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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이야기/진해 풍경

금수현의 '안골 음악촌' 복원 소문의 진실

by 실비단안개 2008.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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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포스트에는 두 개의 음악이 있으니 한 곡은 일시정지하여 주세요.

 

"안개님, 금수현 음악당을 아는기요?"

"아니요, 금수현 음악당이라니요?"

"어, '그네'의 금수현이 안골에 잠시 머물렀고, 그 집 이름이 '금수현 음악당'이라카네. 진해시에서 그걸 복원해서 문화 관광지로 활용한다카는 소식이 있더라."

"그래요, 그럼 음악당을 찾아야지. 주소는요?"

"그냥 안골이라는 것만 들었소."

 

봄에 김씨아저씨와 나눈 대화다.

그리고는 바쁘게 지내다보니 안골을 방문 한다는 게 미루어졌는데, 며칠전 안골왜성 방문과 함께 '금수현 음악당'에 관심을 가지고 추적(?)에 나섰다.

 

진해시청 문화관광과에 자료를 요청하려고 연락을 하니, 진해시에서는 그런 계획이 전혀 없다는 답변이었기에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야 했는데, 진해고등학교 동창회 카페에 경남신문 기사가 있었다.

아래는 경남신문의 기사 중 부분이다.

 

그 노래의 고향 진해의 아름다운 포구를 아시나요 [2007년 11월 23일 금요일]

 

금수현 음악혼 '안골포'관광지로

'안골음악촌' 복원 가곡비 건립 내년 4월 기념음악회 추진

진해시가 금난새의 부친인 작곡가 고 금수현(1919~1992)의 가곡 ‘안골포’와 그 배경이 된 ‘안골음악촌’을 관광지로 꾸밀 계획이다. 안골음악촌은 진해시 안골동 115-1 일원 안골왜성 밑자락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금수현씨가 음악제를 열 바닷가 땅을 전국에 걸쳐 알아보던 중 1979년 5월께 이 부지를 매입, 건물을 지어 ‘안골음악촌’을 운영하다 92년 8월 31일 금씨가 사망하자 운영이 중단됐다. 주민등록상 고인은 음악촌에서 90년 7월부터 92년 8월까지 거주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최근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 진해시는 내년 4월 진해군항제 기간 중 야외공연장 또는 안골왜성에서 진해시립합창단이 주관하는 ‘가곡 안골포 기념음악회’를 열고 또 금씨가 사망한 날짜인 8월 31일 안골포 가곡비를 건립할 계획이다.

또한 2009년부터 시민회관 대공연장에서 전국 초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가곡 안골포 전국학생 가곡경연대회’를 개최하고 2009~2013년까지 ‘안골음악촌 복원사업’과 ‘안골 음악당 건립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고 금수현 씨는 1919년 7월 22일 부산에서 출생, 부산상고와 일본 도쿄음악대학을 졸업하고 경남도립극장장과 영필하모닉관현악단 이사장, 작곡가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그네’, ‘심봉사의 노래’ 등을 작곡했다.

 

강태구 기자

Copyright ⓒ 경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입력 : 2007년 11월 23일 금요일

 

위 기사를 인쇄하여 어제 진해시청 문화관광과를 방문하여 담당자를 만났는데, 담당자는 안골 음악촌 복원 이야기가 기사화 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기사에 의하면, 올 4월 군항제 기간에 이미 기념음악회가 열렸어야 했는데, 올 4월 군항제 기간에 음악회는 없었다.

담당자에게 기사가 송고 된 날짜를 보여주고 차후 계획을 물으니, 음악촌이 주변의 공사 관계로 예전의 정서를 느끼기에는 부족하여 복원 계획이 없다고 하였다.

그럼 이 기사는 어디에서 흘린거냐고 물으니, 잘은 모르겠지만, 잠시 이야기는 나왔지만 기사화가 된줄 몰랐다고 하였기에 그럼 경남신문의 오보군 하니까, 말끝을 흐렸다.

 

금수현은 불명의 가곡 '그네'의 작곡가며, 작사자는 여류작가 '김말봉'이다.

 

금수현(1919.7.22.김해 - 1992.8.31.서울)

금수현은 1919년 김해군 대저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정미업을 하는 넉넉한 집안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소질이 있어 개별 지도를 받아야 했다. 그는 부산 제2상고(부산상고)와 일본 동경음악대학 성악과를 나왔다. 1941년 귀국하여 부산극장에서 독창회를 갖는다. 초창기 부산 음악계의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서 활동했다.

1946년에 <그네>로 악계에 등장하였다. 작품에 가곡 <팔일오(8·15)>, <한산섬>, 오페레타<피리와 칼>, 희곡<페스탈로치>가 있으며, 저서에 수필집 《거리의 심리학》 이 있다.

 

금수현의 가족들은 한글 이름이다.

1950년대는 한글로 이름을 쓰는 예는 귀한 일이었는데, 그의 아들 금난새, 금노상이란 순 우리말 이름도 아버지 금수현이 지어주었는 데, 그의 한글 사랑은 특별나다.

부임해온 경남여고에 교사 18명 가운데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절반이었는데, "김 선생!" 하고 부르면 한꺼번에 돌아보는 일이 생겼다. 이를 계기로 우리 한글 성씨를 개척한다는 뜻에 김을 금으로 바꾸었다.

부인은 김말봉의 의붓딸 전혜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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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창욱·동의대 강사(음악사)

 

금수현(1919~1992)
- 오선지 같은 세상 그에겐 좁았다.
금수현 하면 으레 떠오르는 노래가 바로 1947년에 지은 '그네'다. 이 노래는 결이 고운 모시 한복을 단아하게 차려입은 처녀가 평화롭게 그네 타는 풍경을 그린 가곡이다. 전통적인 3박자에 향토색이 짙은 이 노래는 오래 전부터 중·고교의 교과서에 실려 있으며,노래가 담긴 레코드만도 20여 종이나 되는 한국인의 대표적인 애창곡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한 번 이상씩은 불러보았거나,쉽게 흥얼거리는 노래다. 그러나 금수현이 '그네'를 작곡했다는 사실은 그의 수많은 업적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는 70여 년을 살면서 음악 관련 일뿐 아니라 한글전용운동과 잡지발행 등 여러 방면에 걸쳐서 수많은 활동을 펼쳤다. 때문에 진정 그는 초창기 부산 서양음악 문화의 개척자였으며,나아가 한국 서양음악계에 디딤돌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금수현은 1919년 7월 22일,부산 강서구 대저 1동 전금(全金) 마을에서 김녕김씨(金寧金氏) 충의공파(忠毅公派)의 26세손으로 태어났다. 정미업과 땅콩재배를 했던 아버지 김득천(金得千)의 3남 1녀 중 장남이었다. 소년시절 그는 독실한 불교 집안의 비교적 유복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소년 금수현이 음악에 입문하는 계기는 초창기 서양음악가들이 대부분 기독교 문화를 통해 음악에 입문한 것과는 달리,초등학교 학예회 때 김두성(金斗星) 담임 선생님의 칭찬에 크게 고무되어서였다. 이런 인연으로 낙동강변에 노래비가 세워졌다. 하지만 금수현은 사업가나 금융가로 키우려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부득이 하게 부산제2상고(현재 부산상고)에 입학했으나,음악에 대한 꿈을 결코 저버릴 수 없었다.

마침내 아버지를 설득시킨 그는 졸업과 동시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동양음악학교 본과에 성악전공(바리톤)으로 응시했다. 그가 이 학교를 지원한 것은 비록 희망했던 작곡과는 없었지만,사립으로 꽤나 전통이 있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졸업 후 청년 금수현은 호시 유메지(星夢二)로 창씨개명하고,아사쿠사(淺草)의 국제극장 내 마츠다케(松竹) 오페라부 합창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으로 전운이 감도는 어수선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오페라단이 해체되는 등,그의 활동무대는 여의치 않았다. 이에 그는 1941년 5월 마침내 조선으로 영구 귀국했다. 

고향에 돌아온 금수현은 맨 먼저 부산좌(지금의 부산극장)에서 독창회를 갖고,친구들과 노래극을 만들어 김해 마산 삼천포 통영 등지를 순회 공연했다. 1942년 4월에 동래고등여학교 음악교사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 재직할 당시 소설가 김말봉(1901~1961)의 딸 전혜금(全蕙金)을 만나 1943년 10월 27일 백년가약을 맺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혜금은 동래고녀를 졸업하고,인천에서 교편을 잡던 그의 제자였다. 김말봉은 그녀의 의붓어머니였는데,이런 인연으로 1947년 작곡한 그의 대표작 '그네'는 김말봉이 시를 지었다. 해방이 되자 금수현은 건국준비위원회 경남도위원회 문화위원으로 위촉되었다.

27살의 최연소 건국준비위원회의 도위원으로서 해야 할 첫 임무는 관악대와 혼성합창단을 만드는 일,'독립'이라는 오페레타를 작사·작곡하여 연습하는 일 등이었다. 그러다 그 해 10월 금수현은 동래고녀에서 경남여고 교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무렵 경남도 학무국장이자,신설된 부산사범학교 교장이었던 윤인구(尹仁駒,부산대 초대 총장)의 요청에 따라 '8월 15일'이라는 행진곡풍의 노래를 작곡했다.

'죽음의 쇠사슬 풀리고 자유의 종소리 울린 날'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학생들이 쉽게 부를 수 있는 행진곡풍이었다. 이 노래는 곧바로 프린트가 되어 모든 학교에 배포되었으며,부산방송국에서는 작곡자 자신이 매일같이 노래지도를 하면서 보급했다. 진정 부산은 이제야 온통 '8월 15일'이었다. 당시 술집 접대부들도 이 노래를 젓가락을 두드리면서 불렀으며,손님들도 이구동성으로 함께 노래하면서 해방의 기쁨을 맘껏 누렸다.

금수현은 부산의 음악인과 음악교사들을 중심으로 1946년 '경남음악협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이 협회는 경남에 음악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조직되었는데 교육음악부,성악부,기악부,작곡부의 4부문으로 구성되었다. 음악 인구의 저변 확대를 꾀하기 위해 경남음악콩쿠르대회,음악주보 발간 등을 수행하였다.

1946년 제1회 경남음악콩쿠르대회가 경남여고 강당에서 열렸다. 이 콩쿠르는 해방 이후 전국에서 처음 시도된 것인데, 경연대회의 전범이 되었다.

한편 경남음악협회는 해방 후 첫 음악간행물인 '음악주보(音樂週報)'를 정기적으로 펴냈다. 8절지 1매(4면)를 프린트한 것이었는데,음악계의 주요 뉴스와 교재용 노래 1곡을 실어 부산과 경남의 각 학교에 배부했다. 특히 주보는 매월 3원의 유가지였는데도 희망 학생이 많아 매주 2천 부를 찍어야 했다. 이 경험으로 1951년 금수현은 대청동에 새로이출판사를 차려 일반도서 및 악보출판을 시도했다. 1970년에는 음악잡지 '월간음악'을 창간했으며,1992년까지 무려 22년 동안이나 발행함으로써 척박했던 한국음악계의 디딤돌 역할을 다했다. 

1947년 금수현은 경남도립극장의 극장장으로 취임하자 한국의 쟁쟁한 음악가들을 불러와 매달 1회의 '희망음악회'를 열었다. 이 음악회는 희망하면 누구나 무대에 섰으며,곡목은 청중의 요청에 따라 조정되는 독특한 형태였다. 1년 후 극장장직을 그만둔 그는 '새들예술원'이라는 음악극 공연단체를 만드는 한편,교단으로 복귀해 부산사범학교의 교감이 되었다.

1949년에 그는 음악인뿐만 아니라 문화를 사랑하는 30여 명을 모아 '노래하자회'를 조직하고,매월 쉬운 새노래를 만들어 미공보원에서 청중들과 함께 부르는 개창운동을 전개했다. 공교롭게도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날은 경남음악협회의 제5회 경남음악콩쿠르가 동광국교 강당에서 열리는 날이었다. 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많은 인원이 참가했던 음악콩쿠르는 잇따라 전해오는 전쟁소식에 본선을 치르지도 못한 채 아쉽게도 해산되고 말았다.

1952년 금수현은 34살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경남여중 교장으로 발탁되었다. 1956년 2월에는 통영고 교장을 역임했으며,1957년에는 문교부 편수관으로 6년간 근무했다. 편수관은 각급 학교의 교육과정을 정하고,국정교과서의 편찬과 검인정교과서의 검열 등을 수행하는 주요한 직책이었다. 한편 1961년 5·16 직후 금수현은 박정희 군부정권의 중앙정보부 행정이사관 시사정보실장에 발탁되었다. 이때 그는 중앙정보부의 기관지 '양지(陽地)'의 발행일을 맡기도 했다.

곧 공화당이 조직되자 중앙상임위원이 되어 부산 동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으나,처참하게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일생일대의 외도이자,최대의 실패였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금수현은 국제신보 고문을 맡아 '거리의 표정'이라는 칼럼을 썼으며,이를 '거리의 심리학'이라는 책으로 묶어 간행했다.

또 1965년 '영 필하모니관현악단' 이사장직을 맡았으며,1968년 금잔디유치원을 설립했으며,1970년에는 '월간음악'을 창간했다. 그리고 1972년 음악저작권협회 회장,1982년 한국작곡가협회 회장,1982년 한성로타리클럽 회장 등을 지냈다. 그는 필생의 작품인 오페라 '장보고'를 3년여의 각고 끝에 완성하고 난 후,당뇨합병증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92년 8월 31일,73세로 세상을 떠났다. - 글 : 김창욱·동의대 강사(음악사)

<글출처: 웹사이트> 


금수현의 대표작 그네는, 1941년에 작곡되었으며, 멜로디는 단순하고 온음계만을 사용하고 있지만 서정과 낭만이 넘친다. 5월 단옷날 처녀가 그네를 타는 멋있고 낭만적인 모습이 저절로 떠오르는 곡이다. 9박자로 되어 있어 한국 민요가 지닌 3박자의 변용을 느끼게 하며 한국적인 정서를 풍겨 준다.

 

시 : 김말봉
곡 : 금수현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나가 구름속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 양 나래 쉬고 보더라


한번 구르니 나무끝에 아련하고
두 번을 거듭 차니 사바가 발 아래라
마음의 일만 근심은 바람이 실어가네

 

(모두 따라 부를 수 있도록 피아노 연주곡으로 구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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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말봉,

김말봉의 이름을 익힌지는 아주 어릴 때였다. 당시 낡은 책장에는 김말봉의 '찔레꽃'이 꽂혀있었는데, 그 두께에 질려 나는 한번도 열어보지 않았지만, 김말봉, 찔레꽃, 그네, 금수현, 금난새 - 이렇게 이어졌다.

 

김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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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말봉(1901. 4. 3 부산~1962. 2. 9 서울.)
소설가.
남녀의 애정문제를 주제로 한 통속소설을 주로 썼으며, 여성의 심리묘사가 뛰어났다. 본명은 말봉(末鳳). 1918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황해도 명신학교에서 1년간 교원으로 근무,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등학교를 거쳐 교토에 있는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1929년 귀국하여 〈중외일보〉 기자로 취직할 때까지도 문학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뒤 기자생활을 하면서 쓴 탐방기나 수필이 주위에서 좋은 반응을 보이자 소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3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보옥'(步玉)이란 이름으로 응모했던 단편 〈망명녀〉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35년 〈동아일보〉에 애욕과 금전에 얽힌 음모를 이겨내는 여주인공의 곧은 마음을 그린 〈밀림〉(1935. 9. 26~1938. 12. 25)을 연재하고, 1년 뒤 〈조선일보〉에 〈찔레꽃〉(1937. 3. 31~10. 3)을 연재하면서 일약 인기작가로 발돋움했다.

스스로 통속소설을 쓰겠다고 주장했으며, 순수문학에만 집착하는 문단에 '순수귀신을 버려라'고 했다. 첫 남편과 사별한 뒤 재혼, 부산에 살면서 소설을 썼다. 해방 후 서울로 올라와 공창폐지운동(公娼廢止運動)을 펼치면서 박애원을 경영하고, 6·25전쟁 때는 피난지 부산에서 여러 문인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상형의 남자 주인공을 연모하는 여성들의 애정관을 명쾌하고 섬세하게 그린 〈푸른 날개〉(조선일보, 1954. 3~9) 외에도 장편 〈화려한 지옥〉(1952)·〈생명〉(1957)·〈이브의 후예〉(1960)·〈바람의 향연〉(1962) 등을 단행본으로 펴냈다.

 

며칠전 녹산수문 근처를 지나는데, 김말봉 문학비가 있었다.

 

 

 '베풀며 살자' 뒷편에 김말봉 문학비가 있는데, '베풀며 살자'의 건립 년도를 떠나 이것은 결코 베풀고 사는 모습이 아니다. 차라리 나란히 세워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서 '낙동종합사회복지관'을 찾았다.

그런데 한 터처럼 보이지만, 문학비가 있는 터는 주소지가 달라 복지관에서 관리를 하지 않으며, 강서문화원에서 관리를 한다고 하였기에 강서문화원의 위치를 물으니 대저에 있다고 하였다. 대저는 금수현의 고향이다.

그러나 오전에 왜성과 안골음악촌 답사로 지쳤기에 더는 버스로 이동을 하고 싶지가 않았는데, 언젠가 한번은 부산 강서문화원을 방문할 것이다.

 

  ▲ 김말봉 문학비 - 뒷편에 주요 저서와 약력이 기록되어 있다.

 

다시 경남신문 싸이트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회원이 아니기에 기사에 댓글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복사를 바로 하는 것 보다 일단 내 메일로 받아 복사를 하려고 메일 보내기를 두 번 하였는데, 역시 실패였다.

하여 기사에 남겨진 메일로 아래의 글을 보냈는데, 아직 답은 받지 못하였지만, 위에 올린 경남신문의 기사를 바탕으로 포스팅을 한다.

 

받는 이 : tkkang@knnews.co.kr <tkkang@knnews.co.kr 

제목 : 그 노래의 고향 진해의 아름다운 포구를 아시나요

 

안녕하세요.

저는 Daum블로거 '실비단안개'입니다.

 

'안골음악촌'을 검색하다보니, '그 노래의 고향 진해의 아름다운 포구를 아시나요 [2007년 11월 23일 금요일]'를 읽게 되었습니다.

안골음악촌 복원 소식은 봄에 들었지만, 차일피일 하다보니 며칠전에야 관심을 가졌으며, 안골음악촌 답사를 하였고,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진해시청 문화관광과와 통화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담당자는 진해시는 전혀 그런 예정이 없다는 답변이었기에 어제(8월 27일) 기사를 인쇄하여 진해시청을 방문하여 담당자를 만났습니다.

 

기사를 읽은 담당자는 잠시 복원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지만(담당자가 바뀌었을 수도 있음), 현재로선 복원 예정이 없다더군요.

하여, "그럼 이 가사는 오보군요?"하니, "오보라고 하기에는…."하며 말끝을 흐리기에, "사실이 아니니 오보지요"하며 마쳤습니다.

더군다나 진해시청에서는 '안골음악촌' 복원이야기가 기사화가 된 사실조차 모르고 있더군요.(송고 날짜를 다시 보여드렸음)

기자님의 기사 사실무근을 떠나서 헛소문은 가라앉혀야 겠기에 제 블로그(http://blog.daum.net/mylovemay)에 사실을 포스팅 하려고 합니다.

하여 댓글로 알리려니 회원 가입이 되어야 작성이 가능하기에 메일로 소식을 드립니다.

 

또 기사를 제 메일로 두번 보내기 하여도 실패인데, 메일보내기가 되지 않습니다.

기사 하단의 'Copyright ⓒ 경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를 읽었지만, 포스팅에 링크만으로는 부족하여 부분 복사를 하여 올릴 예정입니다.

하니 저작권에 위배가 된다면 제 블로그나 메일로 알림을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링크는 따로 걸겠습니다.

전자우편주소 : ivy9661@hanmail.net

자료 감사드리고요, 건필하시길 바람합니다.

 

Daum 블로거 실비단안개 드림 (보낸 시간 : 08-08-28 09:54)

 

안골 음악촌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안골 마을의 몇 분 어르신께 여쭈니 아는 분도 계셨지만, 생판 처음 듣는 소리라고 하시는 분도 계셨다.

또 젊은 엄마들은 몰랐다.

금수현이 음악촌에서 90년 7월부터 92년 8월까지 거주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고 하였으니 2년이다.

굴강길을 따라 번지를 확인하며 걷다가 진성길의 110번지에서 김순상할아버지(68세)를 만나 여쭈니 비교적 소상히 알고 계셨으며, 옥상으로 올라 위치를 손가락으로 알려주기도 하였는데, 음악촌이라고 하지만, 마을 사람들과는 교류가 없었으며, 방학이 되면 제자들이 찾아 숙식을 하며 여러 날을 보내다가 가곤 하였다고 하였다. 

어제 시청의 담당자도 안골에서 특별한 음악활동은 없었던 걸로 안다고 하였다.

주소가 안골동 115번지로 나오지만, 실제 이곳은 용원에서 들기에 더 좋은 위치며, 집앞까지 차 진입이 가능하다.

 

금수현의 시와 곡인 안골포다.(낙초는 금수현의 호다)

 

안골포 / 낙초 작사, 금수현 곡

 

안골포 언덕에서 가덕도 바라보니
바다가 호수인가 호수가 바다인가
갈매기 날아가네 울면서 날아가네
고깃배 거북선인듯 그옛날이 아롱지다.

안골포 성위에서 수평선 바라보니
바다가 하늘인가 하늘이 바다인가
구름이 흘러가네 바람을 헤어가네
옛님도 가슴조인 듯 그 함성이 들려온다.

 

‘가곡 안골포’는 금수현씨가 세계적으로 문화권 국가에서 한 고장을 선정해 음악제를 열고 있는것에 착안해, 젊은 시절부터 음악인들과 협의해 우리나라에서 음악제를 열 바닷가 땅을 찾기 위해 전국을 답사했다고 했다. 그러다 안골포를 답사하고 이곳이야말로 음악가에 의한 음악제 마을을 조성할 수 있는 세계 유일한 지역으로 생각했다고. 금씨가 안골포 언덕에서 가덕도를 바라보면서 안골포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가곡 ‘안골포’는 지난 1993년 10월 KBS FM 신작가곡 1집을 통해 알려지게 됐다.

 

 음원 출처 : http://cafe.daum.net/Philharmonic

 

안골 음악촌에서 내려다보면 호수 같은 바다가 보이고 건너의 가덕도가 바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신항만 공사로 전선이 가로 막으며, 호수같던 그 바다는 매일 조금씩 줄어들고 있기에 예전의 정서는 찾을 수 없다. 비록 안골포 노랫말의 풍경 뿐 아니라, 진해의 많은 곳은 이미 옛날의 진해가 아니다.

 

안골 음악촌의 모습

 

  ▲ 안골왜성은 마을 위에 위치하는데 왼편이 안골왜성이며, 오른쪽의 길을 따라 5분여 걸으며 안골음악촌이 나온다.

 

  ▲ 왜성 입구에서 본 안골마을이며, 멀리 시루봉이 보인다.

 

  ▲ 음악촌 입구다. 대문은 잠궈지지 않았으며, 입구의 울은 마른대나무였다.

 

  ▲ 음악촌은 2동의 건물이 있으며, 입구에서 왼쪽의 건물인데, 위의 지워진 표지가 음악촌 표지 같고 그 아래에 '금수현'이란 이름이 번지 표기가 없이 남아 있었는데, 이 이름이 없다면 그 어디에도 여기가 금수현의 음악촌이었다 것을 알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 떨어져 나간 문 안쪽을 보니 창고로 쓰여지고 있었다.

 

  ▲ 오른편의 건물인데, 3가구 정도가 거주가 가능하였는데, 문은 모두 잠궈져 있었으며, 방충망 사이로 안을 보니 사람이 거주하는 것 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불러도 어디에서도 답이 없었다.

 

  ▲ 더러 물기가 있는 화분이 있었으며, 화장실은 실내에 따로 있는지 옛날의 화장실은 사용이 불가하였다.

 

  ▲ 좁은 마당에서 보는 가덕도와 용원 앞바다다.

 

  ▲ 이름표가 있는 건물 앞에는 그리 나이가 많지않은 감나무가 있으며, 집은 곧 쓰러질 듯 하다.

 

  ▲ 오른편 건물의 울은 무궁화와 아카시아였다. 사진의 왼편 길을 따라가면 안골왜성과 안골마을이 나온다.

 

진해시와 자손들이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했었던 공간이지만, 각자가 사정이 있으니 무어라 탓을 할 수는 없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또, 이 포스트는 경남신문 기사의 반박 글이 아니며, 나 처럼 '안골 음악촌'의 실체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현재 상황을 알리는 글이다.

덧)

이웃 중 어느 분이 '도미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전에 했는데,  도미의 무덤은 현재 없어졌지만, 음식점 '아라마루'아래에 있었다고 합니다. 비지정문화재였기에 관리에 소홀했었나 봅니다.

舊 안청초등학교 뒷쪽인데, 위치를 알았으니 수일 내로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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