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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이야기/진해 풍경

성흥사 늦가을풍경과 보호수 느티나무

by 실비단안개 2014.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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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인권 님은 요즘 보호수를 정리·기록하고 있는데 11월 초 경남에서 가장 굵은 하동 청룡리 은행나무를 포스팅 했기에 댓글란에 이런데 갈때는 연락 좀 하라고 했더니 어제 오후에 연락이 왔었습니다.

웅천과 웅동의 보호수를 찾아 나섰다면서요.

당시 제가 올린 댓글의 뜻은 보호수도 아니고 은행나무도 아닌 이홍훈 가에 이순신 장군이 며칠간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궁금해서였는데 천부인권님은 해석을 다르게 하였던 겁니다. 그렇다고 어제 천부인권 님에게 속뜻을 이야기하지는 않았으며 천부안권 님은 보호수를 집중조명했으며, 저는 비단같은 굴암산과 성흥사 단풍을 즐겼습니다.

성흥사에 들기전부터 계곡의 맑은물소리가 또롱또롱했지만 계곡 단풍은 물소리만으로 하기로 하고 성흥사로 들었습니다.

 

신라(新羅)의 고찰(古刹) 성흥사(聖興寺)는 경남 창원시 진해구 대장동 180번지에 위치하며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입니다.

신라시대 무염국사(801~888)가 웅동 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불력으로 물리친 것을 흥덕왕이 보은하는 뜻으로 구천동에 지었다고 전해오는데 한때는 스님이 500여 명이나 되는 큰 사찰이었다고 합니다.

그 뒤 잦은 화재로 몇 차례 이건하였는데 창건한지 276년만에 대장동으로 옮겼고, 다시 322년에는 원래의 구천동으로 옮겼으며, 현종 8년(1667년) 대장동으로, 숙종 39년(1713년)에도 자리를 옮겼는데 정조 13년(1789년)에 비로소 지금의 위치에 이건 하였다고 합니다.

 

무염국사는 신라의 승려로 무열왕의 8대손인데 당나라에 유학하여 명승고적을 주유하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 동방대보살이라 불렸습니다.

귀국한 뒤에는 충남 보령의 오합사에 있으면서 성주산문의 개조가 되었는데 무염국사가 창건한 사찰들의 이름에 대부분 '성'자가 붙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흥사에는 고종 27년(1890년) 화주스님이 그린 섬세한 필치의 무염국사의 영정과 대불상, 나한상, 나한종관상, 제석상 등과 당간지주가 있고 사찰의 남서쪽 200m 지점에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도군이 있습니다.(참고 : '우리고장 문화유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2호인 대웅전은 창건 년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재의 건물은 조선후기에 다시 지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잡석으로 기단을 조성하여 자연석의 주춧돌을 놓아 둥근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에는 창방을 받치고 그 위에 다시 평방을 걸어서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1구씩 더 짜 올린 다포식 맞배지붕의 건물입니다.

또한 공포의 실미 끝 부분에는 연꽃 장식을 첨가하고 닭 등 동물 모양의 장식이 나타나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건물로 조선시대 후기 사찰 건축의 양식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일주문으로 보는 절밖의 벚나무단풍입니다.

초등학교 친구들과 벚꽃 피었을 때 소풍왔을 때가 생각났으며, 국민학교 시절 가을소풍지가 성흥사였지만, 당시에는 문화재나 규모 등에는 관심없이 그저 뛰고 놀았을 뿐이었습니다.

 

 

담장밖의 은행나무가 곱습니다.

봄엔 목련, 여름엔 베롱나무꽃이 성흥사를 대표하는 실물이며 가을엔 은행나무입니다.

돌담장과 붉은담쟁이와 잘 어울립니다.

 

 

 

쪽문으로 나가면 보호수 느티나무가 있으며, 느티나무 아래에서 볼 수 있는 은행나무가 걸쳐져 있는 성흥사 풍경입니다.

성흥사는 오랜 역사임에도 작은 절집이기에 한눈에 다 들어 옵니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보는 성흥사입구의 7층탑과 단풍입니다.

 

 

수령 220년(2005년 12월 9일 기준)의 느티나무는 당시 진해시장이 안내석을 세웠으며, 나무는 몇 개의 지지대에 기대긴 했지만 별다른 상처없이 위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장동의 다른 보호수를 만나고 웅천의 보호수 4점도 만났는데 정말 보호가 시급한 보호수가 있었으니 창원시와 진해구청에서 한번쯤 살펴주기를 바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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