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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께 즐거우면 더 좋지 아니한가!
고향 이야기/김달진 문학관

고향의 봄 이원수 흉상 제막식에 다녀와서

by 실비단안개 2011.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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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동요 '고향의 봄' 노래를 부르거나 들으면 눈이 스르르 감기며 아련한 풍경들이 떠오릅니다.

이 블로그 이름이 ‥ 실비단안개의 '고향의 봄' ‥ 입니다.

포스트 내용이 고향 이야기와 꽃 사진이기에 잘 어울리는 듯 하여 이원수 선생의 고향의 봄 노래에서 땄습니다.

그리곤 봄이면 블로그 배경음악으로 고향의 봄을 올리는데, 1월 24일 처음으로 고향의 봄 도서관에 갔습니다.

 

김달진 문학관 학예사님께서  창원 고향의 봄 도서관에서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선포식과 흉상제막식이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마침 그날 블로그 이웃 천부인권님께서 다른 일로 우리 동네까지 오셨기에 동행했는데, 천부인권님이 창원에 거주하시기에 그쪽 지리를 잘 알기에 행복한 걸음이 되었습니다.

 

고향의 봄 도서관은 창원시 서상동으로 나와 있는데 팔용동으로 아는 이들이 있으며, 이원수 선생의 생가가 소답동에 있기에 소답동으로 아는 이들도 있기에 정확한 주소를 올립니다.

도서관은 창원시 의창구 서상동 산60번지로 2002년 11월에 개관했습니다.

 

또 하나 헷갈리는 건 '고향의 봄 도서관'과 '이원수 문학관'으로 이원수 문학관은 고향의 봄 도서관 내에 있으며 행사를 한 동원홀은 이원수 선생의 호를 딴 강당입니다.

고향의 봄 도서관은 비탈위에 있지만 주변에 아파트가 삐죽하기에 전체 풍경이 고향의 봄을 연상시키지는 않았습니다.

 

 

▲ 행사장 입구

 

고향의 봄 도서관은 문학관이 함께 있기에 영화 상영 등 행사들이 많은 듯 한데 행사로 붐볐기에 모두 둘러보지는 못했습니다.

행사장에 들어서니 고향의 봄이 봄꽃 향기처럼 흘렀으며, 시화가 전시되어 있었고 방명록이 있었습니다.

 

 

이원수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선포식은 동원홀에서 진행되었으며, 문학관은 선생의 생애와 작품, 어린이들의 그림과 독서감상문이 있더군요.

 

 ▲ 동원 이원수 선생이 쓰고 향파 이주홍 선생이 그린 시화

 

 

빠뜨릴 수 없는 게 선생의 친일 시인데 문학관에는 이오덕 선생의 친일 시에 대한 변이 있으며, 기념사업 선포식에서 박완수 창원시장은 "기념사업이 통합 창원시의 가치를 부여하고, 도시의 브랜드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하자 열린사회 희망연대는 26일 시청 프레스센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진실을 거부하거나 왜곡하며 그를 기리는 일에 자신들의 돈이 아니라 시민의 세금으로 기념사업을 하겠다는 그 몰염치에 분노하는 것"이라며 시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지원을 중단하라고 했는데 자세한 사연은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원수 선생이 창원시의 브랜드가 될 수 있는지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이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 "친일 이원수 기념사업, 시민 세금 충당 안돼"

- [사설] 이원수 기념사업과 브랜드화 숙고해야

 

▲ 이오덕 선생의 친일시에 대하여와 지원병을 보내며 「반도의 빛」1942년 8월호

 

고향의 봄 노래 하나만을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곁가지가 많습니다.^^

 

애국가보다 많이 불린다는 노래 '고향의 봄'은 이원수 선생이 15세 때 지은 시에 홍난파가 곡을 붙여 만든 노래입니다.

마산에서 소년회 활동을 하던 이원수는 어린이운동의 선구자인 방정환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잡지 '어린이'지에 투고 당선되었으며, 당시 마산에서 활동하던 이일래(산토끼 작사)선생이 곡을 붙여 마산일대에서 불려지다 1927년 홍난파 선생이 다시 곡을 붙였습니다.

 

'고향의 봄'의 배경이 된 곳은 경남 창원 소답리며 소답리 일대의 아름다운 경험을 풀어낸 시가 고향의 봄입니다.

 

꽃대궐의 무대는 조각가 김종영 선생의 종택이라고 하기에 도서관을 나온 후 소답동의 김씨고가를 보러 갔습니다.^^

 

이원수 선생은 '월간소년' 1980년 10월호에 '자전회고록-흘러가는 세월 속에'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습니다.

 

"내가 난 곳은 양산이라고 했다. 양산서 나긴 했지만 1년도 못되어 창원으로 왔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난 곳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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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곳은 양산이지만 창원으로 이사하여 자랐기에 양산과 창원이 서로 선생의 고향이라고 하는데 청마 유치환 선생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 이원수 문학관에서

 

우리가 즐겨 불렀던 노래중에 '오빠생각'이 있습니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울건만 / 서울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고향의 봄과 함께 오빠생각도 국민동요입니다.

부르긴 했지만 작사를 누가 했는지 몰랐는데, 문학관에 가니 이원수 선생의 부인 최순애 여사의 동시였습니다.

이 시는 12살 소녀가 썼으며, 1925년 11월 12살 소녀 최순애는 '오빠 생각'으로 방정환이 내던 잡지 '어린이'의 동시란에 입선하였으며, 수원의 최순애 소녀와 마산의 이원수 소년은 자라 1936년 6월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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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잘 익은 개울가와 들길에는 찔레꽃 향기가 너울거렸습니다.

제가 무식하게 누구 시인지도 모르고 몇 년을 들었던 '찔레꽃'도 이원수 선생의 시였습니다.

 

찔레꽃보다는 찔레순을 따 먹었으며, 찔레꽃으로 떡을 했지요.

남자 아이는  찔레꽃 추억을 가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원수 선생은 여자형제들 틈에 자라 그런지 다른 동요와 함께 아련하며 슬픈 추억이 담겨 있습니다.

 

누나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이의 정서가 솔직하게 표현된 이 시 속엔 일제 치하에서 비참한 광산 노동자로 전락하고만 식민지 여성의 슬픈 현실이 녹아 있다고 합니다.

 

찔레꽃 / 이원수


찔레꽃이 하얗게 피었다오 / 누나 일 가는 광산 길에 피었다오 / 찔레꽃 이파리는 맛도 있지 / 남 모르게 가만히 먹어 봤다오 / 광산에서 돌 깨는 누나 맞으러 / 저무는 산길에 나왔다가 / 하얀 찔레꽃 따 먹었다오 / 우리 누나 기다리며 따 먹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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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수 선생의 타계일인 24일 오후 2시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선포식이 고향의봄도서관 동원홀에서 있었으며, 흉상제막식은 이원수 문학관에서 있었습니다.
기념사업선포식은 창원시립소년소녀합창단의 축하공연과 추모시 낭독 등이 있었습니다.
사회는 정일근 시인이 봤으며, 임신행 선생님이 추모시를 낭독 했습니다.

이원수 선생의 흉상은 3ㆍ15성역공원의 부조벽과 기념물제작에 참여했던 우리지역 출신의 조각가 김동숙이 제작했으며, 행사 참가자들에게는 동화책과 머그컵이 기념품으로 주어졌습니다.

 

 ▲ 동원홀의 행사

 

아래는 문학관의 흉상제막식인데 많은 카메라로 겨우 자리잡아 담았습니다.

 

 

 

 

천부인권님과 소답동 김씨고가로 갔습니다.

겨울이라 꽃대궐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김종영 선생의 종택 입구와 까치발로 본 내부 풍경에 저으기 실망했습니다.

종택에 사람이 거주하긴 하지만 문은 잠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외부풍경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대문 가차운 곳에 가로등과 벤치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약간 비켜 옆의 공터에 설치를 했더라면 보는 이나 그 의자에 앉는 이가 마음이 편치않을까 생각하며, 종택앞의 느티나무는 보호를 한답시고 의자를 겸한 울이 있었는데 이 울이 나무에 딱 붙어 있어 나무가 숨을 못 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종택앞에는 몇 개의 비석이 있으며, 돌담장과 마른 담쟁이도 좋았습니다.

내부 풍경은 봄날에 한 번 구경하고 싶습니다.

 

 

 

도로 건너의 사미루 역시 김종영 생가 일부라고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도로 건설로 잘려 따로 있습니다.

 

고향의 봄 도서관 행사 덕분에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된 건 다행이지만, 꽃대궐 배경인 김씨고가의 풍경은 내내 씁쓸함으로 남아 있는데 봄이 오면 정말 꽃대궐이 되도록 창원시와 시민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 사미루의 현판은 석촌 윤용구(1853-1939)가 썼으며, 조선시대에 예조, 이조판서를 지낸 그는 글과 그림에 능하였고 총독부가 남작을

주었으나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선암사의 강선루, 월봉서원의 칠송정 등의 현판이 있으며, 이 현판 역시 그의 대표작이라고 합니다.

(참고 : 걸어서 만나는 역사 이야기 http://cafe.daum.net/masan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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