했을 까 싶데요.

 

행정구역상으로 한산면 지역은 원래 거제에 속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거제군 3현 가운데 하나인 명진현에 관할되었으며, 그 후 조선초기까지는 거제현 남면, 그리고 후기에는 거제현 둔덕면 7방에 속했으며, 그 후 한말 광무 4년(1900) 고성군에서 분리 독립된 통영군 한산면, 그리고 통영시 한산면이 되었습니다.

 

한산면은 본도와 주변에 산재한 도서들로 이루어진 지역으로 총 65개의 유.무인도를 포함하고, 한산대첩지로서 이름 높은 국난극복의 역사적인 고장이며,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한려해상국립공원이 시작되는 지역입니다.

 
한산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역사적 기록은 없으나, 약 450여년전부터로 추정되며 한산면은 한산도(閑山島)의 지명을 따서 붙여진 행정구역의 면(面)이름인데, 한산도란 지명 유래는 한(閑)자를 막을 한(閑)으로 해석하여 임진왜란때 이충무공이 이곳에서 왜적을 막았다는데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한가할 한(閑)의 뜻으로 해석되어 통영 앞바다에 한가로이 떠 있는 섬이라 하여 한산이라는 설, 그리고 육지로부터 한산도로 들어오는 관문인 한산면 여차, 관암, 문어포마을과 제승당의 지형이 한자의 한(閑)자, 산(山)자와 비슷하여 한산도라 불리었다는 구전이 있다고 합니다.

유명한 비진도 해수욕장, 소매물도와 등대섬 등이 한산면에 속하며 제승당은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에 있습니다.

 

통영항에서 제승당항으로 가는 길에 강사님이 마을 이름뜻을 설명해 주었는데 마을마다 재밌는 이야기가 숨어 있으니, 한산도를 잘 아는 이와 동행을 한다면 도움이 될 겁니다.

위 스카이뷰를 보면 제승당항이 있는 자리에 '덮을개'라고 쓰여 있는데, '덮을개'는 '개포(더풀개)'로 임진왜란 때 한산 앞바다에서 이순신장군의 학익진 전법에 결딴났 던 왜군의 패잔병들이 우왕좌왕 도망갈 길을 찾자 우리 수군들이 한산만으로 유인, 일부는 두억개에서, 일부는 이 개안에서 모조리 도륙하였는데 왜적들이 온 개안을 덮었다하여 덮을개라 했고, 100년 전 쯤 인가가 들어서서 살아온 뜸(한동네 에서 따로 한데 모여 있는 구역)이 있었으나 근년에 와서 제승당 성역화사업으로 이주 시켰다고 합니다.

제승당항 근처에는 매표소를 겸한 작은 점방만이 있었으며, 섬내버스가 운항되고 있었습니다.

 

제승당항에 내렸으니 한산도를 밟았습니다.

한산도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가(閑山島歌)'입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笳)는 남의 애를 끊나니

장군이 홀로 앉았던 그 수루에 오르면 나도 시조 한 수 나올까….

 

제승당은 제승당항에서 내려 해안을 따라 한참 걸어야 하며, 제승당으로 가는길에" 여기가 성지다"를 잊고 풍경에 빠졌습니다.

해안가 안쪽으로 적송이 장관이었으며, 지고 있는 해당화이긴 했지만 이 꽃이 해당화구나하며 알 정도로 꽃잎 몇을 남기고 열매가 익고 있었으며 깊지않은 해안이었기에 몰(잘피)을 만날 수도 있었는데 어린날 이맘때 몰은 우리에게 좋은 간식이었습니다.

하루에 수영(바다에 들어간 횟수) 몇 번씩 했던 시절 뭍으로 오를 땐 몰은 대부분의 친구들 손에 쥐어져 있었습니다. 

모형이긴 하지만 거북선을 가장 많이 만난 제승당행이었습니다.

 

 

 

한산만에서 한산대첩비의 거북을 멀리서 봤으며, 거북등대를 가까이서 만났고, 한산도에서 만난 거북음수대입니다.

 

 

약간의 구름으로 걷기에 무리가 없었으며, 일행은 적송이 우거진 제승당으로 가는 길에 이미 반해버렸습니다.

 

 

충무사와 제승당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의 입구에 있는 대첩문앞의 수호사 유리벽안의 거북선 모형입니다.

수호사는 제승당을 지키고 보호하는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제승당의 관리책임을 맡고 있던 당장이 거처하던 집이었으나 현위치로 옮겨 신축하였으며, 수호사뒤로 화장실이 있는데 화장실입구의 치자향기는 이미 맑아진 마음과 머리를 더 시원하게 해 주었습니다.

 

 

우물입니다.

요즘은 집집마다 수도시설이 되어 있지만 우리 어릴 때가지만 해도 우물은 동네공동우물을 썼으며 우물이 집에 있는 집은 부잣집즘으로 여겼을 정도입니다. 

이 우물은 지금도 맑은 물이 가득한데 1593년 이순신 장군이 운주당(현 제승당)에 1340 일 동안 머물면서 군사들과 함께 사용했던 우물로서 바다와 가깝지만 짠맛이 전혀 없는 것이 특색이라고 합니다.

 

 

 

제승당으로 가는 첫 문인 대첩문인데 많은 이들이 대첩문을 배경으로 문을 지키는 군사들과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우리도 아이들이 동행했더라면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대첩문을 들어서 약 5분 정도 걸으면 충무문이 있는데 이제 진짜 제승당이 있습니다.

 

 

제승당이며, 오른편의 가림막은 수루인데 개축중입니다.

수학여행을 다녀온지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기에 당시 기억이 전혀없습니다만 무조건 반가웠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시 한 번 여미고 일동 참배를 했습니다.  

제승당 制勝堂

소 재 지 :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875
지정일자 : 1959. 8. 19
지정번호 : 사적 제113호

 

1593년 8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 통제사를 제수받아 한산도에  통제영 본영을 설치했을 때 지금의 제승당 자리에 막료 장수들과 작전회의를 하는 운주당(運籌堂)을 세웠습니다.

 

운주당이란 이순신이 가는 곳마다 기거하던 곳을 편의상 부르고 있는 곳인데, 1740년(영조 16)에 통제사 조경(趙儆)이 이 옛터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제승당이라 이름한데서 비롯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30년대에 중수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입니다.
경내에는 유허비, 기념비, 귀선각(龜仙閣), 한산정(閑山停), 영정을 모신 충무사(忠武祠)가 있으며, 1976년 이순신유적지 성역화작업으로 정비되었습니다. 

 

제승당내에  制勝堂 편액에 있는데, 걸려있는 편액은 제 107대 통제사 조경이 쓴 글씨며, 사당안의 편액은 1786년 제140대 통제사 김영수공이 써서 걸었는데, 1976년 10월 정화사업 당시 부주의로 편액이 8조각으로 파손되어 흩어져서 보관하던 것을 충렬사 이정규이사장께서 충렬사로 옮겨 보관하던 중 1985년 10월 이흥렬 전 문공부장관께 건의하여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글씨에 세로줄이 보입니다. 

 

 

제승당내에 익은 글씨가 있습니다.

통영 충렬사에서 본 주련인데, 욕일보천(浴日補天)은 노량해전 때 우리 수군과 연합함대를 구성했던 명(明)나라 도독 진린(陣璘)이 이충무공의 훈공을 일러『 해를 깨끗이 씻고 구멍난 하늘을 때운 공(浴日補天之功)』이라고 극찬을 했던 말에서 따왔으며,『맹산서해(盟山誓海)』는 이충무공의 정성으로『산에 맹세하니 풀과 나무가 알고, 바다에 맹세하니 고기와 용이 감동하더라(警海魚龍動 盟山草木知)』 에서 따온 글귀라고 합니다.

 

한산대첩도가 있으며, 수루가 개축공사중이기에 수루 편액을 제승당에 둔 듯 하며, 옆의 한산도가도 그러한 듯 합니다.

 

 

개축공사중인 수루이기에 시조 한 수를 읊지 못 했으며, 수루에 올라 한산만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그마져도 이루지 못 했기에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한산정입니다.

한산정은 이순신장군이 활을 쏘던 곳이며 사정과 표적과의 거리는 145m입니다. 그 당시에는 조정에서만 과거를 보아 왔으나 충무공이 장계를 올려 처음으로 이곳에서 무과시험을 치른 곳으로 100여명이 급제한 곳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최대한 현장감을 느끼기 위해 한산정 울위에 카메라를 올려 찍었는데 145m가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홍살문을 들어 유허비와 충무사에서 참배를 했습니다.

홍살문주변을 보니 더욱 느껴지는데, 제승당항에서부터 걸어보면 알겠지만 관리가 정말 잘 되고 있었기에 글을 쓰는 중이지만 수고하시는 분들에게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유허비입니다.

1597년 (선조 30년)에 폐진된 제승당을 1739년(영조 15년) 제107대 통제사 조경이 다시 세우면서 충무공을 사모하고, 여기가 제승당터라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이 비를 세웠으며, 우측의 비는 138년 후 충무공후손인 제198대 통제사 이규석이 다시 세운 비입니다.

 

 

유허비 맞은편에 한글비가 있는데, 1948년에 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경상남도 내 초.중등학교의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비석으로, "리충무공계시던제승당의터다"고 쓰여 있는데, 글은 정인보 선생이 짓고 글씨는 이충현 선생 글씨인데 어디서 비슷한 걸 본 듯 하지요.

 

 

남해 충렬사 청해루 앞에 남해군민과 경남도내 초등학생의 성금으로 건립되었으며, 정인보가 글을 짓고 김충현이 쓴 충무공 한글비가 있습니다.

'노량바다는 리충무공 전사하신데라 여긔에 충렬사를 세우노라'

 

예나 지금이나 애국자는 어린이와 국민입니다.

 

▲ 남해 충렬사 청해루의 한글비

 

충무사입니다.

이 사당은 성웅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신 곳이며, 원래 조그마한 사당이던 것을 헐고 1976년 10월 본 사당을 건립하였고, 매년 2회 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

충무사(영당)에 모신 영정은 1978년 정형모 화백 작품이라고 합니다.

 

 

우리 일행을 안내하고 설명을 해 준 이봉수 님이 이충무공 영정을 가르키면서 웬만한 산신에게 기도하는 것보다 효험이 있으니 생각이 있는 이는 향을 피우고 기도를 해도 좋다고 했기에 여러분이 향을 피우고 각자의 소원을 빌었습니다.

(참고 : 제승당관리사무소 http://jeseungdang.gsnd.net/jsp/sub02/02_02.jsp

           한산면사무소 http://www.tongyeong.go.kr/program/publicsil/?Kwa01Code=d_hansanmyeon)

 

 

제승당 참배를 마치고 통영항으로 떠날 시간이 남았기에 우리는 아주 천천히 걸어 제승당항으로 왔으며, 잠시 반대쪽 길을 걸었지만 막막하여 매표소 평상에서 쉬었습니다.

일행이 보이지 않았지만 통영항으로 돌아 가는 배 시간까지는 나타나겠지하며,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남은 간식을 먹었습니다.

 

통영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카메라를 꺼냈습니다.

배를 타본이라면 알텐데 마치 놀림감이 되는 듯한 갈매기와 갈매기에게 과자를 주는 이들의 모습이 싫지만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루였지만 완전 꽉찬 하루였기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또 졸았습니다.

마산도서관에 감사함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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