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5일
성흥사는 시골의 작은 사찰이지만 천년고찰입니다.
신라(新羅)의 고찰(古刹) 성흥사(聖興寺)는 경남 창원시 진해구 대장동 180번지에 위치하며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입니다. 신라시대 무염국사(801~888)가 웅동 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불력으로 물리친 것을 흥덕왕이 보은하는 뜻으로 구천동에 지었다고 전해오는데 한때는 스님이 500여 명이나 되는 큰 사찰이었다고 합니다.(833년)
그 뒤 잦은 화재로 몇 차례 이건하였는데 창건한지 276년만에 대장동으로 옮겼고, 다시 322년에는 원래의 구천동으로 옮겼으며, 현종 8년(1667년) 대장동으로, 숙종 39년(1713년)에도 자리를 옮겼는데 정조 13년(1789년)에 비로소 지금의 위치에 이건 하였다고 합니다.
언젠가 블로그 이웃 천부인권님이 성흥사 무염국사 영정을 봤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니요.
성흥사를 창건한 분이 무염국사지만 단 한 번도 무염국사의 영정을 못 봤습니다. 성흥사 대웅전에 있는데도요. 성흥사를 방문하면 주로 계절의 변화를 사진으로 찍었거든요.
팔판산과 굴암산 자락에 포근히 안긴 성흥사입니다.
성흥사 입구의 7층석탑입니다. 봄이 오고 있나요?
성흥사 뒤의 산은 팔판산과 굴암산인데 성흥사 일주문에는 불모산(佛母山) 성흥사(聖興寺)라고 쓰여 있습니다. 팔판산과 굴암산은 불모산의 지산인 셈이 되겠습니다.
창원시 남동쪽에 위치한 불모산( 801m)은 가야시대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비인 허씨가 일곱아들을 이곳에 입산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다는 전설에서 어원이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창원의 성주사도 신라 흥덕왕 10년에 무염국사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곳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숙종 7년에 재건하였는데 역시 불모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무염국사는 신라의 승려로 무열왕의 8대손인데 당나라에 유학하여 명승고적을 주유하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 동방대보살이라 불렸습니다.
귀국한 뒤에는 충남 보령의 오합사에 있으면서 성주산문의 개조가 되었는데 무염국사가 창건한 사찰들의 이름에 대부분 '성'자가 붙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난해 여름 함안의 장춘사에 다녀 왔는데, 장춘사는 815년(신라 헌덕왕 7년)에 무염국사가 신라를 침략하던 왜적을 불력으로 물리치자, 왕이 이에 대한 보답으로 세운 절이라고 전하는데 경남의 다른 지역에서도 무염국사가 창건한 사찰이 있었습니다.
무염국사가 창건한 무릉산 장춘사입니다. 장춘사 일주문은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색다름을 주는데, 사립문옆에 있는 일주문에는 '무릉산 장춘사'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작은 문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들어 가야하며, 일주문을 들어서면 경내가 나오는데 요사채와 대웅전 앞마당에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68호 장춘사 5층석탑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당시 장춘사 군데군데가 보수중이었습니다.
성흥사 일주문의 사천왕입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대웅전이 바로 보이며, 마당 양쪽으로 요사채가 있는데 중건한지 몇 년 되지 않습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2호인 대웅전은 창건 년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재의 건물은 조선후기에 다시 지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잡석으로 기단을 조성하여 자연석의 주춧돌을 놓아 둥근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에는 창방을 받치고 그 위에 다시 평방을 걸어서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1구씩 더 짜 올린 다포식 맞배지붕의 건물입니다.
또한 공포의 실미 끝 부분에는 연꽃 장식을 첨가하고 닭 등 동물 모양의 장식이 나타나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건물로 조선시대 후기 사찰 건축의 양식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무염국사 영정을 보고 싶은 마음에 대웅전에 들었더니 49재중이었습니다. 하여 조용히 영정을 만났습니다. 무염국사 영정은 대웅전 오른편 출입문쪽에 봉안되어 있는데, 그동안 문화재인 대웅전은 여러 각도에서 찍었지만 내부는 거의 찍지 않은 듯 한데, 법당 내부를 찍으면 부처님에게 잘못하는 짓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무염국사(無染國師) 영정입니다.
* 국사(國師) : 신라·고려 시대에 있었던 승려의 최고법계.
고종 27년(1890년) 화주(化主)스님이 그린 섬세한 필치의 무염국사의 영정(가로 1.5m 세로 2m)입니다. 얼굴도 둥글둥글, 손도 둥글둥글하며 귀는 마치 부처님의 귀같아 참 선하게 보입니다.
무염국사는 신라의 승려로 태종무열왕의 8대 손이며 당나라에 유학하였습니다. 귀국한 뒤에는 충남 보령의 오합사에 있으면서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산조가 되었는데 무염국사가 창건한 사찰들의 이름에 대부분 '성(聖)'자가 붙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염국사는 801년(애장왕 2)에 출생하여 888년(진성여왕 2)에 입적한 신라 후기의 스님으로서 속성은 김씨(金氏), 호는 무량(無量), 또는 무주(無住), 법명은 무염(無染)이고 범청(範淸)의 아들로 어머니는 화(華)씨입니다.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에게서 출가하였다고 합니. 무염은 부석사(浮石寺)의 석징(釋澄)을 찾아가『화엄경』을 공부하였고, 821년(헌덕 13) 당나라로 가서 성남산(城南山) 지상사(至相寺)의 화엄강석(華嚴講席)에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20여 년 동안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보살행을 실천하므로 '동방의대보살'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무염국사 영정을 뵈었으니 느긋하게 사찰을 둘러 볼 참입니다. 대웅전의 연등입니다. 올려다 봐도 예쁘네요.
단순한 꽃살문도 빛에 따라 모양을 달리합니다.
대웅전 왼편에는 나한전이 있습니다. 내친김에 나한전 법당도 살며시 봤습니다.
나한전 현판은 서예가 가원 이영식 선생의 글씨입니다.
나한전은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좌우에 석가모니의 제자 가운데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성자들을 봉안하는데 성흥사 나한전에는 좌측에 미륵보살, 우측에 제화갈라보살을 봉안하였고 좌우로 500 나한상을 봉안하였습니다.
대웅전 마당의 배롱나무는 여전히 소나무를 품고 있었으며, 잠시 마당에서 봄을 찾았습니다.
대웅전 현판은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 선생의 글씨라고 합니다.
그 사이 수선화와 스노우플레이크가 쑥 올라와 있었습니다.
성흥사 범족각이며 옆에 비석 두 기가 있는데, 왼쪽의 비는 1962년(구 불기 2989년)에 있었던 대웅전 개금불사 공덕비입니다.
대웅전 뒤로 삼성각이 있습니다.
삼성각에는 칠성탱, 독성탱, 산신탱, 용왕탱을 봉안하였습니다. 곧 벚꽃이 필 텐데 벚꽃이 피면 삼성각이 더 빛납니다.
삼성각에 신발 한 켤레가 있기에 뜬금없이 노크를 했는데 기척이 없기에 문을 살며시 여니 처사님이 기도에 열중이었습니다.
섬상각옆으로 배롱나무가 있으며, 늙은 귀룽나무는 벌써 봄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삼성각에서 내려오면서 찍은 경내입니다. 작은 사찰이지만 있을 건 다 있습니다.
대웅전 옆 목련의 꽃눈이 빛났는데 곧 가지마다 하얀 목련을 달겁니다.
요사채에서 찍은 대웅전과 나한전입니다.
성흥사 사무실이 있는 요사채며, 이 건물 뒤로 수령 220년(2005년 12월 9일 기준)의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당시 진해시장이 안내석을 세웠으며, 나무는 몇 개의 지지대에 기대긴 했지만 별다른 상처없이 위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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