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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사람이 있는 풍경

옛날 '바깥지개'는 없어졌지예….

by 실비단안개 2008.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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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지개, 안지개, 공개, 이실(이슬) 등은 어릴 때 부터 들어 본 지명이지만, 실제 위치는 모릅니다. 그저 '웅천 어디쯤이겠지'였지요.

도시의 주부들도 이름을 잃어 버리고 살겠지만, 시골도 마찬가집니다.

옛날에는 혼인을 하면 대부분 시댁에서 어른들과 함께 생활을 하였습니다.

 

동네분들이 저의 엄마에게 그럽니다.

"본동때기야~"

본동댁, 즉 지금 거주하는 마을이 엄마가 태어나 자란 곳입니다. 부모님은 한 동네에서 연애를 하여 혼인을 하였거든요.

큰외숙모는 공개댁입니다. 진해 시내에 계시지만, 제가 어렸을때, 한 동네에서 잠시 살았는 데, 어른들이 그러셨습니다.

공개댁이라고.

그러나 공개가 어딘지를 몰랐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동네 어르신 중에 이실댁, 지개댁도 있습니다. 요즘이야 먼 거리의 사람들과 혼인을 하기도 하지만, 옛날엔 둘레둘레에서 혼사가 이루어졌으니, 고개 하나 넘어 웅천 사람들이 시집을 많이 온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제 옛지명들이 자주 불려지지 않습니다. 젊은 새댁들은 누구 엄마로 호칭이 되며, 지명들은 한자식으로 표기가 되기에 그렇습니다.

집 앞 전봇대나 가로등에 '방메기길' 등 우리 동네의 옛지명이 몇 년전에 붙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모르는 지명이지요.

방메기길은 어릴 때 곰배를 들고 보리밭으로 가던 길입니다.

지금의 해안도로의 황토돛대 노래비가 있는 곳을 '흰둘모퉁이'라고 하였는데, 옛날에 바닷가에 흰몽돌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남문 휴게소 위의 공원을 '흰돌메공원'이라고 합니다.  옛지명을 살린 공원 이름이며 공모였습니다.

 

얼마전 안골왜성을 찾았을 때, 안골 굴강길, 진성길 등으로 표기를 해 두었더군요.

낯설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내 고장의 옛지명들입니다.

 

김달진문학관 동네가 소사입니다. 소사 위로 구천동이 있었으며, 어릴 때는 동네 오빠나 언니들이 나무를 하러 가기도 했으며, 으름 열매가 많은 골짜기였습니다.

 

지난 9월에 익지않은 분이 '아홉내' 닉으로 댓글을 주셨습니다.

아홉내면 구천입니다. 물론 흔한 지명입니다만, 진해를 소개하는 블로그에 올려진 댓글이니 여기 구천동을 칭하는 닉 같았습니다.

 

아홉내  2008.09.14 21:50

고향 천자봉 자태와 풍요로운 들녘 감상 잘 했습니다.
설에서 ,,,,웅천 바같지개 태생.. 넉넉한 가절 보내세요.

 
실비단안개 2008.09.15 06:11

아홉내면 구천인데요 -
구천동 계곡 -

지개면 괴정인가요? 그쪽은 토속적인 지역명이 많아 - 대부분의 시골이 그렇지만요.
서울이면 먼데 - 만나고 싶은 풍경이 있으면 말씀 주셔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담아 드리겠습니다.
건강하시구요.()


 

아홉내  2008.09.16 03:37
실비단안개님 추석명절 잘 보내셨지요!고향의 아름다운 정경 담는 모습 고향 후배님 같은데 태생이?
저는 물론 괴정태생이고 현제 서울에서 터를 잡고 있습니다.아홉내는 웅동 수원지 상류 아홉골짜기
서울에 웅동. 웅천. 천가. 三面 구천 향우회가 있습니다...한국의 나포리 괴정 바닷가 사진도 좀 올려주셔요,
좋은 인연이기를!!!설에서

 

실비단안개 2008.09.16 09:04
반갑습니다.
명절은 잘 쇠셨는지요?

웅동이 고향이며, 20여년 객지 생활을 하다가 다시 찾았습니다.^^

가까운 날에 지개쪽을 다녀올게요.
제덕쪽은 몇 번 담았는 데 마땅히 이을 이야기가 없어 포스팅은 포기하였거든요.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겠습니다.^^


산속에서 천사에게 홀렸다. 의 댓글 중에서. 

 

마지막 답글을 드리고 꼭 한 달만에 바깥지개를 찾아 나섰습니다.

올케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올케의 고향은 전라도 여수이니 저 보다 더 모를 수 있지만, 올케가 운전을 하기에 도움을 청한 거지요.

"오늘 몇 시에 일 가노?"

"와요, 오늘은 오후에 서류 정리만 하면 되는 데요."

"그라모 바깥지개에 좀 데꼬가자."

"전에 댓글 때문에 그라는기요? 얼른 준비하소."

 

실비단안개 블로그는 멀리 서울의 친척들에게까지 공개이며, 집안 식구들은 수시로 접속합니다.

하여 때로는 블로그의 소소한 이야기도 하는데, 따라서는 동생이나 올케의 도움으로 사진을 담으러 갈 때도 있습니다.

 

"행님아, 요가 바깥지개 맞을끼다."

올케의 말씨는 장소와 사정에 따라 다릅니다.

동향을 만나면 전라도 사투리며, 비지니스용은 표준어(몇 년간 서울에서 직장 생활), 시댁 식구나 이웃과는 경상도 말로 합니다.

예외인 경우가 있는 데, 화가 많이 났을 때나 조카들을 혼 낼 때는 전라도 욕이 막 나옵니다.

 

저를 부를 때도 사정에 따라 다른데요, 급하면 '언니야~', 예의를 갖추어야 할 때는 '시누님', 보통 때는 '행님아~'입니다.

입처럼 행동이 야무진 올케입니다.

 

올케가 차문을 내려 지나는 어르신에게 여쭈었습니다.

바깥지개가 맞다고 하네요.

"행님~ 요서부터 차근차근 찌거라~ 나중에 짐 있으모 저나하고~"

올케는 제덕 방파제 근처에서 돌아갔습니다.

 

보통 '괴정'이라하며, 마을 이름은 '제덕'입니다. 연도 섬으로 갈 때 여객선을 탔던 마을이며, 봄에 유채꽃 축제가 있었던 동네인데, 토속명인 '바깥지개'의 위치를 몰랐기에 긴가민가 하였지요.

 

아홉내님

님의 고향 바깥지개입니다.

언제쯤이면 이 풍경을 볼 수 있을까요?

 

 

제덕과 수도 사이의 바다는 매립이 되었습니다.

2006년 9월의 풍경입니다. 뭍도 바다도 섬도 아닌 그 곳

제덕에 높은 방파제가 생겼지요. 방파제가 생기기 이전의 제덕 풍경을 저는 모르며, 매립 공사 이후에 수도와 연도를 몇 번 다녀왔습니다.

 

포구는 여느 어촌의 포구와 비슷하며, 물결이 잔잔하며 평화롭습니다.

녹슨 어구들 사이를 걸어 되돌아 와, '제덕어선어협협의회'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남자 두 분이 계시기에 제 신분을 밝히고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한 분은 연도에 거주를 하시며, 한 분은 제덕마을의 어촌계장(49세)님이었습니다.

주소는 제덕으로 표기를 하지만, 어른들은 여전히 '바깥지개'라고 하며, 150여 가구에 세대수는 160여 세대이며, 주민수는 400여 명이랍니다.

 

바깥지개의 주업은 예전에는 어업이었지만, 지금은 회사원이 많으며, 상업이 주를 이룹니다.

바다가 매립되기 전에 이곳은 수도·연도 앞바다와 함께 황금어장이었지만, 매립공사와 어장 고갈, 고유가 등으로 많은 가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데, 이는 다른 농어촌과 실정이 비슷합니다.

주택은 90% 이상이 개량되어 예전의 풍경은 찾을 수 없다는 설명이셨구요.

 

연도에 거주하시는 분이 묻데요.

"옛날 지개 풍경 갖고 있는기요?"

즉 예날 사진을 보관하고 있느냐는 질문이었는 데, 마치 제가 죄인 같았습니다. 왜 일찍 내 고장에 애착을 가지지 못하였을까 싶어서요.

 

두 분이 그러셨습니다.

"옛날 지개(모습)는 없어졌지예…."

황금어장과 마을 풍경, 생활 정도 등 어느 것도 예전의 그 풍경은 아닙니다.

 

연도로 가는 여객선도 운행 횟수를 줄여 하루에 5~6회만 운행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연도 가기 : 혼자서 떠나는 연도(椽島)

 

  ▲ 제덕 <=> 연도 도선

연도(椽島)분교의 봄 풍경

 

 

 

선착장 앞으로 횟집과 낚시점 등이 있으며, 수협위판장도 있습니다. 낚시는 계절을 가리지 않지만, 연도 등으로 가는 나들이객들은 여름철에 많이 찾으며, 필요한 물건들은 제덕에서 보통 구입을 합니다.

 

 

어쩌면 님이 그리는 풍경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마을 안쪽 길을 걸으니, '괴정다방'이 있었지만, 영업은 하지 않았으며, 옆으로 '괴정상회'가 있었는 데, 판매 물품은 음료수와 소주 ·라면이 전부였습니다. 아이스크림 통이 있었지만 비워져 있었고 과자는 새우깡도 없었습니다.

이곳도 다른 농어촌과 마찬가지로 아기 씨가 마르는 중이었습니다.

 

괴정상회의 전화번호를 보아 주세요.

국번이 2국입니다.

어릴 때, 처음 전화가 들어 왔을 때 국번이 없었으며, 진해시로 편입 후에 2국을 받았을 겁니다. 웅동과 비슷한 사정이었을 테니까, 2국에서 43국 내지 44국이었다가 551국, 552국 546국 등으로 바뀌었습니다.

괴정상회는 오랜 세월 동안 간판을 한번도 바꾸지 않은 동네 안의 점방입니다.

님이 기억해 주면 좋겠습니다.

 

 

조금 더 걸으니 새미가 나왔는 데, 지붕이 있었습니다. 아주 옛날에는 지붕이 없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새마을 운동 등을 거치면서 마을 공동 우물은 지붕을 얻었지요. 지개의 공동 우물도 같은 사정으로 지붕을 얻었을 겁니다.

 

다른 마을의 새미와는 달리 이란성 쌍둥이 새미입니다.

나중에 동네 어르신께 여쭈니 바깥새미는 허드레물로 사용하며, 안새미는 지금도 식수로 사용할 정도로 물이 좋답니다. 물론 집집마다 수도 시설은 되어 있습니다.

새미는 마을이 생김과 동시에 생겼다고 하셨습니다. 어르신께서 시집을 오셨을 때부터 새미가 있었다는 말씀일겁니다.

 

 

 

언덕배기에 사당 같은 건물이 있기에 담았습니다. 문은 열 수가 없었는 데, 지붕과 담장의 이끼 정도를 보아 많은 세월을 마을과 함께 한 것 같았습니다.

 

걸어 들로 갔습니다. 백일홍과 김장배추가 밤새 내린 이슬 덕분에 선선하였으며, 수도로 가는 길이 보이고 수도가 보입니다.

 

 

산등성이라기에는 낮은 데, 마을 위로 민박이 가능한 하얀 카페가 있었습니다. 그 풍경을 담았지만, 개인 소유인 영업장이기에 올릴 수가 없는 데, 그 집 마당에는 구절초와 여러 종류의 꽃이 피어 있더군요. 사람 기척은 없었습니다.

 

 

올랐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빈집입니다.

손질 되지 못한 감나무의 열매가 지붕위에 앉아 있었으며, 텃밭에는 민들레가 태워진 쓰레기 틈에서 노란 꽃을 피웠었습니다.

모두가 떠나가도 식물들은 따라가지 못하였습니다.

 

 

 

 

그 빈집과 집 앞에는 늙은 무화과 나무가 있었으며, 열매가 더러 익었기에 몇 개를 따서 맛을 보았습니다. 딱히 허기가 지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맛을 보고 싶었습니다.

 

 

마을로 내려 오면서 담은 풍경입니다.

멀리 천자봉공원묘지가 보이며, 아래는 예전에는 바다였는데 매립을 하여 봄이면 유채꽃 축제가 열립니다.

봄에 담은 제덕 매립지의 유채꽃 축제 풍경입니다. 진해 웅천 유채꽃 축제

 

마을을 한바퀴 둘러 보는 일은 잠시였습니다.

아홉내님이 그리는 풍경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무엇이 없을까 하며 걷는 데, 할머니 한분이 나들이 차림이더군요.

인사를 드리고 나들이를 하시냐고 여쭈니 수도에 독감예방 접종을 하러 가신다더군요.

저도 시내 보건소로 갈 참이었으니 잘 됐구나 하며 할머니를 따라 나섰습니다.

 

할머니들께서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진해의 마을버스는 진해시에서 운영하는 공영버스이며, 보통 매 시간 1회 운영인데, 제덕은 웅동과는 달리 하루 7회 운영을 한다네요.

오전 11시 10분 바깥지개에서 수도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 안입니다. 젊은이는 없으며, 모두 어르신들입니다. 젊은이들은 승용차를 이용하거나 하며, 아이들은 마르기도 하였지만, 학교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공영버스가 11시 50분에 다시 수도로 온다기에 마음이 바빴습니다.

 

웅동은 보건지소가 없어졌습니다.

운영의 어려움 때문인지 시내 보건소와 통합을 하였기에 웅동의 어르신들은 몸이 불편하거나 예방접종을 하려면 시청 내의 보건소를 이용하는 데, 수도에는 다행히 보건지소가 있더군요.

예전에 이곳이 섬이었기에 섬 주민의 편의를 위한 보건지소였는 데, 통폐합에서 제외되어 운영 중이었으며, 뭍의 주민도 이용이 가능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지역이 다르기에 "혹, 웅동 주소도 예방접종이 가능한가요?"하며 여쭈니, 진해 시민이면 모두가 이용이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진해시 보건소는 예방접종 기간이면 만원이기에 오래 줄을 서서 기다린답니다.

보건지소는 보통 작은 건물 한 동인 데, 운영비가 얼마나 들기에 통폐합을 하는지 그 처사가 매우 불만입니다. 도시 사람들이야 아프면 문 밖이 병·의원이지만 농어촌은 그러하지 않거든요.

시골 어르신들의 생활은 손바닥 펼친 듯 뻔합니다.

어르신들 교통비도 생각하고 이동시의 불편과 안전도 생각해 주어야 하는 데, 우리나라의 관계자들 자신은 평생 청춘으로 살아가는 줄 아나 봅니다. 또 도시와는 달리 공영버스는 환승도 되지 않습니다.

 

아무튼 수도의 보건진료소 덕분에 줄 서지 않고 바로 독감 예방 접종을 하였으며, 버스가 오기전까지 부지런히 수도를 둘러봐야 했습니다.

참, 수도는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에 마을 입구에서 주차비를 계산해야 합니다.

 

 

수도분교를 둘러보고 바닷가로 갔습니다.

꽃단장 중인 웅천초등학교 수도분교

 

마을 입구의 오른편 방파제는 2년전에는 출입이 가능하여 해넘이를 보기도 하였는 데, 지금은 출입이 금지되었으며, 수도의 마을 오른편으로 횟집이 있습니다.

언젠가 밤에 가니 부산 다대포의 포구 풍경과 비슷하더군요.

 

횟집에는 생선회만 파는 게 아니며 각종 해산물도 판매를 합니다.

아저씨 한 분이 바지락을 씻고 계셨기에 말 걸기를 하였습니다.

 

별(☆) 다섯개짜리 정보입니다.

하니 꼭 기억하셔요.

 

먼저 바지락의 종류인데요, 아래 바지락을 보면 색깔이 다릅니다.

거무스름한늠은 '참바지락'인데, 잠수로 캐기도 하지만, 우리가 호미로 캐기도 하는 바지락인데, 크기가 천차만별입니다. 자주 캐니 자랄 틈이 없는 거지요.

또 하나 노르스름한 바지락은 '물바지락'인데, 이늠은 잠수로 깊은 바다에서 캔답니다. 그러니 크기가 일정하며, 참바지락보다 큽니다.

 

맛은 '참바지락'이 연하며, 가격도 참바지락이 비싸다네요.

1KG당 5,000원이었습니다. 물론 구입을 하였지요.

 

그런데 해캄 시킨 바지락이 없어 고르는 작업 중인 늠을 구입하였습니다.

이 바지락이란 늠이 사람을 당황스럽게 할 때가 있을 겁니다.

오마나~ 된장찌개가 왜 이리 까매요?

바지락 속의 뻘이 된장뚝배기 안에서 요동을 한겁니다. 된장 찌개 모두 버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저는 바지락 등 해산물을 보통 용원에서 구입을 합니다.

바지락, 굴, 새우, 미더덕, 홍합 등을 된장찌개용으로 한꺼번에 구입을 하는데, 바지락은 까지 않은 늠도 구입을 합니다.

용원에서 구입할 때에는 큰대야에 담긴 바지락 중에 입을 벌린늠만 고르지요. 그리고 집에서 해캄을 시키고 칼클키 씻어 비닐봉지에 담아 냉동실에 두고 요리를 할 때에 필요만큼 넣습니다.

따로 급속 냉동을 시키지 않아도 조리를 하면 금방 구입한 바지락처럼 입을 쩍쩍 벌린답니다.

도시처럼 시장이 가까우면 이 방법이 필요가 없겠지만, 시골에 거주하시는 분들은 이렇게 해 보세요.

 

아저씨의 바지락 작업을 소개하겠습니다.

우리는 구입하였을 때 이늠이 빈늠인지 찬늠인지 제대로 모릅니다.

해캄을 시킨 후 바구니에 담아 막 문질러 씻는데요, 그래도 뻘이 있는 늠은 입을 다물고 시치미를 뚝 뗍니다.

 

바지락을 시멘트 바닥에 붓습니다.

그런 후 몇 늠씩 손으로 마찰을 시켜보면 빈늠과 찬늠은 소리가 다릅니다.

빈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있는 데, 바지락도 그짝이었습니다.

이늠들을 시멘트 바닥에 부어 몇 늠씩 문질러 보니 빈늠은 달그락 소리가 났으며, 찬늠은 그저 마찰 소리만 소리만 났습니다.

어쩌면 고단수 주부들은 아는 방법이겠지만, 저는 처음 알았습니다.^^

 

아저씨는 바지락의 입을 일일이 벌리는 시늉을 하지않고 능란하게 빈늠과 파치, 찬늠을 골라냈습니다.

 

 

 공영버스가 오고 있었습니다. 바지락 봉지를 들고 뛰었습니다.

아저씨~

퍽~

공영버스가 가다가 멈추기에 얼른 탔습니다. 요금은 700원입니다.

 

"(기사님에게)아저씨 혹 웅동 1동에서 운전하지 않았나요?"

 

웅동1동, 웅동2동, 웅천이 공영버스가 운행이 되며, 기사들은 수시로 운행 지역이 바뀝니다.

그러니 웅천의 공영버스를 예전에 웅동 1동에서 운행 한 기사분이 운행하였습니다.

 

(생각에)아홉내님의 모교인 웅천초등학교 풍경을 담기 위하여 웅천에 하차를 해야 하는데, 기사님께서 삼포까지 운행하는 버스니 삼포 풍경을 담는 게 어떠냐고 하였습니다.

배가 슬슬 고파오는 시간이었지만, 권하는 장사 손해 안본다고, 에라~ 모르겠다 - 가입시더 -

하여 처음으로 웅천 일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바깥지개를 벗어나니 '안지개'였습니다. 버스가 잠시 정차를 하였지만, 내려서 풍경을 담기에는 버겁기에 차창을 두고 한 컷 담았습니다.

 

  ▲ 안지개의 어느 골목

 

버스는 명동 STX를 지나 삼포로 가서 15분을 정차하였습니다. 15분 동안 여러 풍경을 담는 건 무리이기에 들을 따라 마을 전체 풍경을 담았으며, 멀리 보이는 해양공원도 한 컷 담았습니다.

 

평소에 자주 다니는 지역이 아니기에 아주 먼 곳인줄 알았는 데, 둘레둘레로 익은 풍경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 삼포 포구

 

  ▲ 삼포에서 보이는 해양공원

 

정오를 넘긴 시간이었지만, 수도로 가는 손님이 계셨기에 다시 수도를 들려 평소에 해안도로를 달리며 만난 동네인 사도를 거쳐 와성으로 갔습니다.

 

사도는 '공개'였으며, 와성은 수상레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곳인 데, '이실(이슬)이라고 하였습니다.

수도에서 승차시 700원을 내고 삼포에서 다시 승차시에는 무임으로 승차를 하였기에 기사님에게 여기 내려 주세요, 저기 내려주세요 할 상황이 못되어 달리면서 동네 풍경을 담았습니다.

 

  ▲ 사도를 지나면서 담은 와성(이실)

 

 ▲ 와성으로 가면서 뒤돌아 담은 사도(공개)

 

손님이 모두 하차 한 후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기사님께서 제게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기에 지구대(파출소) 아래의 칼국수가 먹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 칼국수집은 식물원의 식구들과 함께 갔었으며, 예술촌의 장화백님, 한사 정덕수 선생님과도 함께 간 집인데, 칼국수가 입에 잘 맞으며, 김밥도 괜찮은 집입니다.

주인이 마침 기사님의 형님뻘 되는 분이라고 하더군요.

 

 

칼국수를 먹고 기사님은 오후 운행을 위하여 가시고 아홉내님에게 더 보여 드릴 풍경이 없을까 하며, 걷는 데, 기사님께서 버스에 두고 온 바지락 봉지를 싣고 저를 찾아 오셨더군요.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웅천읍성 복원공사장으로 갔습니다.

칼국수로 힘을 보충하였으니 읍성 복원 현장을 막 돌아다녔습니다.

 

  ▲ 웅천읍성과 웅천초등학교

 

    웅천읍성
  • 관광지명 : 웅천읍성
  • 지정별 : 도지정기념물 제15호
  • 위 치 : 성내동, 남문동, 서중동 일대
  • 위치설명 : 웅천초교, 진해 예술촌등을 포함한 일대
  • 규 격 : 둘레(936M), 높이(4.4M), 면적(31120㎡)

웅천읍성은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종 16년(1434년)에 처음으로 축성하였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 16년에 김해읍성과 웅천읍성의 축조시기에 대한 논의에서 김해읍성과 웅천읍성을 다 같이 수축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세종 17년(1435년)에는 웅천읍성이 완공되지 않아 결국 각 포진의 수군을 동원하여 완공하도록 기록하고 있다. 또한 경상도속찬지리지의 읍성조에도 세종 16년에 축성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으므로 세종실록의 기사와 부합된다. 그후 단종 1년(1453년)에는 체성을 증축하고 성밖에 해자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세조 3년(1457년) 삼도순찰사 박강과 부사 구치관등이 웅천읍성이 협소하여 서쪽에 다시 축성할 것을 건의하여 이를 시행하였으며 그뒤 중종 36년(1541년)에는 성을 다시 증축하고 성밖의 민가 300여호를 성안으로 옮기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웅천읍지의 성지조에 성곽의 둘레가 전혀 변동이 없으므로 이러한 증축이 다 이루어졌다고는 보기 어렵다.

 

웅천읍성은 장방형 석축성으로 기단부를 이중으로 조성하고 자연대석을 사용하여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또한 동서남북의 정방에 옹성형 문지를 두었으며 각 문지의 좌우와 성곽의 네모퉁이에 곡성과 적대를 둔 전형적인 읍성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 성이다. 총길이 936M(현존둘레 500M), 폭 4.5M, 높이 4.4M 이르고 있으며 동벽은 대체로 온전히 남아있으나 남벽 및 서벽은 대부분 훼손되어 일부만 남아있고 북벽은 국도를 내면서 파괴되어 기단부만 매몰되어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웅천읍성은 삼포왜란과 임진왜란으로 한때 함몰되기도 하였으며 현성으로서의 행정적인 기능은 문종 2년(1452년) 웅신현과 완포현, 그리고 천읍부곡을 합하여 웅천현으로 승격된 이후부터이다. 공해는 동헌, 객사, 장적고, 향사당, 인리청, 군관청, 장관청, 훈도청, 지인방 등이 있으며 문루는 동문의 견륭루, 서문의 수호루, 남문의 진남루, 객사문루인 정해루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 웅천읍성 복원계획
2009년까지 사업비 140억을 들여 조성하여 역사문화의 체험과 역사교육 연구의 장으로 활용하고, 해양관광단지 개발과 연계하여 관광자원화. (출처 : 웅천초등학교 총 동창회 카페 - http://cafe.daum.net/ungceon100)

 

저마치 진해식물원이 보입니다.

가슴이 콩닥거렸습니다.

원장님 뵌지가 오래 되었는 데….

 

아홉내님

바깥지개와 웅천 일대의 풍경이 많이 낯설겁니다.

님의 고향만 낯선게 아닙니다.

매일 고향에서 자고 뜨는 제 고향도 매일 낯설어지고 있거든요. 특히 진해는 여러 곳에서 해양관광 도시로 개발 중이기에 공사 현장이 많습니다.

낯설지만, 우리들의 고향입니다.

이 풍경들이 작으나마 님에게 활력소가 되면 하는 바람입니다.

 

연도나 수도에 가는 길이 있을 때, 다시 바깥지개 풍경을 담아 드리겠습니다.

내내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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