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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가본 곳

동창들과 40년만의 1박 2일 추억여행

by 실비단안개 2011.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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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온라인 동창카페에서 통영 여행 계획을 한 달 전에 발표를 했는데 뜻하지 않게 제가 팔을 다쳤기에 친구들에게 민폐가 된다며 식구들이 염려를 했지만 추억여행에 동행했습니다.

팔을 다친 후 처음으로 머리염색을 했으며 메니큐어도 발랐습니다.

 

우리는 초등학교 6학년때 통영(충무)으로 수학여행을 갔습니다.

당시 진해시가 아니었지만 진해시가 가까웠기에 어떤 경로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군함을 타고 통영으로 수학여행을 갔으며, 한산도, 세병관 등을 여행했기에 통영은 우리가 어린시절을 공유한 추억의 항구 도시입니다. 그 지역을 수학여행을 다녀온지 40년만에 친구들이 함께 여행을 하기로 했습니다.

 

당시는 요즘과 달리 야외학습이나 견학등이 많지 않았으며, 도시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시골은 여행이라는 말은 수학여행과 신혼여행이 여행의 전부인 시대였고 우리는 부모님과 떨어져 처음으로 바깥잠을 잤던 때가 수학여행이었습니다.

40년전 수학여행때의 일정대로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그날을 이야기하며 한 40년만의 1박 2일 추억여행입니다.

 

▲ 1971년 6학년이었으니 71년 11월이나 12월쯤에 찍은 졸업사진

 

3월 12일 오전 10시 40분, 동네 친구가 짐을 들기 위해 우리집으로 왔습니다.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의 친구지만 각자의 생활이 있다보니 생각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크고 작은 모임시 언제나 동행하는 친굽니다.

친구 차에 올라 진해에 있는 친구를 데리러 가는 길에 이웃 동네 평발의 친구를 태웠습니다.

중학교 시절이 생각이 잘 나지 않는데 비해 초등학교 여자 친구는 이름을 대면 해맑은 모습이 아른거립니다.

몇 십년만에 은희를 만났는데 우리는 길에서 여러차례 스쳤을 수도 있을 만큼 모습이 변해 있었습니다.

옛날의 말투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작고 귀여웠으며 그 동네가 외따로 있었기에 친구는 늘 혼자 먼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을 겁니다.

그 친구는 친정 동네에서 부모님과 함께 생활을 한다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옛날의 그 가시나 같았습니다.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며 경화동 친구에게 갔습니다.

옥이는 한동네 친구며 가끔 만나기에 어제 만난 것 같습니다. 우리 동네 친구끼리 모임도 하거든요.

조수석에 앉았기에 옥이 얼굴도 제대로 확인못하고 우리는 가덕도 휴게소로 달렸습니다.

가덕도 휴게소에서 동네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거든요.

동네 친구지만 경주와 용원에서 생활을 하며 이웃 동네 친구도 동승했지만 역시 가끔 얼굴을 보는 사이입니다.

 

가덕도 휴게소에 도착하니 주차공간이 영 마땅치않아 어중간하게 주차를 한 후 친구가 커피를 주문하여 나(환자니까^^)를 제외한 친구들이 커피를 들고 친구들을 찾아 두리번 거리니 휴게소 뒷쪽의 계단 아래에서 우리 전화를 받고 있었습니다.

등잔밑만 어두운게 아닌 모양입니다.^^

 

친구들을 찾느라 커피가 식었지만 나눠 마신 후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학교 다닐때를 제외하고 가지런히 앉은 친구들과의 기념사진은 처음같습니다.

 

오후 2시 통영 마리나리조트에서 동창들을 만나기로 했기에 시간이 여유로워 우리는 구경하며 쉬엄쉬엄 통영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거가대교는 주말이라 통행차량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불편을 줄 만큼 복잡하지 않았으며, 정오가 가까웠기에 거제에서 점식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멍게비빔밥과 도다리쑥국을 먹자는 의견이 있었기에 간곡에서 먹기로 하고 거가대교를 내려 간곡으로 가는데 매화가 하얗게 피었습니다. 진짜 봄날입니다.

매화 사이의 식당들은 도다리쑥국을 잘 한다고 서로 자랑했지만 우리는 간곡뱃머리에 정차를 하여 안골에서 도선을 타고 다닐때를 생각하며 혼자 흥분했습니다.

남자친구들이 몽돌밭으로 내려가 걷습니다. 평소에 일탈을 꿈 꾼듯 한 모습이었습니다.

 

바다를 배경으로 바다향이 진한 음식을 먹는 일도 좋지만 우리는 언덕배기의 음식점에서 멍게비빔밥과 도다리쑥국을 먹었습니다.

개업을 한지 얼마되지 않은 그집은 찬이 정갈했으며 비빔밥과 도다리쑥국 맛도 좋았습니다.

다른집의 멍게비빔밥은 초장에 비벼먹도록 나오는데 그집은 초장을 끼얹지 않고 먹는 게 멍게향이 더 진하다고 하더군요.

 

 ▲ 도다리쑥국과 멍게비빔밥(거제 장목 거가펜션겸 식당 055-638-0050)

 

 

팔이 불편한 관계로 승합차에서 다른 친구의 승용차로 옮겨 통영으로 향하던 중 뒷차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차가 아무래도 이상하니 적당한 장소에 정차를 하라는 겁니다.

장승포와 통영으로 가는 길이 나누어 지는 곳을 살짝 벗어나 정차를 하니 승합차도 정차 했습니다.

차에 대해 모르지만 차에서 냄새가 났으며 라디에터부분이 이상하다며 근처에서 물을 얻어 붓더군요. 물을 채운 후 열을 식혀 다시 통영으로 향하며 역시 동네친구지만 친구가 직장인이다보니 어쩌다 마주치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가는데 거제대교를 코앞에 두고 뒷차에서 또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의 목적지가 통영 도남동이기에 카센타에 연락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일단 물은 한번 더 채운 후 다시 떠나보자고 했습니다.

우리가 출발할 때 쉬엄쉬엄 구경하며 통영으로 가자고 했는데 약속시간이 다가왔지만 차 덕분에 예상치않은 곳에서 쉬며 통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서울팀은 통영에 도착하여 박경리기념관에 있다며 기념관으로 오라고 했지만 차를 카센타에 맡겨야 했기에 숙소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약속시간은 지키지 못했지만 우리가 차를 맡기고 리조트에 도착하니 친구들이 우루루 몰려 들었습니다.

 

며칠전에 만난 친구가 있는 반면 어린 코흘리개때 헤어진 친구도 있으며 기억에 전혀 없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수더분하게 변하는 반면 남자들을 표가 나도록 변하는지 모두 이웃집, 이웃 동네 아저씨들 같아 서먹하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고향 친구라 금방 그날의 친구로 돌아가더군요.

 

- 통영 마리나리조트 : http://www.kumhoresort.co.kr/resort/chungmu/resort_chungmu.asp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전설의 고향같겠지만 우리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야 했고 국기하강식때는 국기가 있는 방향을 향에 가슴에 손을 올렸습니다.

몇 학년때인지 기억할 수 없지만 모두가 풍요롭지 못했던 시절 더 어려웠던 학생은 옥수수죽 급식을 받았고, 지금은 정말정말 흔한 김밥이지만 우리때는 소풍때 먹는 유일한 도식락이 김밥이었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부모님과 선생님께 공손했던걸 보면 물질이 사람의 마음까지 풍요롭게 해 주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친구들은 근황을 묻고 답하며 옛날을 이야기 합니다.

아이패드로 우리 카페에 접속하고 수원의 친구는 낡은 흑백사진 몇장을 꺼냅니다.

같은 모양의 단발머리와 미소 -

선생님을 보니 초등학교 4학년 때입니다.

선생님께서 선그라스를 꼈으니 소풍날 같습니다.

그때 봄소풍은 비가 내려 학교에서 도시락을 까먹은 것 같으니 가을소풍때 같습니다.

 

사진을 꺼낸 친구에게 친구들이 왜 잘렸느냐고 하니 본인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잘랐다고 합니다.

깜찍한 소녀지요.

 

이름이 가물거리는 친구가 있는 반면 40년이 더 넘은 그날이지만 이름이 툭 나오는 친구가 더 많습니다.

겨울 지나고 이맘때면 선생님과 냇가로 가 겨울때를 벗겼는데….

단발머리에 이는 또 왜 그리 많았던지….

 

▲ 해맑은 소녀가 모두 친구

 

40년의 세월은 어린날 내 모습도 눈을 찡그리며 손에서 멀어야 보입니다.

친구 모습 하나하나를 짚으며 코흘리개 시절을 이야기하고 안부를 궁금해 합니다.

숙소는 초등학교 교실의 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내외할 것도 없으면서  그때는 남자아이는 남자아이끼리 여자아이는 여자끼리 그렇게 떠들고 놀았었는데 지금도 그렇네요.

개구장이 광수가 여자친구쪽을 기웃거립니다.

광수는 어릴적 버릇을 할아버지가 되어가는 나이가 되어도 버리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정다운 친구입니다.

 

바라만 봐도 이쁜 친구들입니다.

 

 

 

새벽에 낚시를 떠난 친구가 도착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저녁식사를 하러 음식점으로 갔습니다.

외가가 통영인 원도와 서울팀이 주관한 모임이었기에 숙소와 마찬가지로 음식점도 예약이 되어 있었습니다.

지난해 동창회때 만났으니 오랜만에 친구들과 식사를 하며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팔이 아프기에 술을 마시면 안되지만 맥주 몇 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어울려 술술 넘겼으며 낚시에서 돌아 온 두 친구가 합류하여 노래방으로 옮겼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우리 시대의 정서 그대로 잔잔하며 성악을 전공한 친구의 멋드러진 목소리도 들었습니다.

 

깊어가는 밤 시간, 25명중 8명이 사정으로 돌아가고 남은 친구들은 숙소로 돌아 왔습니다.

바닷바람인지 봄바람인지 모르겠습니다.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우리는 걸었습니다.

진해를 출발할  때 친구가 전날 잠을 설쳤다고 했는데 헤어진 지금 더 아리게 박힌 친구들입니다.

 

 

숙소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이어졌습니다.

편안한 복장으로 와인을 나누었으며, 떠나올 때 모든것을 혼자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었는데 친구가 옷을 갈아입혀 주고 머리도 빗겨 주었습니다.

창밖엔 가로등이 희미했고 새벽 3시를 넘겨 잠이 들었습니다.

 

3월 13일

도란거리는 목소리에 잠을 깨 커피물을 끓이는데 아침해가 떠오른다고 했습니다.

1월 1일 해맞이 후 아침해를 맞는 일이 처음이었습니다.

숙소 베란다에 나가니 바다 건너 산 위로 유난히 붉은해가 떠올랐습니다.

 

 

서호시장의 시락국으로 아침식사를 하기로 했기에 가는 길에 친구가 통영꿀빵을 안겨주었습니다.

통영에 여러번 다녔지만 통영꿀빵은 처음 먹었는데 우리가 간 가게는 오미사 꿀빵집입니다.

오미사 꿀빵은 1960년대초 별다른 상호도 없이 집 앞 가판에서 배급받은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면서, 이내 사람들이 한번 먹고, 그 맛을 인정하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저희 빵집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나가던 여고생들이 맛을 보고 입소문이 나면서 저희 집 옆에 있던 세탁소 이름인 '오미사'로 저희 가게를 칭하게 되었고, 그 후 오미사 세탁소는 없어져 자연스럽게 저희 꿀빵집에서 '오미사'라는 간판을 걸게 되었습니다.

'오미사'란 뜻이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또 다른 시각으로 보면 '오미사'는 오미사 꿀빵을 아끼는 고객들이 붙여준 이름이기도 합니다.

오미사 꿀빵 : http://www.omisa.co.kr/

 

서호시장의 시락국을 먹는데 친구가 멍게와 생선회를 도시락에 담아 왔습니다.

전날 생선회를 많이 먹었는데 친구들에게 먹이려고 시장에서 준비해 왔습니다.

시락국을 비웠지만 친구의 마음이 괘씸하여 멍게와 생선회를 먹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몇 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동피랑으로 갔습니다. 완연한 봄날입니다.

카페 할아버지께 전에 찍었던 사진을 전해 드린 후 우리는 우선 천사가 되자고 했습니다.

나의 주문에 친구들은 각자의 천사 표정을 만들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봤다면 중늙은이들이 뭔 추탠가 했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동피랑에서 한껏 즐거워 했습니다.

그런데 동피랑의 황두리 할머니의 아드님을 만나니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게 사실이었으며, 추인호 삼춘은 일이 있어 다른 지역에 있다는 연락이 왔기에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이른 시간이었기에 문화마당의 톱 할아버지는 만나지 못했지만 할아버지의 음반을 몇 준비해 갔기에 친구들과 나누었고, 지난해 개관한 박경리 기념관으로 갔습니다.

전날 일찍 도착한 팀은 박경리 기념관을 방문했지만 늦게 도착한 우리팀을 위해 다시 걸음을 한 거지요.

- 박경리 기념관 : http://pkn.tongyeong.go.kr/main/

 

지난해 5월 개관한 박경리 기념관은 너른 터에 정리가 잘 되어 있었습니다.

선생의 연보만으로도 책이 한 권 될 정도로 활발한 활동의 흔적이 역력했으며, 다른 문학관이나 기념관보다 많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기념관을 나와 선생의 묘소로 갔습니다.

묘지로 가는 길에 분홍겹매화가 피었으며 공원은 봄단장 중이었고, 곳곳에 자연석 시비가 있으며 쉬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더군요.

 

어머니 / 박경리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했던 나는

사별 후 삼심여년

꿈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해매였다.

 

고향 옛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서울 살았을 때의 동네을 찾아가기도 하고

피난 가서 하룻밤을 묵었던

관악산 절간을 찾아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혀 알지 못할 곳을

애타게 찾아 해매기도 했다.

 

언제나 그 꿈길은

황량하고 삭막하고 아득했다

그러나 한번도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

 

꿈에서 깨면

아아 어머니는 돌아 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나가는 듯했다

 

불효막심했던 나의 회한

불효막심의 형벌로써

이렇게 나를 사로잡아 놓아주지도 않고

꿈을 꾸게 하나 보다.

 

 

기념관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친구들이 달아공원으로 이동했습니다.

달아공원 일몰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났지만 일몰 시간이 아니었기에 친구들과 헤어져 돌아 오는 길에 동백과 매화를 만났습니다.

 

달아공원으로 가는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며, 길을 따라 붉은 동백이 한없이 처량하게 피었고 공원의 정자주변에 몇 그루의 매화가 꽃을 피웠지만 홍매는 아직 봉오리였습니다.

달아공원에서 통영의 바다를 봤습니다.

쑥섬, 사량도, 곤리도가 있고 추도가 멀리 있었습니다.

곤리도는 삼덕항에서 20여분이면 갈 수 있다고 했기에 어느날 그 섬으로 가야 할 것 같아 침을 발라 두었습니다.

 

▲ 달아공원의 동백과 매화

 

▲ 통영의 섬 섬 섬

 

헤어진 친구들을 만난 곳은 척포마을입니다.

척포로 가는 들에서 아낙들은 봄을 캤으며 방파제의 낚시꾼도 봄을 낚고 있었습니다.

점심식사가 준비되는 사이 친구도 쑥을 캤습니다.

시장에 나가면 지천이지만 친구가 캔 쑥은 외가댁쑥이라 맛도 외할머니 냄새가 나겠지요.

 

 

점심식사는 매운탕과 회덮밥으로 했습니다.

팔딱거리는 생선을 다듬어 만들어준 덮밥과 매운탕은 덜큰하며 짭조롬한 밑반찬과 어울려 연신 감탄하게 했습니다.

- 바다회 식당 : 통영시 산양읍 미남리 055)646-2477

 

 

우리나라가 좁아서 그런지 학교 후배를 횟집앞에서 만났는데 식사 시중을 들어 주었고 식사 후 배를 태워 주겠다고 했습니다.

마다할 우리가 아니었기에 바닷가에서 썬크림을 바르고 이동하여 후배의 가두리 양식장으로 갔습니다.

 

거제를 다닐 때 도선은 발판이 있기에 배를 타는데 어려움이 없었지만 후배의 배는 방파제에 그냥 댔기에 그 배를 타는 일은 무리였습니다.

세상의 간큰짓은 혼자 다 하다시피 하지만 에스컬레이트 타는 일, 구름다리 건너는 일, 배를 타는 일은 이 나이에도 무섭고 두렵거든요.

팔과 가슴이 아프다보니 친구에게 덥석 안기기도 그랬지만 우째우째 배를 탔습니다.

그래도 출렁거리는 배가 무서웠지만 가두리 양식장 구경을 하는 행운이 언제 또 올까 싶어 엉거주춤 꿈틀대며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양식장은 뭍처럼 길이 있었으며, 그 아래로 자연산 미역이 자라고 있었는데 개구진 친구가 엎드려 팔을 길게 뻗어 미역을 땄습니다.

나도 넘어질뻔 했지만 친구가 바다에 빠질까봐 간이 정말 콩닥콩닥했습니다.

 

 

오후 2시쯤 되었습니다.

모두들 길이 멀지만 서울팀은 더 멀기에 이쯤에서 헤어져야 했습니다.

헤어지는 아쉬움을 말과 글로 어떻게 다 표현을 하겠습니까.

곧 있을 동창회때 만날 수 있지만 헤어지는 일은 나이가 들어도 서툽니다.

 

몇 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찍기로 했습니다.

다니면서 친구들이 나를 찍어 주었지만 마지막 단체사진에 빠지면 안되기에 후배에게 부탁하여 함께 풍경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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