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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가본 곳

불사이군(不事二君)의 함안 고려동

by 실비단안개 2010.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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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대학교를 지나 달리다보면 저 동네가 고려동이구나 할 정도로 기와집들이 모여 있으며, 배롱나무꽃이 피면 더 잘 어울리겠구나 싶은 동네가 경남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장내마을, 고려동입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쉬이 나서지지 않는 길이 고려동으로 가는 길이었기도 합니다.

 

고려동 유적지

지정 번호 : 기념물 제56호
위치 :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580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580번지 내 위치한 고려동유적지는 고려 후기 성균관 진사 이오(李午)선생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이곳에 거처를 정한 이후 대대로 그 후손들이 살아온 곳이다.

 

이오는 이곳에 담장을 쌓고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이라는 비석을 세워 논과 밭을 일구어 자급자족을 하였다. 그는 아들에게도 조선왕조에 벼슬하지 말 것과 자기는 죽은 뒤라도 자신의 신주(神主)를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유언하였다. 그의 유언을 받든 후손들은 19대 600여 년에 이르는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이에 고려동(高麗洞)이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이어 오고 있다.

 

현재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비, 고려동담장, 고려종택, 고려전답, 자미단(紫薇壇), 고려전답 99,000㎡, 자미정(紫薇亭), 율간정(栗澗亭), 복정(鰒亭)등 이 있다. 후손들이 선조의 유산을 소중히 가꾸면서 벼슬길에 나아가기 보다는 자녀의 교육에 전념함으로써 학덕과 절의로 이름있는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이곳을 1983년 8월 2일 기념물 제56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출처 : 고려동유적지 - 한국관광공사)

 

                          ▲ 장내마을

 

                          ▲ 마을 입구의 ‘고려동학(高麗洞壑)’

  

마을 오른편으로 들어 고려동을 둘러본 후 다시 왼편의 고려동학 비석을 만났습니다.

모은(矛隱)은 마을 입구에 고려동학(高麗洞壑)이라는 비석을 세워 이곳이 고려의 영역임을 나타냈으며, 천하는 조선의 땅이지만 고려동만큼은 고려의 세상이 된 것입니다.
 

고려동학비가 있는 곳은 정비중이었으며, 어린이가 부족하여 그런지 마을에 있는 어린이집의 미끄럼틀이 차에 실려 이사중이었습니다.

상의문 근처에 주차를 했습니다.

 

                          ▲ 상의문(尙義門)과 상의문 안의 고려진사모은이선생경모비(高麗進士矛隱李先生景慕碑) 비석 

 

상의문 옆에 고려동 유적지 안내가 있으며, 고려동으로 드는 고려교(高麗橋)가 있습니다.

 

 

고려왕조 유민들의 영토로 들어가는 길목의 고려교(高麗橋)에는 두꺼비 한 마리 있으며, 고려교와 함께 있는 자미교는 글씨는 지웠지만, 역시 두꺼비가 있는데, 새끼를 등에 업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만, 교려교와 자미교를 건너면 고려동입니다.

 

고려동 뒤로 대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오른편에 600년 이상된 배롱나무가 있습니다. 

고려가 망하자 모은(矛隱)은 두문동으로 들어갔으나 만은(晩隱), 홍재(洪載), 전서(典書), 조열(趙悅)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결심하였으며, 이윽고 함안 땅 모곡(矛谷)에 이르러 자미화(紫薇花)가 만발한 곳을 보고는 길지(吉地)로 생각하여 평생 살 곳으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일명 배롱나무라 부르는 자미화는 여름철이면 백일동안 꽃을 피우므로 백일홍이라고도 하는데, 그 모습이 한결같은 선비의 일편단심을 상징하기에 선비들이 집안에 즐겨 심었던 나무입니다. 

모은은 배롱나무에 말을 매어두고 자자손손 살아갈 고려동 터를 닦았다고 합니다.


                          ▲ 자미고원(紫薇古園)이라 새겨놓은 자미단

 

모은의 후손이 살고 있다는 고려동을 비롯 마을은 허름하며 담장과 솟을 대문은 조선에 이어 대한민국도 거부하는 듯 합니다.

 

 

길고 높은 담장의 이집은 재령 이씨 종택으로, 마을 사람들은 종부댁이라고 했습니다.

 

 

바깥세상과 담을 쌓은 높은 담장을 따라가니 대문이 열려 있기에 들어가니 할머니 한 분이 청소를 하고 계셨습니다.

 

 

50여년전 대구에서 재령 이씨 종택으로 시집오신 종부  임종순(77세) 할머니십니다.

할머니는 3남매를 두었으며, 지금은 가야의 아파트에서 생활을 하시는 데, 매 년 음력 2월 20일께면 종택에서 종친회를 하기에 청소를 하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할머니께서 잠시 일손을 멈추고 옛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모은이 배롱나무에 말을 대어두고 터를 닦은 이야기, 이 집은 한국전쟁때 모두 불탔는데 주춧돌은 600년전 그대로며, 담장은 안담과 바깥담 이중담(장)으로 탱자나무였지만, 새마을 운동으로 탱자를 뽑고 지금의 담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임종순 할머니께 듣는 고려동 이야기입니다.

 

 

 ▲ 재령 이씨 종부 임종순 할머니

 

고려동학은 ‘고려동 골짜기’란 뜻으로 기와집이 즐비한 마을 앞에는 고려전(高麗田)이라고 불리는 옥토 3000여 평이 펼쳐져 있습니다.

굳이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마을 안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하도록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그래서 마을 이름도 장내(牆內), 곧 ‘담장 안’이란 뜻으로 자신이 살던 곳을 고려동이라 하고 평생 마을 밖으로 나가길 거부했던 모은(茅隱) 이오(李午)는 고려의 신하로서 지조를 지켰습니다. 

 

고려가 망하자,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했던 많은 선비들은 새 조정인 조선에 반대하여 벼슬을 거부하고 낙향하여 절개를 지켰는데, 그 중 신규, 조의생, 임선미, 이경, 맹호성, 고천상, 서중보 등 72인은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조선왕조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고려 충신 72명을 불살라 죽였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골짜기로 우리가 종종 사용하는 두문불출 (杜門不出)이란 말이 여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모은도 이때 두문동으로 들어갔는데, 두문동에 머물던 모은은 뜻을 같이하던 만은(晩隱) 홍재(洪載), 전서(典書) 조열(趙悅)과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두문동에서 남쪽으로 발길을 재촉한 모은은 모곡 땅에 이르러 자미화(백일홍)가 반발한 것을 보고 평생 살 곳으로 정했습니다.

600년이 지난 지금도 고려동 입구에는 자미화가 있는데, 모은이 고려동 터를 닦을 때 말을 매어둔 나무입니다.

할머님께 허락을 구한 후 집안을 둘러봤습니다.

정지는 가마솥 아궁이가 있지만 보일러와 겸하며, 고려동은 기념물이로 지정이 되었기에 소방시설이 잘 되어 있습니다.

 안채의 왼쪽을 돌면 우물이 있습니다.

 

이 우물은 복정(鰒井) 이라고 부르며, ‘전복우물’이라는 뜻으로  모은의 현손 이경성(李景成)과 그의 정부인 여주 이씨의 효행이 얽혀있는 유서깊은 우물입니다.

 

이경성(李景成)은 효성이 지극하여 노모를 극진히 봉양하였습니다. 그가 현감 벼슬만 하는 것을 본 남명 조식 선생이 “어찌하여 더 벼슬을 하지 않는가” 하니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 벼슬을 더 하지 않는다”라고 답하였으며,부인 여주 이씨 또한 시어머니를 섬기는 정성이 지극하였습니다.

 

병으로 자리에 누운 시어머니가 하루는 전복회를 먹고 싶다고 며느리에게 말하자, 며느리는 백방으로 전복을 구하러 다녔는데, 그 정성에 하늘이 감동했는지 어느 날 우물에서 전복이 나왔습니다.

 

며느리는 전복을 요리하여 시어머니에게 드리자,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같이 먹을 것을 권했습니다. 이씨 부인은 전복이 먹고 싶었지만 시어머니를 위해 식성에 맞지않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시어머니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했음에도 이씨는 그 후, 부모를 속인 죄책감을 한 평생 버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재상 유척기(1691-1767)가 경상감사로 왔을 때, 부임기념 백일장에 시제를 “평생불식(平生不食) 복어회(鰒魚膾)”로 내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효행이 널리 회자되었다고 하며, 이 복정은 600년전 모은 선생이 파서 사용한 것으로 아무리 큰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념물로 지정이 되었지만, 안내문이 너무 낡았으니 함안군청에서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습니다.

 

안담과 바깥담 사이에는 밭이 있으며, 역시 오래전에 심어진 산수유가 있고, 고려동 내에는 부속건물이 많으며, 연못에는 새연잎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 사진의 양이 많아 모두 올리지 못하는데, 나머지는 경블공 카페(http://cafe.daum.net/GBC119) 자료방에 올려두겠으니, 필요한 분들은 가지고 가세요.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마을을 둘러봤습니다.

재령 이씨 종택 뒷쪽의 김병년(53세) 씨는 야생화와 약초를 심어 고려동을 찾는 이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싶다면 집앞의 밭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내년 이맘때는 고려동에 또 다른 볼거리가 생길겁니다.

 

                          ▲ 김병년 씨댁 마루에서

 

고려동은 다른시골마을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으며, 어른의 모습도 간혹 보였습니다.

텃밭엔 냉이꽃을 비롯 풀꽃이 채소보다 많았으며, 골목시작부터 끝까지 걸어도 누구 한사람 말을 걸어오는 이가 없었으며, 늙은 매화나무만이 무심하게 꽃잎을 날렸습니다. 

 

                          ▲ 순흥 안씨 제실

 

마을 경노당을 지나니 솟을 대문이 나왔으며, 넓은 마당 한 켠엔 목단과 목련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기척에 할아버지께서 나오셨는데, "여긴 볼 게 없으니 종부집으로 가보소"하더군요.

8대째 살고 있는 집이라는데, 고려동 안내문에 나와 있는 호상공의 생가인 듯 했습니다.

 

 

 

6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19대에 걸쳐 조상의 유지를 받들며 후손들이 고려동을 떠나지 않고 있는 고려동은, 어지러운 우리나라와는 달리 고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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