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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저녁에 다대포 몰운대에 간 까닭은

by 실비단안개 2016.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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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30분 감천 문화마을을 나왔는데 그 시간에 영도까지 가기에는 무리였기에 다대포로 향했습니다.

다대포 몰운대에는 정운 장군의 정운공 순의비(鄭運公 殉義碑)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운 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웅천현감, 녹도만호(鹿島萬戶), 우부장(右部將)을 지냈습니다.

몰운대가 있는 이곳 다대포는 조선시대 국방의 요충지로서 임진왜란 때 격전이 벌어진 곳으로 정운 장군은 1592년 9월 1일 부산포해전에서 일본 전함 500여 척과 싸워서 100여 척을 격파하는 큰 승리를 거둘 때, 이순신의 우부장(右部將)으로 군사의 앞에서 분전하다가 적탄을 맞고 전사했습니다.
부산포해전이 있은 9월 1일을 양력으로 하면 10월 5일이 되는데, 부산시는 10월 5일을 '부산시민의 날'로 정하여 그날의 부산포해전의 승리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다대포 해수욕장은 모래사장이 더 넓어진 듯 했으며, 예전의 주차장은 수변공원으로 조성되었고 몰운대 입구쪽에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다대포는 낙동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역으로 일몰명소이며, 다대포 끝에 학모양의 몰운대가 있습니다.

몰운대(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7호. 1972년 6월 26일)는 16세기까지만 해도 몰운도(沒雲島)로 불리던 섬이었으나, 낙동강에서 내려오는 토사의 퇴적으로 다대포와 연결된 전형적인 육계도(陸繫島)[목섬]로, 몰운대에서 낙동강 칠백 리 물길을 따라 흘러내린 모래와 흙으로 강과 바다 사이에 형성된 삼각주인 대마등과 장자도, 그리고 부산의 제일 끝에 해당하는 남형제도와 북형제도, 나무섬 등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볼 수 있습니다.

 

 

몰운대 안내 표지판입니다. 정운공 순의비는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갈데까지 가 보자며 몰운대를 걸었습니다.

 

 

몰운대로 접어들면서 본 다대포해수욕장입니다.

 

 

몰운대는 개인사유지로 시민들의 안락한 휴식과 살아 있는 자연교육의 장으로 제공한 것이라는 글이 안내판에 있습니다.

몰운대는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7호(1972년 6월 26일)로 지정되어 있으며, 다대포객사 또한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운공 순의비는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는 데 어떻게 개인 소유가 되었는지 의아스럽습니다.

개방된 몰운대 솔숲길을 걸었습니다.

10월~이듬해 3월까지 동계기간 개방시간은 오전 6시에서 오후 6시까지 였기에 마음이 바빴습니다.

 

 

겨울 해는 짧으며 더군다나 소나무숲이라 더 어두었습니다.

 

 

빽빽한 소나무숲 위를 보니 대나무밭 못지 않은 풍경이 있었습니다.

 

 

10여분 걸으니 동래부사 이춘원이 1607년(선조40년) 7월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남겼던 몰운대 시비가 있었습니다.

 

 

沒雲臺

浩蕩風濤千萬里  호탕한 바람과 파도 천리요

白雲天半沒孤台  만리 하늘가 몰운대는 흰구름에 묻혔네

扶桑曉日車輪赤  새벽바다 돋는 해는 붉은 수레바퀴

常見仙人賀鶴來  언제나 학을 타고 신선이 온다

번역 정경주 글씨 묵산 김준기

 

 

몰운대 시비에 잠시 머물렀다 다시 솔숲길을 걸었습니다.

엊그제가 설날이었는데 봄날씨였습니다.

 

 

그렇게 또 10여분 걷다보니 다대포객사가 나왔습니다.

 

다대포객사( 多大浦客舍)는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 (1972년 6월 26일)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홑처마지붕건물로 이 건물이 언제 초창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825년(순조 25)에 중수되어 오늘에 이른다고 합니다.

건물의 용도는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하여 망배(望拜)를 드리는 데 사용하거나 사신들의 숙소로 이용되었던 조선 후기 지방 관청 건물로 조선 시대에 다대포는 군사적 요충이었으며, 이에 다대진에는 정3품의 당상관이 근무를 하였습니다. 안두리기둥 위에 절단된 대량을 놓은 5량집이며 벽체 없이 기둥만 남아 있어서 마치 누각 건물처럼 보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다대포 객사는 현 다대초등학교 이전의 다대사립실용학교 건물로 사용되었다가 1970년 현위치로 이전·복원하였으며, 1980년 부산광역시에서 기둥과 마루를 보수하고 단청공사와 현판(회원관懷遠館)을 설치하였고 1992년에 단청 공사를 실시하였습니다.

 

 

 

갈맷길 4-3구간을 걸었는데 두 갈래길이 나왔기에 오른쪽 길을 택해 걸었습니다.

 

 

인적이 뜸하긴 했지만 그래도 간혹 솔숲길을 걷는 이들을 만났으며 얼마를 걸으니 민간인 통제구역이 나왔습니다.

저 안에 정운공 순의비가 있는데 출입금지구역에서 되돌아 오기에 아쉬워 옆으로 난 길을 조금 더 걸으니 위험한 듯 했기에 되돌아 나왔습니다.

 

 

 

몰운대 입구에서 만난 정운공 순의비 모습입니다.

 

 

전남 고흥 녹도진을 방문했을 때 이대원 장군과 정운 장군을 모신 쌍충사가 있었는데, 쌍충사는 시도기념물 제128호(지정일 1990.02.24)로 조선시대 충열공 이대원 장군과 충장공 정운 장군을 모신 사당으로 조선 선조 20년(1587) 손죽도에서 순절한 이대원(李大源) 장군과 선조 24년(1591)에 옥포, 한산 해전에서 전과를 올리고 부산 몰운대에서 순절한 충장공 정운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이대원 장군은 선조 20년(1587) 녹도만호(만호는 조선시대 종4품의 무관직 품계로 지금으로 치면 연대장 정도의 직급)가 되어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대파하였고, 다시 흥양에 왜구가 침입하자 맞써 싸우다가 손죽도 해상(정해왜변 1587)에서 순절하였습니다. 이에 선조는 사당을 지어 모시게 했는데 이것이 쌍충사의 전신입니다. 정운 장군은 선조 24년(1591) 녹도만호로 부임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과 함께 목포·당포·한산해전 등에서 용감히 싸우다 부산 몰운대에서 순절하였으며, 선조 25년(1592) 이순신 장군의 청으로 이대원과 함께 사당에 모시게 되었으며 해마다 4월 제사를 지냅니다.

 

▲ 쌍충사

 

몰운대 입구에 있는 안내표지판의 정운공 순의비 사진과 설명입니다.

 

 

다시 걸어나와 전망대쪽으로 갔습니다.

먼 섬 같았던 형제도(?가 바로 눈앞에 있었으며, 주변은 양식장인 듯 했고 크고 작은 배들이 오갔습니다.

 

 

해가 넘어가고 있으며, 소나무가 가려진 능선에 정운공 순의비가 있습니다.

 

 

전망대쪽으로 가니 해초냄새가 확 풍겼는데, 전망대 아래쪽의 자갈마당에는 해초가 널려있었으며 방문객들은 해초를 채취하는 듯 했습니다.

 

 

전망대 왼쪽의 자갈마당입니다.

전망대에서 화손대쪽으로 갈 수 있지만 다저녁이라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전망대끝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군인 초소가 있었으며, 안쪽으로 출입이 가능했습니다.

 

 

 

 

 

 

그렇게 먼길이 아닌 것 같았는데 몰운대 반을 산책하는데 대략 한 시간 걸렸습니다.

정운 장군 순의비를 만나진 못 했지만 몰운대 구경은 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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