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진해 롯데시네마에서 영화 '명량'을 관람했습니다.
우리는 2회 조조로 예매했으며, 우리 식구 4명이 처음으로 영화관에 함께 갔습니다.
방학이며 휴가철이다보니 가족단위가 대부분이었고, 초등생 이상의 어린이와 유치원생들도 상당수였는데 조조임에도 6관이 꽉 찼기에 우리나라 미래의 희망을 볼 수 있었는데 어린이를 동행한 부모님들 감사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정치인이 꼭 봤으면 하는 영화며, 현재 우리에게는 왜 이순신 같은 리더가 없는지 슬픕니다.
명량에서 이순신은 아들 회에게 그러지요.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는 법이지."
나라와 임금은 국민, 백성을 버리지만, 장군과 국민은 나라를 버리지 않았으며, 회오리같은 날들이지만 우리 국민은 여전히 우리나라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영화 '명량'이 개봉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http://cafe.daum.net/jjmkssm1545-1598'에서는 영화 '명량' 이야기가 올랐으며, 오래전의 역사스페셜, 역사저널 그날, EBS한국기행 이순신의 바다(http://home.ebs.co.kr/ktravel/main) 등이 재조명되고 있으며, 명량 관람전 참고가 될만한 언론 기사와 강사 설민석의 '명량해전 1,2부'까지 카페에 올라왔습니다.
'명량'이 개봉되자 관람기가 짧게 올라오고 있으니 과연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개봉날 관람한 사후선님은 "어제 오전 시간을 내어 명량 첫 관람을 하고 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은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앞으로도 사료에 기초해서 장군님에 대한 더 많은 해석과 그 결과물들이 차곡차곡 쌓이길 기원합니다."라고 남겼으며, 역시 개봉날 관람한 행주산성님은 "심야영화로 '명량' 보고 왔습니다. 그냥 잠들 수 없을 듯 하여... 11시 영화관 맨끝자리에 겨우 자리잡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남겼으며, 하동지부는 피서를 핑계로 지부회원 모두가 관람예정이라고 할 정도로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이 기대하며 기다린 영화입니다.
위의 웅천현감님(이민웅)은 역사학자로' kbs역사저널 그날'에 출연하여 기울어진 부분을 바로 잡아주신 분인데, "영화는 영화일 뿐, 그렇지만 명량은 대체로 수작이네요. 한 번씩 보시지요. 강추!!!
역사적 사실 30%(너무 과했나요?), 작가적 상상력과 재미 70%...
나름대로 명량해전 승인 가운데 철쇄를 다루지 않았다는 것도 의미 있고, 당시 수군들이 일본 수군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상황 해석도 사실과 비슷하고, 해전 당시 주변 백성들이 지원한 사실도 그렇고... 등등
물론 영화는 영화일 뿐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이런 픽션을 만들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재미 있습니다."라고 평을 해 주었습니다.
명량해전의 철쇄는 논란이 많았었는데, "명량해전의 진실을 풀다http://blog.naver.com/2983bn9co/204525642"를 읽어보면 이해가 될 겁니다.
명량해전(鳴梁海戰) 또는 명량대첩(鳴梁大捷)은 1597년(선조 30년)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조선 수군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0여 척을 물리친 해전입니다.
철쇄와 함께 명량해전의 주요 쟁점 세 가지가 더 있는데 명량해전에 거북선이 출전했느냐와 조선 군선이 12척이냐 13척이냐, 왜선이 133척이냐 333척이냐입니다.
명량해전에는 거북선이 나오지 않고 판옥선이 활약을 하는데,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전투를 벌였던 칠천량해전에서 거북선은 모두 수장되었습니다. 그 후에 일어난 명량해전과 노량해전 등의 전투에서는 거북선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칠천량해전시 도망친 배설을 두고, 배설이 12척을 끌고 원균의 진영에서 탈영했기에 이순신장군이 재기할수 있었던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배설은 명량해전에서도 도망치는 상습탈영병입니다.
기적처럼 나라를 구한 명량해전을 상징하는 말, "아직 신에게는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라고 조정에 보고하는데, 이때까지는 전선이 12척이었지만 그 후 김억추의 1척이 더 증가하기에 실제 참전한 배는 영화처럼 12척이 아니라 13척이라는 게 정설이며, 그 군선은 거북선이 아닌 판옥선板屋船으로 통영 강구안 계류 판옥선은 우리나라 유일의 복원 판옥선이며, 조선 군선 판옥선은 임진왜란 승리의 일등공신입니다.
- '명량'의 판옥선, 통영 강구안에 거북선과 /전쟁의 시작, 한산도대첩 4
13척이 133척의 일본 함대를 맞아 극적으로 승리한 세계 해전사에 전무 후무한 명량대첩입니다. 정유재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이 필사즉생 필생즉사(죽기로 싸우면 반드시 살고, 살려고 비겁하면 반드시 죽는다)의 각오로 왜구를 소탕한 최고의 해전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최민식)과 왜장 모두 목숨을 건 명량해전의 일본 수군 지휘부는 총대장에 옥포해전에서 패한 도도 다카도라(김명곤), 선봉장은 당포해전에서 죽은 구루지마 미치유키의 동생 구루지마 미치후사(류승룡)며, 그 뒤를 한산도해전에서 크게 패한 와키자카 야스하루(조진웅)와 안골포에서 패한 가토 요시이키(김강일)가 따르고 있었으니 이순신에게 한 번 이상 패한 일본 수군의 장수들이 총출동한 명량해전은 복수전인 셈이었지만 결과는 조선 수군의 승입니다.
(조선 수군 피해 정도 : 사료에 따라 없음이 있으며, 전선 피해 없음, 전사 30명미만. 왜측 피해 정도 : 구루시마 미치후사 전사, 31척 격침, 3000명이상 전사)
- 임진왜란 해전목록 : http://ko.wikipedia.org/wiki/%EC%9E%84%EC%A7%84%EC%99%9C%EB%9E%80_%ED%95%B4%EC%A0%84_%EB%AA%A9%EB%A1%9D
9월 16일 역사적인 명량해전이 시작되었으며, 이날 이른 아침에 별망군(別望軍)으로부터 "셀 수 없이 많은 일본군선이 명량 해협을 통과해 우리 진영으로 바로 오고 있다"는 보고가 전해지면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공격해 온 일본군선의 척수는 사료들 마다 다른데, 난중일기 초서본(선조실록)에는 133척, 난중일기 전서본에는 333척, 제조번방지·연려실기술에는 5~6백 척으로 이야기합니다. 일본 사료에도 나오는 것처럼 명량의 좁은 길목을 통과하기 위해서 중형선인 세키부네를 먼저 투입시키는데 이것이 133척인 것이고, 그 뒤를 받치고 있는 대형선 아다케 까지 포함시키면 333척, 시마즈 요시히로의 수송선 까지 합치면 5~6백 척으로 계산할 수 있기에 최소 133척 이상의 대규모 함대였습니다. 일본군선 130여 척이 통과한 명량해협은 진도와 해남군의 화원반도사이에 있는 수로로써 길이가 약 2㎞ 내외이고 가장 좁은 곳의 폭은 300m 정도입니다. 조류는 하루 네 차례 6시간 간격으로 북서류와 남동류가 교차해서 흘렀고, 이곳의 평균 수심은 20〜25미터정도이고, 조류의 속도는 남동류의 경우 최대 11.5노트로 매우 빠릅니다. 아울러 수십 리 밖에서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물이 울면서 돌아간다고 해서 '울돌목'이라고 하는데 울돌목 설명은 영화에서 김노인이 장군께 설명을 해줍니다. - 명량대첩 현장 해남·진도 답사/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
영화 '명량'의 도입부에는 이순신이 누명으로 파직 되었고, 이후 조선수군통제사로 다시 임용되는 과정이 간결하게 설명되는데, 몇몇 해전을 통해 왜 수군을 공격하며 공을 세웠으나 조정 대신들의 모함과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해 조정의 출정 명령을 따르지 않아 한양으로 압송돼 모진 고문을 받고 파면됐습니다. 이순신에 이어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왜 수군에 대패하자 조정은 다시 이순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합니다.
전반이 다소 지루한 감이 있지만 이순신의 인간적인 고뇌를 읽을 수 있으며 큰 아들 회는 이순신 장군의 곁을 지키는데, 이회는 실제로 임진왜란 발발 후 이순신 장군을 따라 한산도 대첩, 명량대첩 등 전쟁에 함께했으며, 임진왜란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 당시에도 회가 아버지 충무공의 옆을 지켰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첫째 아들 이회를 비롯해 아들 이예(울)와 이면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으며, 셋째 아들 이면은 1597년에 충남 아산의 충무공 본가에 있다가
노략질을 온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장군도 인간이며 자식이고 아버지인데 전쟁이 왜 두렵지 않겠습니까.
이순신은 아들 회에게 그럽니다.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는 법이지."
나 보다 백성을 먼저 생각하며 준비된 전술로 적에 대항한 장군의 리더십을 글이 아닌 영상으로 보면서 리더가 부재한 현실에서 리더십의 중요성을 느낍니다.
탐방꾼 임준영의 부인 '정씨여인'은 언어장애자이지만, 남편이 왜의 칼에 맞아 죽어갈 때 치마를 벗어 깃발처럼 흔들며, 이를 본 민중들 또한 그러할 때 가슴이 먹먹해졌으며, 회오리에서 대장선을 구할 때 눈물이 났는데 장군과 조선수군, 나아가 조선을 패배에서 구해낸 민초의 힘을 느끼게 됩니다.
민중이나 의병, 장군은 누구의 명령에 의해서가 이니라 솔선수범했습니다.
본인 군미필, 아들도 군면제가 대부분인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인들과 아주 대조적이지요.
영화가 끝나갈 때 배 안의 누군가가 그러지요. "나중에 후손들이 우리가 이렇게 개고생 한걸 알까 모르겠네! 모르면 호로 자식이제"라는 대사는 아마 그놈들에게 한 대사일 겁니다.
보상에 대한 기대를 않고 의무를 다한 장군과 조선수군을 보면서 리더의 자격과 자세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내 : 마산도서관의 길 위의 인문학
영화 명량의 현장에 동행할 기회인 2차 이순신 향기따라 가는 남도길 안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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