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1일
장유계곡으로 가려면 보배터널을 지나 지사쪽으로 가는데, 가는 길에 흥국사가 있습니다.
흥국사는 들꽃을 찾으러 다닌다고 몇 번 가본 사찰로 흥국사터는 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하여 첫날밤을 보낸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은 과학단지 공사중이기에 없어졌지만 예전엔 흥국사 입구의 명동마을 사잇길로 진입했는데 '허황후길'이라는 도로표기판이 있기도 했는데, 현재는 공사중이기에 임시진입도로를 타고 흥국사로 갔습니다.
김해지역에는 허황옥의 도래와 관련된 설화가 깃든 유적이 산재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부산시 강서구 명월산(明月山)에 자리한 흥국사(興國寺)와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불모산(佛母山)에 자리한 장유사(長遊寺)입니다.
흥국사 입구에 있는 가락고찰(駕洛古刹) 흥국사(興國寺)안내표지판으로 흥국사 대웅전 뜰에도 있습니다.
"부산시 강서구 지사동 명동마을 명월산(明月山) 북쪽 기슭에 있는 사찰. 가야불교의 발원지'1706년(조선 숙종 32) 증원(證元)이 지은 <명월산흥국사 사적비문(明月山興國寺 事蹟碑文)>에 의하면, 김수로왕이 48년 명월산 고교(高橋) 밑에서 왕후 허씨(許氏)를 친히 맞아들여 환궁했는데, 이때 허씨는 입고 온 비단바지를 벗어 이 산의 산신령에게 폐백을 올렸다고 한다. 왕은 허씨의 아름다움을 달에 비유하여 이 산의 이름을 명월산이라고 하고, 명월사를 지어 새 왕조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한편, 부인과 세자를 위해 진국사(鎭國寺)와 흥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뒤 임진왜란때까지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임진왜란 때 불 탄 뒤 1617년(광해군 9) 대웅전과 승당, 요사채 등을 중건하였다. 1706년(숙종 32) 일원(一元)과 일혜(一蕙), 상진(尙眞), 응준(應俊) 등이 중수하였는데, 그 때 담 밑에서 건강원년(建康元年: 144) 3월 장유화상(長遊和尙)이 서역에서 들어와 불노를 전하니 왕이 중신숭불(重信崇佛)하였다는 명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뒤 한동안 폐사가 되었던 것을 김원두(金元斗)가 옛터를 되찾아 방치되어 있던 유적을 수습하였고, 1942년 우담(雨潭)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칠성각, 종각, 요사채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부근에서 발굴했다는 조각석물이 있다. 높이 60cm, 너비 80sm 정도인 좌불을 양각한 좌우에 코브라뱀이 불상을 옹호하듯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을 새겨놓았다. 우리나라의 불교 조각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인도 불교의 남방 전래설을 증명하는 유물이라고 사찰측에서는 보고있다. 이밖에도 절 오른쪽에는 가락국태왕영후 유허비(駕洛國太王迎后 遺墟碑)와 증원이 세운 사적비가 있으며, 정원 복판에는 1986년에 세운 오층관음보탑과 석등, 사적비 등이 있다. 이 절은 불교의 남방전래설 연구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가락 불교의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흥국사에 들기전에 용원의 망산도와 유주암, 유주각 사진과 설명입니다.
망산도/유주암/유주비각
망산도, 유주암, 유주비각의 유래를 살펴보면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기록되어 있는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 아유타국의 허황옥공주와 관련되어 있다.
가락국기의 내용을 보면, 건무 24년 무신년 7월 27일에 구간등이 아뢰기를 대왕께서 강림하신 이래로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시었으니 신등이 처녀중에 절묘한 자를 궁중에 뽑아 들여 배필을 삼으소서 라고 하니 왕께서 이르기를 내가 여기 내려온 것은 하늘의 뜻이요. 나의 배필로 왕비가 되는것 또한 하늘의 뜻이니 그대들은 염려하지 말라 이르고는 드디어 유천간에서 명하여 경주와 준마를 가지고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는 한편 신귀간에게 명하여 승점으로 가게 하였다. 홀연히 바다 남서쪽에서 붉은색의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휘날리며 북쪽을 향해서 오는 배가 있었다.
유천등이 먼저 망산도에서 횃불을 드니 앞을 다투어 하륙하려 하였다. 신귀가 바라보고는 대궐로 달려와서 왕께 아뢰니 왕이 듣고 기뻐하였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하여 용원의 부인당을 공주가 도래한 곳으로, 말무섬을 유천간이 기다린 망산도로, 쪽박섬에서 공주가 타고온 돌배가 뒤집힌 것으로 보아 이를 기념하는 유주각을 세웠다. 유주각은 융희(융희(隆熙)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 때의 연호(1907~1910), 1909년에 세움.) 2년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로 건축하였다. 비각안의 유주비는 비신이 높이 1.75M, 폭 0.765M, 두께 0.35M의 석비로 '대가락국 태조왕비 보주태후허씨유주지지'라 새겼다.
▲ 망산도, 유주암, 유주각
허황후는 혼인을 위해 가야 땅(망산도)에 도착했지만 김수로왕이 목메어 기다리고 있는 궁궐로 가지 않고 왕이 나와서 나를 맞이하지 않으니 그냥 따라 갈 수가 없다는 뜻을 전하고, 결국 장막을 치는 임시 궁전을 만들어 그곳에서 초야(初夜)를 치루는데, 임시 궁전이 지어진 곳이 현재의 흥국사가 있는 곳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그 내용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王后 乃曰我與等素昩平生焉敢輕忽相隨而去 留天 等返逹 后 之語王然之率有司動蹕從闕下西南六十歩許地山邊設幔殿祗候 王后 於山外 别浦 津頭維舟登陸憇於"641;嶠解所著綾袴為贄遺于山霊"
[왕후가 말했다. "나는 본래 너희들을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옳게 여겨 유사(有司)를 데리고 행차해서,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山神靈)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절마당 계단을 올라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법당인 극락전입니다. 극락전 앞엔 석등 1기가 세워져 있고 극락전은 대숲에 싸여 있습니다.
흥국사 대웅전입니다.
팔작지붕에 겹처마 다익공의 포작을 갖춘 정면5칸, 측면3칸의 당당한 모습이며 뜰엔 5층석탑이 있는데 2층의 기단의 5층석탑으로 각 기단부 4면엔 부조상들이 조각되어 있고, 1층탑신부에도 각면마다 아기를 안은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스님이 기도중이었기에 대웅전 내부는 볼 수 없었습니다.
대웅전에서 왼쪽으로 가면 종각이 있고 종각 뒤에는 흥국사 사적비와 비석군이 있는데, 오른쪽에는 명월산흥국사사적비를 비롯 가락국 태조왕 영후 유허비(駕洛國太祖王迎后遺墟碑)와 흥국사유허비, 승려 증원이 찬한 '명월산 흥국사 사적비문(明月山興國寺史蹟碑文) 등이 있습니다. 흥국사 유허비(흰색)는 '가락국 태조왕 영후 유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가락국 초대왕인 김수로왕이 이곳에서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을 왕비로 맞이하였다는 정표로 세워진 비로 이 비는 1956년 흥국사를 중건할 당시 명월사 사적비의 기록에 따라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 駕洛國太祖王迎后遺墟碑(가락국 태조왕 영후 유허비)
다시 대웅전입니다.
요즘은 사찰의 꽃살문의 아름다움이 정겨워 찍게 됩니다.
추녀의 아름다운 단청과 풍경과 꽃살문입니다.
오른편의 대각선으로 문살 방향이 된 것을 '빗살' 이라고 하는데, 빗살 형태 구조의 문살은 사찰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꽃살문 구조의 형태 입니다.
왼편의 꽃살문은 거북등처럼 육각형태로 만들어진 '귀갑살' 형태의 구조의 꽃문살으로 육각형 벌집형태이기도 하지만 거북등의 구조를 형상화한 꽃문살으로 장수와 복덕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대웅전 뒷편으로 명월산이 약간 보이며 대웅전 뒤는 감나무밭입니다.
대웅전 옆으로 계단이 있는데 삼성각과 미륵전으로 가는 길이며, 계단 앞엔 동백이 붉은 꽃잎을 열고 있었습니다.
대웅전 뒤 감나무밭 한쪽에 위치한 맞배지붕의 삼성각뒤 청매가 꽃잎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골짜기에도 봄이 오고 있습니다.
명월산이며 아래는 계곡입니다.
이곳은 지극히 사적인 공간처럼 여겨졌기에 주변만 둘러봤는데 백매와 홍매가 피고 있습니다.
사찰의 현판과 편액은 거의가 한자인데 삼성각 뒤의 미륵전은 한글 편액입니다.
맞배지붕 1칸의 전각으로 안에는 미륵바위 한 쌍이 봉안되어 있다고 하지만 문을 열어 확인은 하지 못 했습니다.
산불지기 아저씨가 계곡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기에 계곡의 봄꽃은 만나지 못 하고 장유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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