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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가본 곳

소수서원의 백미는 낙동강 발원지중 하나인 죽계천

by 실비단안개 2018.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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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부석사 주차장의 분수대에서 휴식을 취한 우리는 점심식사를 삼겹살찜으로 하기로 하고 주소를 입력하니 약 50분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20여분 달리니 선비촌이 나왔기에 선비촌에서 멈추었습니다.

선비촌과 소수서원은 점심 식사후 관람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밥집으로 가는 중간에 선비촌이 있었다보니 다시 돌아 오느니 점심을 좀 더 늦게 먹기로 합의를 봤습니다.

선비촌과 소수서원은 입장권 하나로 관람이 가능하며, 매 월 4째주 수요일은 문화의 날이라 무료이며 선비촌에서 숙박을 할 경우에도 무료입니다. 우리는 선비촌에서 하루 묵을까 하며 검색을 하다보니 선비촌은 입실이 관람객이 모두 빠져 나가는 늦은 시간이었으며 퇴실 또한 관람객을 위해 일찍해야 했기에 무섬마을 한옥체험 1박을 예약했습니다.

선비촌에 입촌후 안내도를 한 번 훑고 입장권을 구입했습니다.

 

 

 

 

입장권을 들고 있어야 했는데, 이는 소수서원과 선비촌, 소수박물관 통합관람권이기 때문입니다. 입장을 하니 관람동선이 있었기에 허둥대지 않기 위해 동선을 따랐습니다.

 

 

선비촌에서 죽계천위의 죽계교를 건너면 소수서원입니다. 입구부터 소나무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선비촌과 소수서원 사이를 흐르는 죽계천에는 죽계교, 백운교를 비롯하여 징검다리가 있었는데 징검다리가 자연석이 아닌 듯 하니 하천 준설공사를 한 듯 합니다.

 

 

소수서원으로 가는 길의 소나무가 마치 주인인 듯 했습니다. 너른 터에 푸르게 서 있는 소나무가 장관이었으며 사이에 안축선생의 죽계별곡과 죽계구곡 주변의 유명지가 안내되어 있었습니다.

 

 

 

소수서원 입구에는 인공연못이 있는데 탁정지(濯貞池 : 마음을 깨끗하고 바르게 하는 연못)로 탁정지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겸암 류운용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 연못을 파고 대를 쌓았다고 합니다.

 

이제 소수서원으로 듭니다.

 

 

소수서원은 숙수사 절터에 세웠는데, 당간지주가 있으며 소수서원중수기적비 주변으로 단종 복위 실패로 세조 3년(1458)에 불탄 숙수사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서원에 들어 처음 만나는 건축물은 고직사(庫直舍)로 고직사는 민가형식의 건축물로 서원의 살림살이를 맡아보던 관리인이 머물던 곳으로 원래는 경내에 있었으나 1970년대 서원을 정비하면서 서원 밖으로 옮겨 지었다고 하니 서원에 들었으되 아직까지 원밖인 셈입니다.

고직사 마당은 텃밭으로 이용되고 있었으나 문은 잠겨져 있었습니다.

 

 

 

소수서원 사료관입니다. 소수서원의 연혁, 역사 등이 정리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진짜 소수서원으로 듭니다.

 

 

소수서원 안내도입니다.

소수서원 많이들 들어 봤을 텐데요 방문은 처음입니다.

소수서원은 숙수사라는 절터에 세워진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賜額書院)입니다.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유학자인 안향의 사묘를 설립한 후 1543년 유생교육을 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며, 이후 경상도관찰사 안현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했습니다. 이 시기의 서원은 사묘의 부속적인 존재로서 과거공부 위주의 학교로 인식되고 있었는데, 이황은 교학을 진흥하고 사풍을 바로잡기 위해서 서원 보급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1550년 명종은 풍기군수 퇴계 이황 선생이 상소를 올리자 '소수서원'이란 편액을 써서 하사했으며, 조정은 편액과 함께 서원 운영에 필요한 서책과 노비, 토지까지 내리는데이른바 우리나라 사액(賜額)서원의 효시입니다. '소수'는 '(유학을 다시) 이어 닦는다'는 뜻으로 당시 교육기관은 공립으로 향교와 성균관이 있었고 사립은 서당이 전부였습니다. 대학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은 성균관뿐이어서 인재 양성은 절대 부족했는데 소수서원은 '국내 첫 사립대학'인 셈입니다. 현재 사립학교에 국가 재정을 지원하는 제도도 여기서 비롯됐다고 하는데 이는 대단히 잘못된 관행같습니다.

1550년 현판을 하사받은 소수서원은 1868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입니다.

소수서원은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으며, 보물 제59호 숙수사지당간지주·국보 제111호 회헌영정 등과 141종 563책의 장서가 남아 있습니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어떻게 영주에 서원을 세웠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데요, 인삼과 인견이 유명한 풍기는 신라 때 기목진(基木鎭)이었는데 고려초에 기주(基州)로 바꾸었다가 1018년(현종 9)길주[吉州: 지금의 안동(安東)]에 예속시켰으며, 1172년(명종 2)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다시 안동으로 예속시켰다고 합니다.
1390년(공양왕 2) 다시 감무를 두고 안동의 속현으로 삼았다가 1413년(태종 13)기천(基川)으로 고쳐 현감을 두었으며, 1451년(문종 1)은풍현(殷豊縣)과 합쳐 풍기군(豊基郡)으로 승격시켰습니다.

1973년 풍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95년 시ㆍ군통합으로 영주시와 영풍군이 통합되어 새로운 영주시가 되었습니다.

 

 

서원입니다.

최초의 서원답게 조선 후대의 서원과는 달리 건물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배열된 것이 특징인데, 우선 강당 좌우에 있어야 할 동·서재(東·西齋)가 없고 4개의 재실인 일신재(日新齋), 직방재(直方齋), 지락재(至樂齋), 학구재(學求齋)가 독립적으로 산재하며, 후대의 서원처럼 누각이나 정문 같은 별도의 경계 건물도 존재하지 않고 단지 경렴정(景濂亭)이란 정자를 세워 후대 서원의 누각이 지녔던 풍류 기능을 대신하였습니다. 

 

학구재(學求齋)입니다. 학구재란 '학문을 구한다'는 뜻으로 일명 동몽재(童蒙齋)라고도 한답니다. 정면 3칸, 측면 1칸에 중앙에 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한 특별한 기법이나 장식을 사용하지 않은 평범한 남도리집이며, 홑처마의 맞배지붕을 하였습니다.

스승의 공간인 직방재·일신재의 우측 뒤편에 기단을 낮게하여 배치된 것에서 조선시대 사제지간의 정서를 엿볼 수 있으며, 중앙대청의 후면을 개방했습니다.

 

 

 

지락재와 일신재, 직방재입니다.

지락재(至樂齋)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학구재와 직교되게 하여 'ㄱ'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는데, 북쪽의 1칸에 온돌방을 설치하고 남쪽의 2칸은 3면이 모두 개방된 마루칸을 두었습니다. 위치상 동쪽의 죽계를 감상하기 위한 곳으로 보이는데 실제 담장너머에 탁정지(濯貞池)가 있으며 너머로 죽계천이 흐르는데 담장앞에는 담장너머까지 볼 수 있도록 돌단같은 게 있었습니다만 돌단에 오르지 않고도 너머가 보였습니다. 학구재보다 기단을 낮게 했습니다.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는 원장·교수·유사의 숙소 겸 집무실로 하나의 연속된 건물로 건립하여 각각 편액을 달아 구분하고 있습니다. 각각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 및 협실 앞의 툇마루로 되어 있습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강학당(講學堂 보물 제1403호)은 '백운동(白雲洞)'이란 현판을 건 명륜당(明倫堂)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중앙의 대청과 온돌방 및 마루방으로 되어 있고 대청·온돌방·마루방 주위로 툇마루를 둘렀습니다. 이 공간은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곳입니다. 외에 서원의 경판과 서적등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인 장서각(藏書閣)과 제향시 제수를 준비하거나 보관하는 전사청(典祀廳) 등이 있습니다.

 

 

이제 서원을 나서지만 우리는 후문으로 입장을 했으며 정문인 지도문(志道門)입니다. 서원을 나섰다고 하여 다른 세계가 아니라 서원과 연계된 공간입니다.

 

 

경렴정(景濂亭)은 서원 입구 우측으로 죽계를 마주하여 정면 3칸, 측면 1칸의 4면이 개방된 정자형식의 건물입니다. 자연석 기단 위에 기둥 직경과 비슷한 원형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운 단순한 구조의 건물에 수많은 당호와 시구의 편액이 촘촘하게 달려있으며, 옆에는 보호수 은행나무가 가 있고  사적 제56호 표지석이 있습니다. 표지석이 있으니 출구가 아닌 입구가 맞습니다.

 

 

소수서원 500년 은행나무 수피와 부석사 가는 길의 은행나무 수피입니다.

 

 

문화재 표지석입니다.

 

 

경렴정(景濂亭)에서 보는 죽계 건너에는 '백운동(白雲洞)', 경(敬)'자를 음각한 바위가 보이고 그 아래쪽에는 최근 복원한 취한대가 있습니다.

 

 

죽계천변 바위에는 성리학의 근본 사상인 '敬'자를 주세붕이 새겼으며, 이황이 쓴 '白雲洞'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경자 바위입니다. 세조에 의해 순흥부 주민이 학살된 정축지변(丁丑之變)때 주세붕은 수장된 원혼을 달래기 위해 '경'자에 빨간 칠을 한 후 제를 올렸다고 합니다.

1457 세조3년 10월 단종복위 거사 실패로 이 고을 사람들은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참화를 당하게 되는데, 그때 희생당한 순흥도호부민들의 시신이 이곳 죽계천에 수장되었다고 하니 죽계천은 피의 하천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 단종복위 거사 : 세조는 즉위 후 단종을 영월로, 반기를 들었던 동생 금성대군을 순흥으로 유배보냈다. 금성대군은 이곳에서 단종 복위를 꿈꿨지만 실패했고, 남자는 모두 죽임을 당할 정도로 순흥도호부는 그야말로 피바다가 됐다. 이때 많은 이들이 소수서원 앞에 있는 죽계천에 수장됐다고 한다. 순흥도호부도 폐부되고, 풍기에 흡수됐다.

 

 

경렴정에서 내려다 보면 경자바위 아래쪽에 정자 한 동이 있는데 취한대(翠寒臺)인데 죽계천과 소나무와 잘 어울렸습니다.

 

 

 

입구 소나무숲에 있는 작은 둔덕의 영귀봉(靈龜峰)입니다. 거북이 알을 품은 모습처럼 보여 영귀봉이라고 합니다.

 

 

 

영귀봉 앞쪽에도 보호수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영주 시목(市木)이 은행나무인 듯 부석사를 비롯하여 은행나무가 많은 도시가 영주였습니다.

 

 

죽계천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옛 시조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 수씩 읽으며 죽계천으로 내려 갔습니다.

 

 

 

 

소수서원으로 들때 죽계교 아래에 징검다리가 있었는데 꼭 같은 징검다리가 정문 아래쪽의 죽계천에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죽계천의 징검다리를 건너 취한대쪽을 갑니다.

 

 

징검다리 중간쯤에서 만난 죽계천입니다. 멀리 나무다리가 보이며 오른편에 취한대가 있고 왼편 언덕에 소수서원이 있습니다.

죽계교를 지날 때 죽계천은 바닥을 드러냈었는데, 취한대 근처의 죽계천은 제법 깊이가 있는 듯 노랑어리연이 덮여 있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죽계천의 시작은 어디일까 하며 검색을 하니, 낙동강 제3발원지 중의 하나가 소백산 죽계천으로, 낙동강의 

 근원은 태백산 황지, 문경 초점, 순흥 소백산이며 그 물이 합하여 상주에 이르러 낙동강이 되는데, 죽계천은 내성천 상류로 예천 용궁에 이르러 낙동강 본류와 합류한다고 합니다. 죽계천은 문장가 안축이 지은 고려가요 '죽계별곡(竹溪九曲)'의 배경지로 유명한데 저는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죽계별곡은 안축이 고려 말 1340년 경상도 상주목사가 되어 고향 순흥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노래입니다. 영조 때 순흥부사였던 신필하와 퇴계 이황도 소백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을 따라 오르내리면서 빼어난 경관 아홉 곳 마다 이름을 지어 붙였는데 왼편의 이미지에 있습니다.

 

수량이 지금보다 풍부했던 당시 죽계천을 따라 소백산이 빚은 아홉 폭의 산수화였을 죽계구곡은 소백산 국망봉 동쪽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초암골을 지나면서 순흥 배점리 금당반석에 이르는 구간으로 신축한 초암사는 의상대사가 초막 암자를 짓고 살았던 터라고 전해지는 비좁은 터에 지은 절이라고 합니다.

초암골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죽계 물은 크고 작은 암석을 감아 돌며 굽이쳐 흘러내려  순흥땅에 조선 성리학 시대를 연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紹修書院)을 낳았습니다. 죽계천이 서원을 안고 도는 곳에 노송들과 수령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풍진의 역사를 말하듯 그 옛날 선비의 기품을 빼닮았다고 하겠습니다.

선비의 인격적 조건은 생명에 대한 욕망도 초월할 만큼 궁극적인 것으로 제시되는데, 공자는 "뜻 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하여 어진 덕을 해치지 않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어진 덕을 이룬다." 하였습니다.

 

 

죽계천을 건너 취한대쪽으로 가다보니 마치 민간신앙을 연상케 하는 금줄과 사람 모양의 나무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이곳 또한 사람사는 곳이니 충분히 만날 수 있는 풍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죽계천변의 취한대(翠寒臺)입니다.

퇴계 이황선생이 터를 닦고 취한대라 이름 붙였는데 이는 옛 시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따온 것으로 푸른산의 기운과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로 취한대는 자연을 벗삼아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입니다. 정자 내부에는 주세붕 선생과 퇴계 선생 등 당대 여러 묵객들의 자연을 노래한 시판이 걸려 있습니다.

 

 

취한대에서 5분여 거리에 소수서원으로 갈 수 있는 나무다리 백운교가 있지만 우리는 다리를 건너 다시 소수서원으로 가지 않고 소수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백운교 입구에는 광풍정(光風亭)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이 정자 인근에 광풍대가 있고 광풍대는 퇴계 이황 선생이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광풍정은 4각 정자로 2002년에 세웠으며, 앞으로는 죽계가 감아 돌고 뒤로는 연화산이 에워싸고 있어 주변의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입니다.

 

* 이 글은 다음백과,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소수서원 안내판, 순흥 안씨 가문이야기 다음 카페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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