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함께 즐거우면 더 좋지 아니한가!
마음 나누기/가본 곳

文대통령이 휴식한 종이 봉황 내려앉은 봉정사는 보물창고

by 실비단안개 2018. 8. 23.
728x90

8월 15일

우리의 첫 휴가지는 문재인 대통령이 7월 마지막 주에 휴식을 취한 안동 봉정사로 정했습니다.

경북 내 안동 봉정사와 영주 부석사를 비롯해 경남 양산 통도사, 충북 보은 법주사, 충남 공주 마곡사, 전남 순천 선암사, 전남 해남 대흥사 등 국내 대표적인 7개의 산사가 지난 6월 30일 '산사, 한국의 승지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란 이름으로 한국의 13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됐습니다. 

 

해남 대흥사, 양산 통도사, 순천 선암사는 방문을 몇 번 한 적이 있으며 법주사와 마곡사는 들어는 봤지만 아직 방문을 하지 못 했고, 부석사는 지난해 겨울 근처까지 갔다가 가을 은행단풍이 고울 때 방문하자고 방문을 미루어 둔 사찰이며, 안동의 봉정사는 유네스코 등재로 알게 된 사찰입니다.

문재인 대통령 내외는 7월 28일 경북 안동시의 봉정사를 찾아 모처럼 교외에서 주말 휴식을 취했는데, 봉정사 대웅전에서 불공을 드리고 주지스님과 전통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는 모습이 여러 언론사를 통해 공개되었습니다.

영주로 가는 길에 안동이 있으며 시간이 비교적 여유롭기에 안동 봉정사를 방문하기로 식구들과 합의했습니다. 아이들이나 우리 부부는 무교입니다만, 우리나라 전통사찰은 종교 이전에 역사며 문화다보니 아주 가끔 전통사찰을 찾게 됩니다.

 

 

안동역에서 봉정사까지는 승용차로 약 30여분 걸리는 거리에 있습니다. 봉정사로 가는 길은 마치 산책길 같았으며 유네스코 등재 산사답지 않게 주변과 가는 길은 여유로웠습니다. 사찰 입구에서 입장료를 지불하고 주차는 조금 더 올라가서 했습니다.

소나무숲 사잇길을 달리다보니 천등산 봉정사(天燈山 鳳停寺) 일주문이 보였습니다. 사찰의 시작은 일주문입니다. 일주문은 양쪽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다보니 기둥의 나이가 많습니다.

 

 

 

오전시간이었지만 햇살이 뜨거웠기에 모자와 양산중 어느 것을 줄까하며 물어보니 양산을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 셋은 모자를 썼고요. 올 여름 남성패션중 가장 큰변화는 남자들이 양산을 든 겁니다. 양산을 들었을 때와 들지 않았을 때 온도 차이는 약 3도라고 했는데, 얼라아부지는 지난해도 양산을 들었으며 그 전 해에도 양산을 들고 다녔습니다. 영주 일기예보를 보니 오후에 비가 내린다고 되어 있었기에 이번엔 우양산겸용의 화려한 양산입니다.

 

 

봉정사 일주문을 지나니 봉정사 안내가 있었으며 봉정사만큼 소박한 화장실도 있었습니다.

 

 

 

 

봉정사(鳳停寺)는 신라고찰로 아주 아담한 사찰입니다.

돌계단을 올라가면 만세루가 있는데 만세루 아래 계단을 올라가면 대웅전이 바로 보이며, 만세루와 마주보는 대웅전 왼편에 화엄강당이 있고, 대웅전 옆으로 극락전이 있습니다.

큰사찰에 비하면 봉정사는 작은 사찰이지만 안동에서는 가장 큰 사찰로 대웅전과 극락전은 국보이며, 화엄강당을 비롯 6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대웅전으로 통하는 만세루가 시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니 그야말로 보물창고입니다.

 

 

봉정사 안내인데, 영주 봉황산에 부석사를 세운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종이로 만들어 날려 보낸 봉황이 내려앉은 곳에 봉정사(672년)를 세웠다는 설화가 있지만, 부석사 창건(676년)이 봉정사보다 늦어 맞지 않습니다.

 

 

일주문에서 만세루로 가는 휘어진 길에 180년 수령의 소나무 보호수가 우람했습니다.

 

 

마치 연리지처럼 보이지만 연리지는 아니며 가지가 서로 엉겨있는데 부채살처럼 퍼진 넓은 소나무는 행인들을 위해 그늘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봉정사로 들어가는 만세루가 계단위에 앉아 있습니다.

안동 봉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께서 창건한 사찰입니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천등산'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그 뒤 더욱 수행을 하던 능인스님이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이곳에 와서 머물러 산문을 개산하고, 봉황이 머물렀다고 하여 봉황새 봉(鳳)자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鳳停寺)라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그 뒤 6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 보물 제1614호 후불벽화, 보물 제1620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 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시도유형문화재 325호인 덕휘루(만세루), 무량해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 중암이 있습니다.

 

봉정사는 고려시대에는 태조(太祖)와 공민왕(恭愍王) 등이 행차했고, 지난 1999년에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안동을 방문하면서 이곳을 찾아 한국불교의 진수를 체험했습니다. 당시 영국 여왕은 "가장 한국적인 건물을 보고 싶다"고 했고, 그에 대한 화답으로 봉정사가 선택됐는데, 이로 인해 봉정사는 세계적 유명세를 얻었지만 저는 너무 늦게 봉정사를 알았습니다. 

봉정사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과 '동승' 등 불교 영화가 촬영된 장소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천등산 봉정사는 도심과 멀리 떨어져 있지도 험하지 않아 잠시 바쁜 도심을 떠나 한적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곳이며,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을 가진 이 곳은 우리들 모두에게 자랑스러운 곳이기도 합니다.
점차 번잡해 가는 다른 사찰들과는 달리 조용한 한국산중 불교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어 불교를 믿든 믿지 않든 더없이 좋은 여행과 명상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돌계단을 오르면 누각 아래로 봉정사로 드는데, 이는 경사진 지형에 만들어진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부석사도 그러했습니다. 누각 아래로 들다보면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게 되며 마음가짐 또한 다시 한 번 추스리게 됩니다. 대웅전 편액이 보입니다.

 

 

봉정사 만세루는 시도유형문화재 32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누문은 대부분 이층으로 건축되며 아래층은 사찰의 중정으로 통하는 통로로서의 기능을 하며, 윗층은 산사의 전망을 감상하거나 목어(木魚), 운판(雲版), 범종(梵鐘), 법고(法鼓)등을 걸 수 있는 종루(鐘樓)나 고루(鼓樓)의 기능을 겸하기도 합니다.

만세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측면에 풍판을 달아 가구의 노출을 방지하고 비나 바람으로부터 보호받도록 하였습니다. 건물의 구조는 이층 누각식 건물로 일층인 아랫부분은 자연석 기단에 자연석 주츳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우하주는 누상주에서 사용한 것보다 더 굵은 부재를 사용하여 견고하게 보이며 사찰의 중정으로 오르는 통로의 구실을 합니다.

 

만세루는 우물마루 바닥에 평난간으로 둘러져 있으며 법고와 목어 판이 놓여져 있어 예불을 알리는 고루로서의 기능을 합니다. 목어는 나무를 깎아서 잉어 모양을 만들고 속을 파내어 비게 한 다음 그 속을 막대로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불구입니다. 염불과 독경이나 예배할 때 쓰이는 것으로 물속에 사는 고기들을 구원하고 수중중생의 해탈을 위하여 두드리는 것으로 불사에 쓰이는 이 기구를 목어라고 하며, 운판은 날아 다니는 짐승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 대개 구름의 형태로 만들어서 걸어두고 칩니다.

짧은 계단이었지만 봉정사로 들면서 흘린 땀을 만세루 누에 앉아 식힙니다.

 

 

만세루 1층의 통문에는 희미하게 남겨진 태극문양이 있습니다.

 

 

민간 신앙에 있어서도 물고기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장석이나 노리개에 잉어 형상이 새겨지고 장농이나 소품들에도 잉어문양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것은 물고기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을 감지 않으므로 물고기의 속성을 따라서 도난을 방지하는 부적으로 주로 사용합니다. 불교에 있어서는 수행자들로 하여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행에 정진하라는 뜻으로 물고기 형상의 목어를 만들어 사용한 것입니다.

법고는 네 발 달린 짐승들을 구원하고 해탈하라고 치는 북으로 북을 받치고 있는 북대는 구름 모양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누에는 '덕휘루(德輝樓)'라는 현판이 하나 더 걸려 있어 이 누문의 이름이 덕휘루였음을 알 수 있으나 언제 만세루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무량해회와 만세루입니다.

 

 

무량해회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겹처마 집에 전면과 남쪽에 마루를 놓고 양쪽의 중앙에 칸벽을 설치하여 몇 개의 방으로 나누어진 요사입니다. 요사란 절에서 스님들이나 신도들이 거처하는 집을 말합니다. 불사를 관리하고 강당, 선당에서 수행하는 모든 수행자들의 의식주를 뒷받침해 주는 생활공간이며 휴식공간입니다.

 

 

만세루 정면에 대웅전이 있습니다. 봉정사 대웅전은 국보 제31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대웅전의 건립 연대는 자세한 사료가 없어서 정확한 연대를 알지 못하나 건물의 일부를 해체하여 수리할 때 일부분의 묵서명이 발견되어 추정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이 대웅전은 현존하는 다포계 건물로는 최고의 목조건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대웅전은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자연석의 막돌허튼층 쌓기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건물입니다.

겹치마 팔작지붕에 다포양식을 한 이 건물은 산 중턱에 세워진 건물이면서도 평야를 끼고 있는 지역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데, 원기둥 위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돌리고 그 위에 공포를 올려 놓았으며, 주간이 넓고 오포작(五包作)이라서 포벽(包壁)이 넓게 보이는 반면 기둥은 짧게 보여 매우 안정감을 줍니다. 대웅전 마당은 장식물 없이 엄숙합니다.

 

 

지붕은 팔작으로 비교적 처마 깊이가 깊고, 처마는 겹처마로서 네 귀의 추녀끝에는 활주를 받쳐 추녀마루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내부의 바닥은 널마루를 전면에 깔고 내부 고주(高柱)를 이용하여 후불벽(後佛壁)을 만들었고 고주 앞에는 불단을 짜서 불상을 모셨습니다.

 

 

법당은 사진촬영 금지인데, 부처님 뒤로 보물 제1643호 안동 봉정사 아미타설법도가 있습니다.

1713년 도익 등이 조성한 아미타불화로서, 본존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10보살과 범천, 제석천, 10대 제자, 벽지불, 사천왕, 팔금왕 등을 배치하였습니다.

 

대웅전 계단 좌ㆍ우에는 석조물 괘불대가 있습니다. 괘불대는 사찰의 행사나 법회 때 법당의 부처님을 대신하여 괘불(탱화)을 걸어두기 위한 지주입니다.

 

 

위 법당 사진을 잘라 밝게 해 보니 부처님과 아미타설법도가 얼핏 보입니다.

 

 

 

대웅전 건물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는데 이러한 예는 툇간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전면 3칸은 전부 개방하고 문비를 설치하였는데 궁판 받친 띠살무늬의 사분함(四分閤)이며 이 문짝은 앞의 쪽마루와 함께 후대의 구조물이라고 합니다.

 

 

측면 문은 사용금지였습니다.

 

 

우리나라 국보와 보물은 석비(우)에 지정번호와 건축물 이름이 있으며 뒷면에는 대한민국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무량해회 맞은편의 화엄강당은 보물 44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안내판(좌)은 지역마다 다르며 외국어가 쓰여 있는 경우도 있지만 쓰여있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아래 건물이 화엄강당입니다.

스님들이 교학을 공부하는 장소로 온돌방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극락전과 대웅전이 17세기에 중수되었는데 스님들의 강학공간인 화엄강당도 함께 중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건물 내부는 남쪽 2칸이 부엌, 북쪽 4칸이 온돌방으로 되어있으나 원래는 정면 4칸, 측면 4칸으로 현재의 온돌방 뒤쪽으로 4칸의 마루가 깔려 있으며 부엌이 지금보다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평면 구성이 언제 오늘날처럼 바뀌었는지는 정확하게 알기 어려우며 1930년대 이후로만 짐작될 뿐이라고 합니다.

 

대웅전 앞 경내에 들어서면 왼쪽에 화엄강당이 동향으로 세워졌으며 그 후면은 극락전의 앞쪽이 됩니다. 장대석 댓돌 위에 두꺼운 널판을 쪽마루와 같이 깔았는데 사분합의 띠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중앙칸과 북쪽칸은 하나로 통해서 넓은 온돌방입니다.

강당으로 사용한 건물이므로 대웅전 등의 불당에 비교하여 매우 낮은 기둥을 사용하였는데 그 대신 공포의 치수를 보통 이상으로 크게 잡아 건물의 균형을 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대웅전과 극락전 사이에 불상 1점이 있습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호 안정사 석조여래좌상입니다.
불상은 원래 안동시 미질동의 이재용가(李在用家)에 있던 것을 일제 강점기에 안정사로 옮겼는데, 안동댐 조성에 의해 1973년 지금의 소장처인 봉정사로 이장하여 극락전에 별도로 안치되어 있습니다.
안정사에 있을 당시 개금을 하여 원래의 화강암 석질이 주는 중후한 맛은 느낄 수 없다고 하는데, 특히 얼굴과 손 부분은 개금마저 일부 박락되어 있어 종교상으로서의 면모를 찾아볼 수가 없으며, 현재 상대석을 제외한 연화대좌와 광배(光背 :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머리나 등의 뒤에 광명을 표현한 둥근 빛)는 상실되어 있으나 불신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입니다.

 

 

국보 15호(지정일 : 1962.12.02) 봉정사 극락전입니다. 봉정사 대웅전은 국보 제311호(지정일 : 2009년 6월 30일)이니 대웅전보다 훨씬 전에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건축시대도 대웅전은 조선 초기이나 극락전은 고려시대 후기입니다.

국사 교육을 받을 때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은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18호)이라고 배웠는데, 극락전은 현존하는 우리 나라의 목조건축 중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의 건물이라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인정되기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무량수전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는 이유로 역사책에 그렇게 기술되었나 봅니다.

 

극락전은 1363년(공민왕 12)에 대규모 지붕 공사를 다시 했다는 기록이 발견돼 적어도 고려 중기인 12~13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우리 전통 목조건물은 신축 후 지붕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기까지 통상 100~150년이 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극락전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보는 근거 중 하나라고 합니다.

 

국보 15호인 극락전은 가공석 및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과 주심포(柱心包)건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감실형으로 주벽이 토벽으로 밀폐되고 따로 낸 문얼굴에 널빤지 2장을 사용한 문짝을 달았고 좌우 협칸에는 살이 각 11개가 달린 광창이 있습니다. 공포는 외 1출목 주심포의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처마는 겹처마입니다.

건물의 내부는 바닥에 방전을 깔고 뒤쪽에만 2개의 고주를 세워 그 사이에 이동식 불단을 설치하였습니다. 불단 위에는 불상과 불화를 봉안하였는데, 그 주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 윗몸을 짜맞춘 뒤 다포식 구성을 지닌 지붕을 씌워 집을 마련하였습니다.

 

극락전이 지닌 몇 가지 특징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까지 계승된 이른바 고식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즉 기둥머리와 소로의 굽이 곡면으로 내반되어 있는 점, 대들보 위에 산 모양에 가까운 복화반대공을 배열하고 있는 점, 첨자 끝에 쇠서를 두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양식적으로 선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합니다.

 

극락전과 고금당 앞에는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삼층석탑은 극락전의 정면에 있는 고려시대 중엽에 조성된 탑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중 기단의 방형 석탑으로서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의 폭이 좁으며 각층 높이의 체감이 적당한 반면 폭이 좁아 처마의 반전이 약합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약간 둔한 느낌을 줍니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 앙화 부분은 있고 나머지는 없어졌으며, 탑의 총 높이는 318cm입니다.

2층 기단(基壇)을 쌓아 탑의 토대를 마련하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과 머리장식을 얹은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아래·위층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새겼는데, 기단에 비해 폭이 좁아진 탑신부는 각 층의 몸돌 크기가 위로 갈수록 적당하게 줄어들면서도, 폭의 변화는 적습니다. 지붕돌도 높이에 비해 폭이 좁고 두툼하며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일부만 남아있습니다.

 

 

 

봉정사 극락전의 경우에는 아미타불을 전각의 가운데에 이동식 불단을 설치하여 그 위에 봉안하고 있고 좌우 협시보살은 모셔져 있지 않습니다. 단지 불단에는 높이 100cm정도의 아미타불만 모시고 있지만 불단의 뒤에 있는 후불탱화는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우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그린 삼존도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고종(高宗)37년인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는 가로 195cm, 세로176cm의 크기로 비단 바탕에 5cm폭의 흰 테두리를 두르고 중앙에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아난존자와 가섭존자를 그려 전체적으로는 아미타불의 관배를 감싸듯이 배치된 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좌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은 본존불을 향하여 약간 틀어 앉은 자세를 취하고 머리에는 화불(化佛)이 그려진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고 왼손은 연꽃 줄기를 잡고 있습니다. 우협시보살인 대세지보살은 관세음보살과 대칭되는 자세를 취하고 보관(寶冠)에 보병(寶甁)을 표시하고 경책을 받쳐들고 있습니다. 본존불의 두광 좌우에 합장한 아난과 가섭존자가 상반신만 표현되어 있고, 그 위로 화면의 여백없이 구름을 화려하게 그렸으며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에는 광선을 그려넣었습니다. 탱화하단 중앙에도 한덩이 구름을 그려서 아미타여래가 극락세계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극락전 왼편에서 보면 대웅전이 약간 앞으로 나와 있으며, 화엄강당 뒷면이 삼층석탑에 약간 가려지며 처마가 보이는 건물은 고금당입니다.

 

 

석조여래좌상앞을 지나다보면 삼층석탑이 보이며, 왼편으로 화엄강당 측면과 극락전 처마와 고금당과 종각이 보입니다.

 

 

고금당입니다.

보물 제449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금당은 극락전 앞 서쪽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 건물은 동쪽에 있는 화엄강당과 같은 시기에 같은 목수에 의하여 건축되어 조선시대 중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중의 하나이나 화엄강당과는 달리 기둥과 기둥의 간격이 좁고 기둥의 키가 높은 구조를 하고 있어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쌓은 축대 위에 장대석으로 낮은 기단을 만들고 주춧돌을 놓았으며,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입니다.

 

 

화엄강당과 고금당입니다.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가려진 봉정사 극락전 배흘림 기둥입니다.

배흘림은 중간정도가 가장 직경이 크고 위와 아래로 갈수록 직경을 점차 줄여 만든 기둥으로 곡선의 체감을 갖는데, 지면에서 3분의 1지점이 가장 굵은 것이 보통이나 시대에 따라서도 배흘림의 정도 차이가 있으며 건물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다시 신발을 벗어 들고 대웅전 마루를 걸어 대웅전 뒤로 갔습니다.

봉정사 입구 주차장쪽에 국화꽃따기 체험장이 있었는데, 10월에 봉정사 국화대향연이 있습니다. 국화대향연은 국화차 시음과 국화차밭 감상, 국화꽃 따기 등이 가능하며, 대웅전 뒤란에도 국화가 있었습니다.

 

 

만세루 아래로 나와 계단이 아닌 옆의 평길을 걸어 만세루와 배롱나무를 담았습니다. 여름꽃인 배롱나무꽃은 주변의 풍경을 더 빛나게 하는 힘있는 꽃입니다.

 

 

계단으로 오르다 왼편을 보면 만나는 봉정사 담장과 소각장입니다.

 

 

봉정사가 보물창고다보니 기와지붕을 한 소각장도 보물처럼 보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은행나무길이 좋은 부석사로 갑니다.

* 이 글은 봉정사 홈페이지, 봉정사 안내문, 민족문화대백과를 참고했습니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