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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께 즐거우면 더 좋지 아니한가!
고향 이야기/진해 풍경

부엉산의 진해탑과 진해박물관

by 실비단안개 2017.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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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6일

왜 그런 착각을 했을까요.

블로그 이웃 발디산적님이 미국에서 오셨습니다. 진해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면서 진해 중원로타리와 진해탑에 올라 어린 시절 살던 집이 보이는지 보고 싶다고 했기에 부산에서 진해행 교통편을 일러 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단 출구 2번이라고 하여 하단에서 30여분을 소비했다고 했습니다. 그 출구는 1번 출구였습니다.

동아여객이 해양극장에서 서는지 옛 진해경찰서쪽에 정차를 하는지 몰라 크라운베이커리 앞에서 동아여객 정차를 기다렸는데 차가 그냥 쌩 갔습니다. 여기가 아니고 진해경찰서쪽인가. 맞은 편을 보니 동아여객이 정차를 하기에 이곳이 맞겠구나 하며 기다리는데 동아여객이 서고 발디산적님이 내렸습니다. 블로그에서 사진으로 뵈었기에 전혀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악수.


중원로타리와 진해우체국 주변을 둘러본 후 진해탑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옛날엔 1년계단을 걸어 올랐지만 지금은 모노레일카로 오릅니다. 모노레일카 공사중일 때 기가 꽉 막힐 지경이었는데 이제 무덤덤해지며 진해탑에 오를 일이 있으면 자연스레 일행과 모노레일카를 타게 됩니다.

2년전 리모델링을 할 때 제황산공원을 오르고 처음입니다. 올 군항제때는 멀리서 보기만 했거든요.

중원로타리에는 부처님 오신날이 지났는데 봉축등이 있었습니다. 중원로타리는 성탄이 가까워오면 트리가 세워지며 군항제때는 군항제 주무대가 되는 공간입니다. 그렇지만 예전의 분수탑때가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진해탑 전체를 찍기에는 무리였습니다. 부엉산 정상이 넓지 않으며 수풀로 가려져 있거든요.



진해탑 입구에는 창원시립진해박물관과 진해탑 안내 표지판이 있습니다. 진해탑 글씨는 예전 그대로인데 리모델링을 하면서 액자에 담기게 했습니다. 진해탑은 높이 28m의 9층탑이며, 면적 3,068㎡으로 전망대에 오르면 진해구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고 꼭대기에 오르는 승강기가 설치되어 있으며, 중원로타리 방향에서 탑산에 오르는 계단이 365개로 되어 있어 1년계단이라고도 합니다.



진해탑 안내입니다.

제황산은 마치 부엉이가 앉은 것과 같다하여 부엉산이라 하였고, 봉우리는 두엄봉으로 불리었으나, 해방후 제황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해방후가 아닌 일제강점기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역주민들 이야기로는 제황산공원 이전에는 두산공원, 제왕산공원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해발 90m 산 정상에는 1927년 일본이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이긴 노일전쟁의 전승기념탑을 전함의 마스터를 본따 세웠으나 해방 후 이를 헐고 1967년에 해군군함을 상징하는 탑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진해탑 입구에 있는 현시학 해군 소장의 흉상입니다.

현시학(玄時學, 1924년 1월 3일 ∼ 1989년 7월 18일)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해군 창설의 주역으로 6·25 전쟁에서 활약하였습니다.

 


진해탑 아래를 한 바퀴 도는데 오른편으로 돌다보니 전에는 못 봤던 망주석 1기가 있었습니다. 카메라를 꺼냈습니다.

망주석은 무덤 앞에 세우는 1쌍의 돌기둥으로 망두석·망주석표·화표주라고도 하며, 망주는 준말이입니다. 주로 돌받침 위에 8각기둥을 세우고, 맨 위에 둥근 머리를 얹었습니다.

아래의 망주석은 1910년 진해시에서 일본군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된 망주석이 100년 만에 다시 진해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1910년대 초 일본군이 진해시에서 군 시설 정비 시 발굴한 것으로, 일본의 대표적인 정한론자(征韓論子)인 '사이고 다카모리'의 호(號)를 딴 가고시마 현의  '난슈 신사'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망주석 표면에는 한자로 '조선석 명치 43년 8월 29일'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명치 43년은 1910년으로, 일본이 1910년 8월 29일 한국 국권을 강탈한 날을 기념하는데 이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진해탑 1층에 카페가 새로 생겼었지만 우리는 밖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발디산적님이 미국에서 가지고 온 물건을 펼쳐 설명을 해 주기도 했습니다. 텃밭농사를 하다보니 농기구와 약품입니다.



전망대로 올라 갔습니다. 전망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진해시가지가 사진으로 나와 있는 건물과 풍경을 볼 수 있는데 우리는 눈에 익어 금방 찾을 수 있지만, 처음 접하는 이들은 숨은 그림 찾듯이 해야 찾을 수 있습니다.


진해가 작은 도시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발전했는데 발디산적님이 진해역을 금방 찾았습니다. 진해역 건물이 특이하며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보니 그런 것 같았습니다. 그리곤 위를 더듬어 진해여고를 찾고 내수면연구소도 찾고 여좌천도 찾았습니다.



중원로타리와 통제부가 보입니다. 옛 진해우체국도 보이며 흑백다방도 보입니다.



남원로타리쪽인데 해군사관학교로 가는 길입니다. 진해 원도심에도 아파트가 많군요.



속천항과 대죽도가 보이는데 이날 황사와 미세먼지가 심했습니다.



제황산초등학교와 위의 시루봉이 보입니다. 경화역도 이 방향입니다. 꽃잎 한 장 둘레만한 도시, 진해탑에서 다 본 듯 합니다.



새단장한 박물관입니다. 입구에 들어서니 아래의 글이 있었습니다만 누구의 글이라는 건 없었습니다. 어쩌면 아래나 뒷쪽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입입금지(立入禁止)표석입니다.

입입금지표석의 설명입니다.

1906년 10월 한성부윤 박의동을 위원장으로 한 진해만 군항지 조사위원과 일본측 위원이 마산 이사청에서 회동해 진해만 일대의 땅 점탈 절차에 대한 협의를 마쳤다.


회동 직후 다시 도만이개에 상륙한 일본해군은 무력으로 주민들의 출입을 봉쇄하고 군항 경역의 입입금지구역에 대한 측량을 강행하였고. 측량이 끝난 곳에는 입입금지 표석을 세워 조선인들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즉 여기는 우리 일본 땅이니 너희 조선인은 출입을 금한다는 표석입니다. 조선인의 저항에도 이듬해 봄에 땅값 지급을 강행했는데, 농민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강탈당한 땅값 거부운동을 벌였으며, 김화익·배달원·문석윤 등 이 고장 반일청년들이 이를 주도했다고 합니다.




진해의 역사가 사진과 함께 알기 쉽도록 안내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어린 시절 진해의 모습을 보고 당시를 이야기 했습니다만, 우리는 어린시절 창원군이었기에 진해는 아주 가끔 나간 큰도시였습니다.




진해탑의 변천사입니다.

1930년대 승전탑의 모습은 1929년 진해탑 준공되었습니다.

발틱함대 마스터 모양의 진해탑이며, 두 번째 사진은 90년대 말이며 마지막은 현재의 탑모습입니다. 군항제 기간이 아니었기에 누가 부엉산과 진해탑을 찾을까 생각했는데 제법 많은 시민들과 여행객이 진해탑을 찾아 전망대에서 진해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나름 가는 봄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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