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함께 즐거우면 더 좋지 아니한가!
마음 나누기/가본 곳

부석사가 세계문화유산 된 이유, 가보면 압니다

by 실비단안개 2018. 8. 27.
728x90

8월 15일

경북 내 안동 봉정사와 영주 부석사를 비롯해 경남 양산 통도사, 충북 보은 법주사, 충남 공주 마곡사, 전남 순천 선암사, 전남 해남 대흥사 등 국내 대표적인 7개의 산사가 지난 6월 30일 '산사, 한국의 승지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란 이름으로 한국의 13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됐습니다.

널리 알려진 다른 사찰도 많은데 일곱 곳만 세계문화유산으로 이름을 올린 이유로 산사 세계유산등재추진위원회는 '법에 규정된 전통 사찰' '산지에 위치' '국가 지정문화재 보유' '7~9세기 창건' '사찰 관련 역사적 자료의 신빙성' '원 지형 보존' '승려 교육기관 운영'이라는 기준에 모두 들어맞는 곳이 선정된 일곱 사찰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우리의 휴가지는 안동 봉정사에 이어 영주 부석사였습니다. 하늘은 맑았으며 삼복더위답게 해가 쨍쨍했습니다.

안동 봉정사에서 영주 부석사까지는 58.2km로 약 1시간 20여분 거리였습니다.

 

7월 2일 김현정의 뉴스쇼에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인 전 문화재청장을 역임한 유홍준 교수님과 전화연결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산사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김현정 앵커가 7개의 산사중 유홍준 교수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장 아름다운 산사를 꼽으라면 어떤 거 꼽으시겠어요, 하니 유홍준 교수님은 심사위원들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건 영주 부석사라고 했으며, 세계문화유산이 된 이유는 가보면 안다고 하면서 덧붙였습니다.

무량수전이라고 하는 목조 건축이 1,000년을 갔다고 하는 사실. 최순우 선생의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라고 하는. 그 소백산맥 전체가 사찰의 정원인 양 넓게 펼쳐지는 부석사에서 바라보는 경관. 그게 산지 승원이 갖고 있는 가장 큰 강점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사과꽃이 하얗게 피는 봄이 아니며 부석사 가는 길에 노란 은행잎 단풍이 든 늦가을도 아니지만 우리는 꼭 가보고 싶었던 부석사로 향했습니다. 비가 그친 후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겹겹이 그려진 산등성이를 바라보는 일도 좋으며, 일몰이 특히 아름답다는 부석사지만 우리는 여름 대낮에 부석사로 갔습니다.

부석사 주차장 근처에는 유명 사찰 입구답게 음식점과 특산물 노점상이 즐비했으며 인공폭포와 분수에서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거나 뿜어져 나왔습니다.

 

 

 

부석사 가람배치도인데 부석사 문화재도 안내되어 있었습니다.

부석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로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676년에 창건하고 화엄종을 널리 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흥교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의상 이후 혜철을 비롯하여 무염과 징효 등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으며, 1372년 원응국사가 주지로 임명되어 가람을 크게 중창했다고 합니다. 경내에는 고려시대의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조사당(국보 제19호)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건물들이 남아 있으며, 중요문화재로는 무량수전앞석등(국보 제17호)·소조불좌상(국보 제45호)·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3층석탑(보물 제249호)·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등이 있으며, 2018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부석사로 가는 길 양쪽에는 은행나무가 있으며, 은행나무 너머에는 영주 특산물인 사과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늦가을이라면 더 운치가 있겠지만 초록 그늘도 좋았습니다. 은행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다보니 얼라아부지는 양산을 접었으며 작은 아이는 저처럼 풍경을 담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사찰의 첫번째 대문격인 일주문과 범종루에 보면 산 이름이 다릅니다. 일주문에는 태백산 부석사(太白山 浮石寺) 이며 범종루의 편액에는 '봉황산 부석사(鳳凰山 浮石寺)'로 되어 있는데, 일주문 근처에 안내문이 있었습니다.

 

 

은행잎이 초록색이다보니 일주문의 단청이 화려합니다.

 

 

아래 안내도는 삼성각 오솔길을 걸어 종각근처에서 찍었는데 기록하는데 도움을 받을 것이며, 이글을 읽는 이에게도 도움을 줄 것 같아 올립니다.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는 250m이며 가을철 부석사 입구 일주문에서 천왕문 사이 은행나무 길은 전국 수녀님들이 최고 즐겨찾는 아름다운 길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8월 은행나무는 초록 그늘을 만들어 주었으며 간간이 햇살도 비추어 주었습니다.

 

 

일주문에서 200m 지점에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표지와 부석사 당간지주(보물 제255호)가 있었습니다. 부석사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의 건축물로 설법이나 법회 중임을 표시하기 위해 사찰 앞에 세우는 깃대를 당간이라 하고, 그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두 개의 돌이나 쇠로 된 버팀대를 당간지주(幢竿支柱)라고 합니다.

 

 

부석사 당간지주입니다. 높이 4.28m. 두 지주가 1m 간격으로 동서로 상대해 있는데, 마주 대하는 내측면과 바깥면에는 아무런 조식(彫飾)이 없으며 바깥면의 양쪽 모서리의 모를 약간 죽였으며, 원좌의 주변에는 몰딩(moulding : 테두리장식)과 연화문(蓮華文)을 조식하였고, 윗면 중앙에 지름 30㎝의 원공(圓孔)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고 있습니다.

 

 

 

당간지주에서 50m를 더 가면 천왕문이 있으며 천왕문에는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은행나무는 천왕문앞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천왕문 너머로 가파른 계단길이 시작되는데, 이곳의 108계단은 범종루와 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까지 이어집니다. 턱이 높은 계단을 한 단씩 오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게 되는데 멈춰 설 때마다 달라지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아 좋다!

 

 

회전문 앞에서 좌측과 멈추어 뒤돌아 보니 나무사이로 멀리 소백산맥이 보입니다.

 

 

 

회전문은 봉정사의 만세루를 들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통로로 범종루가 보입니다.

 

 

 

회전문과 범종루 사이에는 쌍탑(시도유형문화재 제 13호)이 있는데, 9세기쯤에 만든 탑으로 추측 되는데 인근 옛 절터에서 옮겨 왔다고 합니다. 쌍탑 뒤로는 상사화가 군데군데 피기도 했고 무더기로 피기도 했으며, 종무소도 있습니다. 막 제초작업을 했는지 풀냄새가 많이 났습니다. 아이들은 처음 맡는 냄새다보니 이게 무슨 냄새냐고 물었습니다. 응향각과 장경각도 보입니다.

 

 

 

 

종무소 앞에서 위를 보면 범종루와 안양루, 무량수전은 앞 건축물을 약간씩 비켜 있는데 부석사는 경사지입니다. 무량수전 지붕이 보이니 드디어 배흘림기둥에 기대설 수 있구나 하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범종루에는 봉황산 부석사 편액이 뚜렷했습니다.

부석사에는 2개의 누각이 있는데 안양루와 범종루입니다. 문의 성격을 겸한 안양루가 석축 위에 작고 날아갈 듯하게 지은 누각이라면 대석축단과 안양루 석축으로 구분되는 공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범종루는 지반에 견고하게 버티고 선 안정감 있는 건물입니다. 특히 이 범종루는 그 건물의 방향이 여느 건물과는 달리 측면으로 앉아 있습니다. 건물의 지붕은 한쪽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습니다. 팔작지붕을 한 쪽이 정면을 향하고 있고 맞배지붕이 뒤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부석사가 소백산맥을 향하여 날아갈 듯이 앉아 있는데 범종루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면 건물이 전반적으로 무거워보이기에 범종루를 옆으로 앉혀놓고 뒷쪽을 맞배로 처리하여 건물이 전반적으로 비상하는 느낌을 주고 답답해 보이지 않도록 건축했습니다.

 

 

밑에서 보면 팔작지붕인 범종루는 위에서 보면 맞배지붕입니다.

 

 

범종루에는 봉정사와 마찬가지로 목어(木魚), 운판(雲版), 법고(法鼓)가 있었습니다만 출입은 금했습니다.

 

 

범종루에서 다시 뒤돌아 보았습니다. 겹겹이 펼쳐져 있는 산등성이가 소백산맥이라고 합니다.

 

 

누각과 누각사이는 평지로 이어지는데, 범종루와 안양루 사이 평지에는 괘불 지주가 있으며 산사를 찾은 이들은 목을 축입니다.

 

 

계단위로 부석사 편액이 보이며 안양루(安養樓) 아래는 안양문이라는 편액이 있습니다.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건물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른데,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라고 씌어 있습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입니다. '안양'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하는데,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안양문으로 드니 무량수전앞 석등(국보 제17호)과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이 차오르는 듯 했습니다.

 

 

안양루옆에서 살짝 자리를 옮겨가며 먼 산등성이를 봐라 보았습니다. 겹겹이 파도치는 소백산맥의 봉우리들은 부석사의 정원이 되어 펼쳐져 있는 동시에 봉황산이 부석사를 품고 있습니다. 비가 그친후나 일몰때의 풍경이 고즈녘하며 아름답다는 소문이 돌기에 혼자 상상했습니다. 그리고 부석사를 내려 오는 길에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은행단풍이 아름다운 늦가을 비 그친 저녁에 오면 딱 좋겠다고 했습니다만, 우리집에서 영주까지 가까운 거리가 아니며 비가 내리는 날에는 안전운전을 해야 하기에 가급적 외출을 하지 않기에 혼자서 또 이런저런 풍경을 만들어 봤습니다.

 

 

 

무량수전 서쪽에는 부석사의 이름이 유래된 '뜬돌(떠 있는 돌)', 뜰부(浮) 돌석(石), 부석(浮石)이 있습니다.

이 바위에서 부석사 이름이 유래됐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사찰을 창건한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애잔한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중국에서 불법을 공부한 의상대사는 잠시 머무른 신도 집에서 선묘낭자를 만나게 되는데, 선묘낭자는 의상대사를 연모하여 마음을 바치지만, 승려 신분인 대사의 거절로 둘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자 선묘낭자는 신라로 돌아가는 의상을 보호하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됩니다. 신라에 돌아온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기 전 절터에는 산적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의상은 도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선묘낭자의 넋이 변한 바위를 하늘로 띄우고, 이 전설을 간직한 돌을 '부석'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 석등, 부석의 안내표지판입니다.

 

 

부석사 문화재 석비 전면과 후면입니다.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무량수전(국보 제18호)·소조불좌상(국보 제45호)

 

 

부석(뜬돌)을 관람하고 나오니 무량수전 마당 서편에 오래 된 배나무에 배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습니다.

무량수전(無量壽殿)입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입니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인정되기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무량수전에 비하여 봉정사 극락전이 다소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무량수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입니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인데 평면의 경우 건물 내부의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 사방에 한 칸의 외진을 두른 형식을 취했습니다. 기둥 사이의 주칸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습니다. 지붕은 팔작 형식이며 예로부터 건물의 구조는 단면에 위치한 도리의 수를 셈하여 말하는데 이 집은 소위 9량집으로 외목을 제외한 도리가 9개나 되는 큰 건물입니다.

면석과 갑석을 짜맞추어 만든 가구식 기단과 사갑석을 받치는 지대석이 돌출된 계단, 원형 주좌와 고막이를 가진 초석의 법식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기법을 계승한 것이라고 합니다.

 

무량수전은 화강석의 높은 기단 위에 남쪽을 향해 서 있습니다. 정면 중앙의 3곳에 돌계단을 두었는데, 기단의 동쪽 석면에 새겨진 명문에는 충원군의 석공인 김애선(金愛先)이 기단석을 정리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미처 확인하지 못 해 아쉬움으로 있습니다.

 

 

정면에는 각 칸마다 살창을 달고 측면은 벽으로 막았는데, 일반 사찰이 신도 출입은 측면문을 이용하는 것과 다른데 봉정사는 벽으로 막지는 않았지만 역시 정면으로 출입했습니다.

 

 

'無量壽殿(무량수전)' 네 글자가 세로 두 줄로 적힌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습니다. 홍건적의 난 때 안동으로 피신하다가 난이 끝나 귀경하면서 부석사에 들린 공민왕이 편액의 글을 써서 달았다고 합니다.

단청은 긴 세월에 다 씻겨 나갔는지 헐벗은 나무색 그대로인데, 요즘 건축한 단청이 화려한 다른 절집과 달리 단청에서 세월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무량수전하면 배흘림기둥이 자연스레 따라오는데, 미술사학자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한 몫했습니다. 최순우가 극찬한 배흘림기둥은 아래와 위는 좁지만 중간이 볼록해 항아리처럼 보이는 것이 특징으로 구조적으로 편안해 보입니다. 우리는 각자 흩어져 자신이 보고 싶은 풍경을 보고 있었기에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선 사진이 없습니다. 여느 절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창살이 봉정사와 마찬가지로 간결합니다.

무량수전에는 소조여래좌상(榮州 浮石寺 塑造如來坐像)이 동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배흘림기둥을 옆에서 다시 찍어 봤습니다. 무량수전 동편에 3층석탑(보물 제249호)이 보입니다.

 

 

 

부석사는 봉정사처럼 툇마루 없이 바로 법당으로 들게 되는데, 신도는 오른쪽 문으로 출입이 가능했습니다.

 

 

소조여래좌상(榮州 浮石寺 塑造如來坐像)은 부석사 무량수전 안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 국보 제45호 부석사 소조여래좌상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6월 28일 소조불좌상으로 변경되었다고 합니다.

 

이 불상은 진흙으로 만든 소조불상인데,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합니다. 불상 높이는 278cm이며,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일반 사찰과 달리 법당 중앙의 정면이 아닌 서쪽에 마련된 불단 위에 모셔져 동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무량수전을 나와 마당 서쪽에 서서 겹겹의 능선을 다시 보았습니다. 여기가 극락인듯 했습니다. 우리네 인생도 저 산등성이처럼 모나지않고 부드러우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시 안양루와 석등입니다.

부석사 석등은 無量壽殿 중심 앞 안뜰 중앙에 세워져 있습니다. 따라서 무량수전을 진입하기 위해 安養樓 계단을 오르면 제일 먼저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있지요. 오는 사람 맞듯 가는 사람 배웅하듯.

 

 

석등의 각 부재는 상륜부만이 일부 파손되었을 뿐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지표면에 하단부가 묻혀 대석의 하단부는 확인하지 못하였고 합니다. 하대석은 방형의 하대하석 위에 하대상석인 팔각 원구형의 연화대석이 얹혀진 구조로 이들은 각각의 별석(別石)입니다.

 

 

화사벽에 장식된 보살들은 모두 원형의 두 광이 있고 삼면관을 머리에 쓰고 연화대에 서 있는데 목에는 三道가 분명하며 수인은 양 손을 모으거나, 늘어뜨린 천의를 잡기도 하고 연꽃과 보주를 어깨와 가슴에 들고 서 있는데, 자세들이 모두 자연스러운데 이 보살들은 상의는 입지 않고 천의만 양 어깨에 늘어뜨린 상태고 하의는 군의를 입고 있습니다.

 

 

 

▲ 석등 하대석

 

 

무량수전의 동쪽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3층 석탑입니다. 이 탑은 자인당의 석불들과 함께 이웃 절터에서 옮겨진 것으로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은 전형적인 신라시대 석탑입니다.

 

 

부석사에서 1시간 30분 정도 머물렀지만 부석사의 암자는 방문을 하지 못 했습니다. 시계가 오후 2시가 가까웠기에 식구들 점심 걱정이 되었거든요. 아쉬움에 3층 석탑에서 다시 소백산맥을 바라봤으며 무량수전과 석등과 안양루를 봤습니다.

언제 시간을 다시 내어야지요.

 

 

 

부석사를 나서는 우리 식구들입니다.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아쉬움에 자꾸 뒤돌아 보게 되었는데, 부석사도 다시 가고 싶은 절집이지만 부석사로 가는 은행나무 길이 자꾸 눈에 밟혔습니다.

사과나무 과수원앞쪽에는 과일과 사과쥬스를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들고 간 생수가 동이 나기도 했지만 밥때가 지났기에 아이들에게 뭔가를 먹여야 할 것 같아 사과쥬스를 구입하여 즉석에서 마셨습니다.

 

* 이 글은 부석사 홈페이지, 부석사 안내표지판, 문화재청, 다음백과를 참고했습니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