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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이야기/벚꽃 · 웅천요(熊川窯)

우리의 혼을 지키는 사람 - 웅천요 최웅택 사기장

by 실비단안개 2007.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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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이웃이라는 이유 하나로 멀리 창원에서 연 두종과 부레옥잠을 공수해 오신 베드로님, 지난 봄에 분양 받은 수련도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하였는데 숙제가 쌓이는것 같다. 때로는 한곳에 많이 짐착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그러지 못할 때도 있다. 모든것에 전문가가 될 수는 없겠지만 흉내라도 내어야 죄송함이 덜할텐데 지금 많이 죄송하다.

 

어제, 베드로님과 황토방 가는 길에서 식사를 하고 두레헌을 스쳐 '웅천요'에 갔다. 나도 가 볼 시기가 지난듯 하였는데 베드로님께서 감사하게 웅천요 방문을 원하셨기에 주저없이. (지금 비가 살풋살풋 내리기 시작한다.)

 

골짜기 한켠의 요(窯), 갈 때마다 무슨 이야깃거리가 생기겠는가. 그러나 내가 한번 방문한 곳은 갈 때마다 이야깃거리를 찾으려고 여기저기 많이 기웃거린다. 이는 장소일 수도 있고 심적인것일 수도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을 하나씩 알아가며 나의 마음 부분에 간직한다는것 자체가 기쁨이기에.

 

       

 

       

        ▲ 맞은편의 열려진 창문과 세 사람

 

웅천요는 갈 때마다 낯설다. 사람에게 낯을 많이 가리는 최웅택 사기장님과 나의 성격 탓이기도 하겠지만.

보통 묵인하에 여러 모습을 담지만 사기장님과 마주앉아 말씀을 나눈다는건 아직도 어려운 부분이며, 그동안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눈 분들은 연수를 하시는 분들이었다. 궁금한것 또한 그분들에게 여쭙고. (나무오리 님의 소식이 궁금하네.)

 

어제는 웬일인지 전시실이 열려 있었지만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 오려니 사기장님께서 차나 한잔하자며 전시실로 안내를 하여 좀은 불편하였지만 애써 편안한척하며 베드로님과 함께 전시실로 갔다. 맞은편의 넓은 창문이 열렸지만 그 자리에 있던 "작품은 어디에 있나요?"하며 여쭙지는 못하였다. 여전한 쑥맥!^^

 

바깥의 온도를 내려주는 전시실의 바람이 더없이 고마웠으며, 몇번이나 본 전시실의 사진들과 작품들을 읽었다. 다행인것은 베드로님께서 찻사발과 도자기에 대하여 박식하여 처음의 어색함이 사그러들었다.

두분의 대화와 아주 큰 찻사발의 차를 마시며 제법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동안 알지 못한 부분을 어제 알게 되었는데 감사한 일이다.

 

대화중에 내 친구 이야기도 하였다. 고향 친구의 친구가 최웅택 사기장님이며 며칠전에 친구를 만났다는 말씀도 주셨으며, 나의 웅천도요지 방문을 알리니 도요지의 대나무에 대한 말씀을 주셨는데, 이 대나무는 일본에서 가져와 심었다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우리 도공들의 혼이 잠든 공원묘지에서 가지고 왔으며, 우리의 무궁화 몇주를 그 공원묘지에 심었는데 잘 자라더라는 이야기도.

교포 중 한분이 해마다 많은 나무를 기증하여 진해시 일원에 심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가까운 분이 생면부지의 그것도 400 년이 넘은 일본으로 끌려간 혼을 위하여 그 혼이 고향의 산하를 느낄 수 있도록하며, 우리의 무궁화를 일본에 심었다는 말씀에 숙연해졌다. 해마다 벚꽃축제때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다. 벚꽃은 일본의 잔재라고.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의 찻사발을 재현하는 분이 무궁화를 일본의 공원묘지에 심었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지역의 축제를 폄하하는 일부 사람들을 보면 때로는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드는게 개인의 생각이다.)

아래의 글은 지난해(2006년) 8월 23일에 방문하여 올린 게시물 중 부분이다.

 

400여년전에는 진해란 지역명이 없었으며, 진해, 웅천, 웅동을 웅천현이라고 하였는데, 임진왜란을 공부하다보면 나오는 지역이며 아직도 일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장이 웅천이다. 안타까움이랄까, 웅천중학교, 웅천고등학교가 교명을 변경하거나 폐교되었다. 역사적인 고장인데 지역민의 짧은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나름 이곳저곳을 다니며 웅천에도 분명 요(窯)가 있겠지하며 살폈지만 만나지 못하였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국보가 된 웅천요의 차사발 외에 '진주사발'도 국보가 되었다는 것을 양산의 한 요의 이갸기를 읽으면서 알았다. 진교에 요가 있다는 것은 오래전에 알았지만, 진주사발이 일본의 국보가 되었다는 사실도 얼마전에야 알았다.

 

나무오리님이 필요한 자료와 사진은 사용하라고 하여 야후에 접속을 하니, 생각외로 많은 자료들이 있었다.

 

 

웅천 차사발의 유래와 특징                                       웅천 사기장  최웅택

웅천차사발을 탄생시킨 웅천도요지는 조선시대(15~16세기)분청사기를 생산하던 곳으로 진해시 웅천 보개산(점골)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500여년전 웅천 제포항을 개항하여 일본에 수출한 차사발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진웅천, 귀웅천, 후웅천으로 구분되며 우리의 분청사기인 차사발이 일본으로 건너가 차그릇으로 사용되면서 고려차완이라고도 불리우고있다.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깝고 우리의 선진문화가 일본에 큰영향을 미쳤음은 역사적으로 고증된 사실이며 특히 16세기부터는 우리나라 자기류가 일본에서 차완으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그 중 웅천차사발의 하나가 일본 국보(기자에몬 이토)차완으로 지정 되었다는 학설이 있음은 우리나라의 찬란한 도예문화의 유산이며 진해의 자랑거리가 아닐수없다.
웅천차사발은 그릇의 선이 아름답고 단아하며 허리부분이 깊은 질그릇으로 원형이며 그릇의 끝부분이 젓혀있고 그릇안쪽에는 둥근 차앙금 자리가있어 다른 차사발과 구별이 되며 일본차인들은 그것이 작고 뚜렷하게 있는 것을 중히 여긴다.
사발 입시울이 되바라지고 허리에서 몸통에 걸쳐 둥글게 부풀고, 굽은 높고 크게 깍았으며 굽바닥에서 몸통까지 다소 두껍게 성형 되어있다. 소지는 흰색 흙, 붉은 흙을 같이 쓰고 있으나 흰색 흙을 더 많이 사용했다, 잿물빛은 비파색과 회백색을 기조로하고 있지만 산화와 환원의 작용에 따라 사발마다 색의 변화가 많다.
특히 웅천차사발에는 그릇의 태토를 숨기지 않는 솔직함과 당당함이 느껴지고 덤벙 담그는 잿물과정에서 구김살없는 유아적 천진함마저 느끼게한다. 어떤 기교와 장식도 하지않고 무심으로 빚어 만들어 놓은 차사발에는 자연미와 격에 맞는 형식이 차사발에 담겨지며 자연스런 아름다움이란 오랫동안 숙련된 기술과 체험에서 우러나오며 도공의 손재주가 아닌 마음으로 빚은 그릇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일본의 국보 이도다완을 낳은 웅천 가마
                최웅택 (웅천 사기장)
웅천 옛가마터는 경남 진해시 웅천 보배산 147번지 정골(井谷)계곡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상남도 지방 문화제 1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가마의 활동 시기는 1500년 초부터 시작하여 1598년을 끝으로 폐요가 되었다. 가마의 경사각은 15도 정도이며 자연석과 점토를 사용하여 가마 벽과 아치를 만들었고, 바닥은 계단식이 아닌 경사각을 가진 속칭 "누울가마"이다. 이곳에서 도예업을 하던 선조 도예인들은 1598년 (선조 31년) 조선군의 선전으로 왜군이 패퇴할 때 이곳 웅천 정골 가마터에서 사기장을 포함한 가족 등 125명은 일본 히라도 섬의 영주인 "마스무라 시게노부"에게 납치되어 일본 히라도 섬으로  끌려갔다. 납치되어 간 사기장 중 대표는 "거관"이라는 도예가로 전해온다. 그곳에서 고향을 그리며 도예업을 하다 숨진 조선 웅천 도공의 공동묘지에서 망국의 한을 안고 떠도는 원혼을 달래는 조선 웅천 선조 도예인 추모제를 매년 10월에 일본 히라도에 가서 본인이  올리고 있다.

웅천 옛가마터는 차사발의 명품 중에 명품이라고 일컫는 이도(井戶)다완의 제작처라 생각된다. 인근에 조선시대 대일 무역항인 제포항이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수출품 도자기를 생산했던 민요가 있었으며, 흙과 물 그리고 소나무 장작, 바람 ,지세등 자연적 입지를 겸해 이도다완 생산지로 최적합지라 생각된다.
 조선 초 태종 7년 (1407년)에 교린정책으로 일본과 통상을 하게 될 때 개항을 한 무역항인 제포를 통하여 많은 웅천 정골에서 만들어진 사발들이 수출 되였다. 또한 삼포에 한동안 일본인의 거주를 허용했을 때, 약 2500명이  제포에 거주하였다. 이때 찻사발 수요 또한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또한 제포의 냉이개 마을에 일본 사원 (사찰)이 11개가 있어 이곳 승려들에게 많은 차사발이 필요했고 ,일본과 왕래하는  일본인들의 주문도 많았으므로 웅천 가마에서는 찻사발의 수출도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 웅천 도요지가 있던 정골(井谷)이라는 지명이 제포 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게 "정골사발"이라고 알려져 있었고,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가 이도(井戶)라고 명명되어진 것이라 추정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확실한 근거로 일본 국보를 낳은 웅천 옛가마에서 만들어진 대이도차완의 굽 50점을 1차로 공개한다. 본인이  20여 년 간 연구자료로 소장하고 있다가 최초로 "차의  세계"의 지면을 통하여 공개한다.
(출처 : 사기장님의 블로그에서)


 

이후에도 나는 웅천요를 몇번 더 방문하였으며, 웅천도요지에서 나름 사금파리를 찾아보기도 하였는데, 사금파리는 없었다.

 

       

        ▲ 최웅택 사기장님은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월간지등에서 인터뷰를 요청할 시엔 사기장님의 모습을 올리

            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허락하시고.

 

       

        ▲ 웅천도요지에서 발굴 된 사금파이와 400 여년전 조선 도공의 작품

 

웅천도요지 복원 예산이 편성되었다는 소식과 조선 시대의 가마는 지금의 가마같지 않고 굴처럼 땅을 판 가마였다고 하셨으며, 그 넓이는 사람이 겨우 드나들 정도였단다. 현재 웅천도요지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데, 하루 빨리 복원이 되기를 바라며, 도자기와 찻사발에 관심 있는 분들의 방문도 기대한다. (내가 웅천 도요지를 방문하였을 때, 가마터는 계단식이었는데, 이는 형식상 그렇게 만들어 둔 것이라고 하였다.)

 

       

        ▲ 일반 가정의 대접 크기의 찻사발이다. 몇번 나누어 차를 마셨다.(카메라의 줄에 걸려 찻사발이 다칠까 염려가 되신

            사기장님께서 카메라의 줄을 거둬주었다. ㅎㅎ)

 

       

        ▲ 전시장 내에는 일본에서 회수한 조선 도공의 작품이 있으며, 최웅택 사기장님은 하나씩, 조금씩 우리 찻사발을 회

            수하고 있다.

 

내게 조금의 여윳돈이 있다면 무엇을 할까?

불로소득을 좋아하지 않기에 그럴 여유는 없겠지만. 여윳돈 타령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의 억지이기도 하다.

어제 오후부터 밤, 오늘 오전까지 많은 생각으로 마음을 뒤척였다. 하여 집안일이 멈추었고.

 

모든 일은 내 마음이 움직였을 때 하는 일이 보람이며 기쁨이다. 사기장님의 모습은 언제나 작업꾼 모습이다. 이분이 티셔츠 한장 마련할 여유가 없어서 찢어진 티셔츠 차림일까.

일본에 건너 간 조선의 찻사발을 회수하려면 만만찮은 경비가 들텐데 그것을 멈추지 않는 이가 최웅택 사기장님이다.

숙명으로 하는 일, 가장 아름다운 삶 같다.

 

굳이 유명해지려고 하지 말자. 우리 끼리면 어떤가?

 

 

 

 ☆.. 닮은 두분 -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신 베드로님과 최웅택 사기장님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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