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9일
전날 임진왜란 진해 3대해전 소개비를 찾아 나선 길에 이전했다는 세스페데스 신부 기념조형물을 찾아 보기로 했습니다.
합포님과 통화를 했지만 웅천이 넓은 지역이 아님에도 도통 찾을 수 없었기에 다음날 다시 찾아 나섰습니다.
세스페데스 신부 기념조형물은 신부가 조선에 첫발을 디딘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해안변의 간출암 근처에 공원을 만들어 기념조형물을 세웠었지요. 그런데 이 기념조형물도 풍호공원에서 신부가 첫발을 디딘 이곳으로 이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또 다른 곳으로 이전했으니 기념조형물도 타국에서 고생이 많습니다.
기념조형물은 세스페데스 신부가 1593년 12월28일 조선에 처음 입국한 400주년을 맞아 신부의 고향인 스페인 또레도의 비야누에바 데 알까르데떼 시민들이 1993년 9월 당시 진해시에 헌정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온 최초의 서양인은 1593년 일본인 고니시의 초청으로 이 땅을 밟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1551~1611)입니다.
세스페데스는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종 신부로 스페인 출신의 그는 일본에서 사역하던 중 임진왜란의 와중에 조선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역사상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서양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하멜(1653년, 효종 4년 7월 64명의 선원과 함께 무역선 스페르웨르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를 향해 가던 도중 폭풍을 만나 8월 제주도 부근에서 배가 난파되어 일행 36명이 제주도 산방산(山房山) 앞바다에 표착漂着)보다 60년 앞섰으며, 통영에서 주장하는 멘데스(포르투갈 상인 ‘주앙 멘데스’. 1604년, 선조 37년 6월15일 34세의 멘데스는 당시 캄보디아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일본 무역선이 풍랑을 만나 통영 해안에 표류하면서 중국인 16명,일본인 32명,흑인 1명 등과 함께 조선 수군에 생포돼 조사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음.) 보다도 앞섰으며, 하멜과 메덴스가 일본으로 가던 무역선이 난파 ·포류한 것과는 달리 비록 일본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초청이지만, 우리나라를 밟은 최초의 서양인이 세스페데스입니다.
1577년 당시 일본에서는 불교 신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처음에 외래 종교인 천주교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나 1587년 7월 국력을 모으고 통일한다는 명분으로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천주교를 탄압하고 모든 선교사들의 추방을 명령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년 1592년(선조 25) 4월에 15만여 명의 군대로 하여금 조선으로 쳐들어와 7년 동안 왜란을 일으키며, 이때 천주교 신자 18,000명을 군대로 편성하여 조선 침략에 출정시킵니다. 그리고 그는 세스페데스를 침략 선봉장이며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 군종 신부로 배속시켜 조선에 보냅니다.
(세스페데스는 1597년 3월에 다시 내한했다가 도쿠가와의 선교사 추방령으로 수박골에 피신해 있다 두달 후 일본으로 되돌아갑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시에 따라 쓰시마를 거쳐 1593년 12월 27일 부산에 상륙하였으며, 고시니 유끼나가의 부대가 주둔해 있던 경남 진해 웅천성(熊川城)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인 28일이었습니다. 그는 이곳을 비롯하여 울산성까지에 이르는 여러 성을 돌아다니면서 일본군 신자들에게 고해성사 등을 주는 한편 길가에 버려진 전쟁고아들을 구제하며 일본으로 잡혀가던 조선인들을 돌봐주었으나, 그 밖의 조선인들은 모두 그를 피하거나 피란하여 접촉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세스페데스는 일년 가까이 웅천에 체류하면서 천주교 병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영세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그 후 일본으로 돌아가 동료 신부들과 함께 왜군에게 끌려간 조선 사람들에게 영세를 주어서 노예로 팔려 가는 것을 막았고, 끌려간 조선 사람들이 외국 노예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막으려고 1598년 6월 1일에 나가사키(長崎)에서 선교회의(宣敎會議)를 열어 포르투갈 상인으로 조선인을 매매하는 사람은 파문하고 벌금을 받을 것을 결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등 조선 사람의 구호 활동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고 합니다.
스페인 마드리드 시장의 아들로 태어나 신부가 되어 수없이 많은 우리 동포를 구출하며 조선 사람을 위해 헌신적이었던 세스페데스 신부는 일본의 나가사키 등지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1602년에는 고쿠라(小倉)에 수도원을 지어 원장으로서 활동을 하다가 1611년 12월 영원히 눈을 감았습니다.
웅천왜성은 산봉우리에서 능선을 따라 산기슭까지 뻗친 석성으로 임진왜란때인 1593년 고니시 유키나가 구축하여 수비하던 곳으로 왜군의 제1기지로 삼던 곳이었으며, 정상부근에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로 미사가 집전된 성지입니다.'라는 안내팻말이 있습니다.
조선에 상륙한 일본 침략군 제1군은 사령관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다수의 가톨릭 신자 병사들은 낮에는 전쟁터에서 무고한 조선 백성을 학살하고 밤에는 함께 모여 신부 세스페데스와 함께 미사를 드렸습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임진왜란을 목격한 최초의 서양인입니다.
▲ 남문동 해안변의 간출암근처의 세스페데스 신부공원(2010년 5월)
7월 8일 3대 해전비를 확인 후 건립 날짜를 정확하게 알기위해 창원시 문화관광과에 전화를 했으며, 당시 세스페데스 신부 공원 이전 날짜도 함께 물어 봤는데 문화관광과에서 이전하지 않았기에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웅포해전비가 있는 곳에서 와성만쪽을 보면 붉은 동그라미부분에 세스페데스 기념조형물이 있었는데, 이 기념조형물은 국토교통부가 민간투자사업으로 시행하고 있는 부산신항 제2배후도로를 건설하면서 지난해 10월에 지금의 장소로 이전했다고 합니다. 세스페데스 신부 공원에서 1.5㎞ 가량 떨어진 남문지구 제1호 근린공원으로 이전했는데 특정건물이 없으며 이정표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곳이며 도로들이 비슷하다보니 기념조형물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또 세스페데스 신부 공원 위로 터널이 지나가도록 설계되자 창원시가 조형물을 헌정한 스페인에 통보도 하지 않고 천주교 마산교구와 협의만 거쳐 세스페데스 신부와 전혀 상관없는 장소로 이전했다고 합니다.
▲ 공사중인 다리는 와성만을 가르며, 이전의 세스페데스 신부 공원이 있었던 자리
세스페데스 신부 기념조형물 이전장소가 궁금한 이들을 위해 최대한 접근하여 찍은 주변풍경인데 이정표를 보면 흰돌메공원, 와성, 시청을 화살표로 표시하고 있을 뿐인데 그래도 궁금한 분들에게는 (이정표가 언제 바뀔 수 알 수 없지만)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여기가 어디며 이게 무어라는 설명따위는 없으며, 간헐암근처에 있을 때와 비교가 될 정도로 초라한 기념 조형물입니다.
기념비 등은 도로를 기준으로 건립되는 게 보통인데, 전봇대옆의 작은 시루봉을 보면 알겠지만 예전과 달리 세스페데스 기념조형물은 예전과 달리 앞뒤가 바뀌었습니다.
누군가는 세스페데스 신부 기념조형물이 외로이 있더라고 했는데 근처가 기와가마유적지로 조잡스럽긴 하지만 체험이 가능하며, 기념조형물 주변으로 당시에 주변에 있던 조각작품이 적당히 배치되어 있습니다.
앉아 쉴 수 있는 공간도 있고 계절화초도 있으니 기념조형물 배경과는 다른 장소지만 영 외로운 장소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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