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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께 즐거우면 더 좋지 아니한가!
고향 이야기/진해 풍경

가을을 듣습니다.

by 실비단안개 2008.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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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는 풀벌레 소리가 하도 좋아, 어두운 나무 사이에서 동영상으로 풀벌레 소리를 담았는데, 편집을 하고 보니 도로의 차 소리가 들리더군요. 그래도 담는 그 순간은 참 행복했습니다.

가을의 소리가 풀벌레 소리 뿐이겠습니까.

 

소리없는 풍경입니다.

그러나….

 

 

향수(鄕愁)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원문입니다.



 

 

 

사랑굿 1 / 김초혜

그대 내게 오지 않음은
만남이 싫어 아니라
떠남을
두려워함인 것을 압니다

나의 눈물이 당신인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
감추어 두는 숨은 뜻은
버릴래야 버릴 수 없고
얻을래야 얻을 수 없는
화염 때문임을 압니다

곁에 있는 아픔도 아픔이지만
보내는 아픔이 더 크기에
그립고 사는
사랑의 혹법(酷法)을 압니다
두 마음이 맞비치어
모든 것 되어도
갖고 싶어 갖지 않는
사랑의 보(褓)를 묶을 줄 압니다.


(사랑굿 1, 문학세계사, 1985) 



 

 

가을에 / 정한모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 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微笑)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내 전설(傳說)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 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 말씀이
영원(永遠)히 아름다운 진리(眞理)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病席)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墜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恐怖)의 기억(記憶)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시집 여백을 위한 서정, 1959)

 

 

오래된 가을 / 천양희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 본 적이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홀로
울어 본 적이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해 본 적이 있는가.

한 잎 낙엽같이
버림받은 기분에 젖은 적이 있는가.

바람 속에 오래
서 있어 본 적이 있는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이 있는가.

증오보다 사랑이
조금 더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런 날이 있는가.


가을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
보라,
추억을 통해 우리는 지나간다.



 



가을 강물 소리는 / 이향아

이제는 나도 철이 드나 봅니다, 어머니
가을 강물 소리는 치맛귀를 붙잡고
이대로 그만 가라앉거라, 가라앉거라
타일러 쌓고
소슬한 바람 내 속에서 일어나
모처럼 핏줄도 돌아보게 합니다
함께 살다 흩어지면 사촌이 되고
다시 가다 길을 잃어 남남이 되는,
어머니,
가을 강물 소리에 귀기울이다가
지금은 내왕이 끊긴 일가친척을 생각하게 됩니다
가고 가면 바다가 벼랑처럼 있어
거기 함께 떨어져 만난다고 하지만
죽어서 가는 천당처럼 아득하기만 합니다

가을 강물을 보면 문득 용서받고 싶습니다, 어머니.
즐펀히 너브러진 물줄기가 심장으로 고여서
땀으로 눈물로 이슬 맺는 은혜
가을 강가에 서서
나는 모처럼, 과묵한 해그림자 갈대그늘을
따라가면서 잠겨들면서
내 목숨 좁은 길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강물 연가, 나남, 1989)


 



달·포도·잎사귀 / 장만영

순이 벌레 우는 고풍(古風)한 뜰에
달빛이 조수처럼 밀려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 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 넝쿨 아래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시건설'창간호, 1936.12)

 



가 을 / 김현승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깍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寶石)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첫시집 '김현승 시초' 1957)



 



고향길 / 신경림

아무도 찾지 않으려네
내 살던 집 툇마루에 앉으면
벽에는 여직도 쥐오줌 얼룩져 있으리
담 너머로 늙은 수유나뭇잎 날리거든
두레박으로 우물물 한 모금 떠마시고
가윗소리 요란한 엿장수 되어
고추 잠자리 새빨간 노을길 서성이려네
감석깔린 장길은 피하려네
내 좋아하던 고무신집 딸아이가
수틀 끼고 앉았던 가겟방도 피하려네
두엄더비 수북한 쇠전 마당을
금줄기 찾는 허망한 금전꾼되어
초저녁 하얀 달 보며 거닐려네
장국밥으로 허기를 채우고
읍내로 가는 버스에 오르려네
쫓기듯 도망치듯 살아온 이에게만
삶은 때로 애닯기만 하리
긴 능선 검은 하늘에 박힌 별 보며
길 잘못 든 나그네되어 떠나려네 

 



사향(思鄕) / 김상옥

눈을 가만 감으면 굽이 잦은 풀밭 길이,
개울물 돌돌돌 길섶으로 흘러가고,
백양 숲 사립을 가린 초집들도 보이구요.

송아지 몰고 오며 바라보던 진달래도
저녁 노을처럼 산을 둘러 퍼질 것을.
어마씨 그리운 솜씨에 향그러운 꽃지짐.

어질고 고운 그들 멧남새도 캐어 오리.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감았던 그 눈을 뜨면 마음 도로 애젓하오.


 

 

희망을 위하여 / 곽재구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팔을 놓지 않으리
너를 향하는 뜨거운 마음이
두터운 네 등 위에 내려앉는
겨울날의 송이눈처럼 너를 포근하게
감싸 껴안을 수 있다면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져
네 곁에 누울 수 없는 내 마음조차 더욱
편안하여 어머니의 무릎잠처럼
고요하게 나를 누일 수 있다면
그러나 결코 잠들지 않으리
두 눈을 뜨고 어둠 속을 질러오는
한세상의 슬픔을 보리
네게로 가는 마음의 길이 굽어져
오늘은 그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네게로 가는 불빛 잃은 발걸음들이
어두워진 들판을 이리의 목소리로 울부짖을지라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손을 풀지 않으리. 

 



들길에 서서 / 신석정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림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문장 5호, 1939.6)



 

 

길 / 정희성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고무신 / 장순하

눈보라 비껴 나는
─全─群─假─道─

퍼뜩 차창(車窓)으로
스쳐 가는 인정(人情)아!

외딴집 섬돌에 놓인
하나

세 켤레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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