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함께 즐거우면 더 좋지 아니한가!
마음 나누기/낙동江과 팸투어·답사

성혜림의 본가이기도 한 창녕 성씨고가(成氏古家)

by 실비단안개 2011. 12. 21.
728x90

 

람사르환경재단과 경남도민일보 주최, 갱상도 문화학교 추진단 주관 생태·역사기행 4 - 창녕

 

람사르환경재단과 경남도민일보가 함께 주최하고 갱상도 문화학교 추진단이 주관하는 네 번째 생태·역사기행이 12월 2일에 있었으며, 그동안 관룡사 주변 이야기를 올렸습니다.

점심식사 후 이어진 답사는 창녕읍 술정리 동삼층석탑과 석탑 뒤에 있는 하병수씨 가옥이었으며, 버스로 이동하여 간 곳은 창녕군 대지면 석리의 성씨고가입니다.

 

성씨고가 앞은 양파밭이 늘어졌으며, 이곳이 양파시배임을 알리는 안내와 손으로 양파를 감싼 모양의 조형물이 있는데, 이 양파 상은 경남도지사를 지낸 김태호 총리후보가 벗기면 벗길수록 의혹이 계속 나온다고 양파총리라며 성씨고가 앞의 양파 상이 트위터를 달군적이 있지요.

 

 

갱상도 문화학교 단장은 성씨고가의 내부 모두를 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 내부 모두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고 얘기하며 김량한 해설사와 함께 일행을 성씨고가로 안내했습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55호 창녕 성씨고가 (昌寧 石里 成氏古家)

성씨고가는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으로 풍수 연구가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어 주말이면 답사 팀이 찾을 정도로 유명한데 이곳은 화기가 충만한 화왕산과 마주 보고 있으며, 고택 앞으로 펼쳐지는 드넓은 평야는 풍요로움을 전합니다.

누마루를 자랑하는 아석헌(我石軒)이 가장 먼저 들어섰던 본가로 1855년경에 지었으며, 두 번째 집 석운당(石雲堂)은 1860년대, 연못을 중심으로 한 구연정(龜蓮庭)은 1890년대, 경근당(慶勤堂)은 1920년대에 지었졌다고 합니다.

최근 보수 후 현판이 바뀌었는지 전해오는 현판과 다른데요, 석운당은 석운재며, 慶勤堂은 敬勤堂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1만 평 규모의 한옥은 필요에 따라 조금씩 규모를 불려갔기에 전통과 격식에 꼭 맞추어 들어선 것이 아니며, 각 한옥채마다 당시의 유행에 따라 조금씩 그 모양과 형식이 다르기에 시대별 한옥 변천사를 한집에서 두루 관찰할 수 있는 성씨고가에는 그리 길지 않은 한국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대규모 한옥은 한국전쟁때 상당부분 소실되었다 최근 후손들에 의해 대부분 복원되어  보존가치가 인정돼 2004년 7월 14채 중 6채가 경남 문화재자료 355호로 지정되었으며, 후손에 의해 관리되고 있습니다.

 

아석헌

 

▲ 석운재(石雲齋)

 

오늘날 창녕군 농민들의 '효자상품' 양파는 성씨고가의 성재경 선생 부친에 의해 도입됐고 이후 성재경 선생이 재배에서 채종에 이르기까지 체계화했다고 합니다.

청소년들이 열광하는 아웃도어 노스페이스(영원무역)의 성기학 회장의 부친이 성재경 선생이며, 성씨고가는 성기학 회장의 본가입니다.

 

12월 19일 북한 김정일 위원장 사망소식에 우리 정부와 국민은 많이 놀랐으며, 지금도 북한의 사정을 예의주시하고 있는데요, 김정일의 첫 번째 부인인 성혜림의 생가가 창녕 성씨고가입니다. 생가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기에 제목은 본가로 합니다.

성혜림이라고 하면 모를 수 있지만, 성혜림은 유학중인 북한의 김한솔(김정일의 손자)의 친할머니며 김정남의 어머니로, 창녕 만석꾼의 딸로 가족이 월북하여 북에서 영화배우로 활동 중 김정일을 만났으며, 딸 하나가 있었지만 이혼을 하고 김정일과 동거하여 김정남을 낳았다고 합니다.

집의 역사가 곧 사람의 역사임을 증명하는 성씨고가입니다.

 

해설사님의 설명을 들어야 하는데 구연정 정원에 반해 사진찍기에 바빴던 고가 방문이었습니다.

구연정 연못은 한반도 모양이며, 배롱나무꽃이 필 때면 연못에 핀 개구리밥과 떨어진 붉은 백일홍꽃에 넋을 놓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했는데, 늦가을 구연정 정원에는 지지 않은 단풍잎만이 고즈녁했습니다.

구연정 연못위에 늘어진 소나무는 인위적으로 모양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휘어져 있었는데 해설사님께 따로 여쭙거나 듣지 못했습니다.

 

▲ 구연정

 

성씨고가의 집과 집 사이는 담장으로 경계를 했으며, 집의 뒷담장은 대나무가 대신하는데 대나무 숲이 있는 건 선조들이 직접적인 햇빛보다는 대나무 숲을 통과하는 그 은은함을 특별히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옥 입구나 누마루앞에 돌확이 있으며 대나무숲 입구에도 '확대'라는 이름의 세숫대야가 있습니다. 수도시설을 설치할 수가 없었던 시대에 곳곳에 무릎 높이 이상의 돌에다 둥근 모양과 복숭아 모양의 홈을 파서 물을 담을 수 있게 만든 것인데, 눈과 귀와 입, 손을 씻음으로 추함과 악함을 사하기 위한 상징성으로 둥근 모양은 남성전용, 복숭아 모양은 여성전용이었는데 복숭아는 또 다산을 뜻한다고 합니다.

 

 

경근당 주인 성낙안 선생은 1920년 근대 교육기관인 지양강습소(池陽講習所)를 열어 후학을 가르쳤으며, 성재경 선생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분으로 면장 시절, 자신의 곳간을 열어 춘궁기에 처한 농민에게 곡식을 나눠주면서 '나라에서 주는 것이니 아무 부담갖지 말라'고 하는 등 선정을 베푼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성씨고가를 처음 방문했으며 창녕출신이 아니었다보니 답사를 한 날에야 알았습니다.

 

 

▲ 경근당(敬勤堂)

 

1만 평의 성씨고가를 몇 시간만에 안다는 건 무리입니다.

50여 년 동안 방치된 성씨고가는 개화기에 지어진 한옥으로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충분히 있었으나 북한의 최고 실권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처갓집이라는 이유로 인해 누구하나 문화재로 지정하자고 이야기조차 꺼내지 못하다가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고 난 뒤 남북해빙무드가 전개됐고  관리인을 두면서 깨끗이 정비되기 시작했으며,  2008년 람사르총회를 대비, 2006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작업이 이뤄졌으며, 지금은 창녕의 보물같은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또 성씨고가는 전문관광해설사가 있는데, 우리를 안내한 김량한해설사입니다.

 

솟을대문의 잠금장치와 아래사람이 기거하는 방 등을 설명하는 모습인데, 건축과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많은 이야기가 있는 성씨고가지만 여기서 줄입니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