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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이야기/벚꽃 · 웅천요(熊川窯)

보개산(寶蓋山) 산지기 최웅택 사기장과 보낸 시간

by 실비단안개 2012.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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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배산은 부산 강서구와 경남 진해의 경계를 이루는 봉우리로 해발 479m로 야트막한 산으로 원래 명칭은 보개산(寶蓋山)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보물을 덮어 놓은 산으로 최근에는 보배산이라고 더 알려져 있습니다. 산 아래 가게의 간판에도 대부분 보배산으로 통일돼 있는데 '보개'든 '보배'든 여하튼 보물이 묻혀 있는 산인 것만은 분명한 듯합니다.

 

2월 25일 초등학교 동창 송희와 그의 지인 김상겸(한국 가수협회 경남지부 회장) 선생님과 지난해 문을 연 웅천도요지 전시관 관람 후 보개산 기슭에 있는 최웅택 사기장(이하 최웅택 선생님)이 운영하는 웅천 찻사발로 갔습니다.

전등이 켜져 있는 걸로 봐 가차운 곳으로 출타를 하셨겠구나 짐작하며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니 지금 요로 가는 중이니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뜰을 거닐거나 가마에 불을 지피려고 쌓아 둔 장작의 쓸모를 재며 선생님을 기다리니, 손에 묵직한 오죽(烏竹)을 들고 오셨습니다.

누가 오죽을 준다고 해서 심을 요량으로 가져 왔다고 합니다.

 

최웅택 선생님과의 인연도 제법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당시를 기억 못하시겠지만, 우리가 진해 이사 후 그해인가 그 다음해인가 광복절에 웅천요를 처음 찾았으며, 차 대접을 받고 다기세트를 구입했으며,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혼자 아주 가끔 웅천요를 방문하기도 했고 블로그 이웃, 우리 식구들과 웅천요를 방문했습니다. 마침 선생님께서 근처에 사는 내 친구와 친구사이라고 했기에 좀 가까워질줄 알았는데 몇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거리를 느끼니 역시 나 답습니다.^^

 

웅천요의 봄과 여름 풍경을 친구와 김 선생님께 설명하며 스산한 풍경을 덮고 싶어 수다스레 굴었습니다.

차를 대접하겠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초록기운 하나없는 잔디밭을 걸어 돌계단을 걸어 전시관으로 갔습니다.

전시관에서 마지막으로 차를 마신날은 2010년 6월 유장근 교수님이 이끄는 도시탐방대원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었는데 그때 두동 웅천도요지는 공사중이었으며, 그때의 인연으로 최웅택 선생님께서 유장근 교수님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전시관에 드니 도시탐방대팀과 차를 마실 때 보다 훨씬 많은 도편이 고름을 푼 듯 자유로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어머나~ 선생님 도편이 더 많아 졌네요?

선생님은 참으로 무뚝뚝 하기에 그저 예~ 하십니다.

혼자 보개산을 수 없이 올랐다는 증표입니다.

 

 

많은 도편과 함께 새로운 사진들도 액자에 정리되어 있었고 전체적인 분위기도 달라진 듯 했기에 연신 두리번 거렸습니다.

" 차 한 잔 하입시더."

선생님은 차주전자에 물을 끓여 마실 기회가 흔치않은 말차를 저었습니다.

 

 

근래에 선생님을 뵌 날은 웅천도요지 개관식날이었습니다.

당시 선생님께서 워낙 바쁘셨기에 인사만 잠시 나누었을 정도였기에 그날의 수고를 여쭙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문가가 지역에서 찻사발요를 운영하니 창원시에 큰 힘이 되었겠구나 생각했는데, 창원시에서 선정한 전문가들의 자문으로 웅천도요지가 건립되고...  전시품 구입 과정의 어려움 등을 말씀하시며 서운함을 떨치지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선생님의 고향은 (부산 강서구)송정이라고 합니다.

우리 어릴때와 마찬가지로 소 풀을 먹이며 자란 세대니 (당시 김해군)송정이나 (당시 창원군)웅동이나 가난한 살림살이었다 보니 모두들 일찍 철이 들기도 한 세대입니다.

 

선생님은 말씀이 참 없으신 분인데 그날은 어릴 때 이야기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었으며, 큰 책자를 주기도 했는데 아래는 그 책자에 실린 내용입니다.

 

송아지 고삐 잡은 어린 나뭇꾼과 최웅택의 삶

친구들 학교 다닐 시절 배고픔과 부러움으로 유년시절을 보낸 나는 타향에서 신문배달, 중국집 배달원을 전전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고달픈 생활이 계속되던 어느날, 우연히 만난 고향선배로부터 해군에 입대하면 기술을 배워 제대 후 상선을 탈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내 나이, 열여덟. 해군지원서를 내고 고향에서 기다리는 동안 송아리 한 마리를 구입하게 되었다.

매일 아침 지게에 도끼와 낫을 얹어 메고, 한손으로 송아지 고삐를 붙잡고, 보개산 활텃골로 올라갔다. 해가 서산에 기울때면 지게 가득 장작감을 지고 배불리 먹은 송아지 고삐를 잡고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어느 날 송아지를 묶어 놓고 나무하러 (두동)점골 쪽으로 내려가다 일본인들이 땅을 벌집 쑤시듯 파서 도자기 도편을 자루에 넣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도끼와 낫을 들고 가까이 가보니 나를 보고 놀라 기겁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산을 내려오자마자 마을 어르신께 이에 대해 물어 보니 임진왜란 때 이곳 도공들을 잡아가기 위해 온 일본인들이 도망가는 도공을 붙잡아 처참하게 죽였고, 억울하게 죽은 원혼은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 후로 비만 오면 밤중에 귀신 우는 소리며, 헛것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나는 누군가 제사를 지내주었냐고 물어보았고, 한 번도 제사를 지내준 사람이 없다는 말에 가슴이 저려 그날 밤 잠을 설치고 말았다.

 

며칠 뒤 해군 합격통지서와 입대 날짜가 잡혔다. 서둘러 송아지를 팔고, 몇 달간 장작을 팔아서 모은 돈으로 지게 가득 제사장을 봐와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달래기 위해 그 도요지로 가서 정성껏 제사를 지내고 나서야 기쁜 마음으로 입영을 준비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사를 지내는 동안 까마귀가 울고, 흐린 하늘이 맑게 갠 것은 내 마음을 알고 하늘이 화답을 해주신 것이 아닌가 싶다. 입영 후에도 휴가 때마다 그 곳을 찾아 제사를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어렸지만 깊은 의미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전역을 한 후 어릴 적 꿈꾸던 마도로스가 되었고, 추석, 설 때면 그곳 도공 분들을 생각하면서 이국땅 바다 위에서 고향땅 보개산 쪽을 향해 마음으로 합장하며 그분들의 넋을 위로하였다.

2년 뒤 오랜 고민 끝에 진정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였고 마도로스의 꿈을 접었다. '웅천 선조 도공들의 맥을 이어 가야겠다'고 결심한 나는 보개산 기슭에 가마를 묻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일본으로 끌려가 망국의 혼이 된 그분들의 공동묘지를 찾아가 참배 추모제를 올렸다. 그 뒤로도 해마다 비공식적이지만 보개산 도요지와 일본 히라도를 오가며 추모제를 지냈고, 8년전 이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지인들이 뜻을 같이해 동참하고 있다.

지금도 20여년전 그때를 생각하면 전율이 느껴진다. 모든 만남은 우연보다는 필연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도 '선조 도예인들이 나를 붙잡기 위해 필연적인 만남을 유도했고, 맥을 이어 줄 후예로 만들었구나'하고 느꼈기 때문이다.

웅천 선조 도예가분들이 납치되어 간 달 10월은 가슴이 저려오는 달이다. 가슴이 벅찬 달이다.

지난 설 명절에는 통도사 옥련암 법성스님이 추모상을 봐주어 기쁘게 추모제사를 올릴 수 있었다.

 

아- 떠나가신 님들이여

일본 히라도 공동묘지에서, 보개산 옛도요지에서 10월에 다시 만납시다-

 

운중월(雲中月) 차문화 공예연구소장 김동현 님은, "사람 가운데 삶속에서 어떤 사명적 가치를 발견하고 그 사명과 가치를 완수하고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고독한 길을 선택하고 자신의 전 생애를 그 일에 바치는 사람중 한 사람이 최웅택 사기장이다.

한 분야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 길은 아름다운 길이고 치열하고 힘든 길이다. 더욱이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우뚝서기까지는 그 힘든 길을 즐겁게 걸어 갈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성공이라고 말할 만 하다. 그런 의미에서 최웅택 씨는 성공한 찻사발 사기장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2007년 웅천도요지터 방문을 선생님께 알렸을 때 최웅택 선생님은 대나무와 무궁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웅천 선조 도공들이 잠든 히라도 공동묘지 묘석을 고국 웅천 옛 가마터 비석밑에 묻고 주변에 대나무를 심었는데, 대나무 뿌리를 (일본에서) 밤새 다듬어 소중히 모셔와 심었으며, 조국의 무궁화 묘목을 웅천 선조 도공이 잠든 일본 히라도 공동묘지에 심었는데 잘 자라더라는 이야기들을.

 

전시장엔 웅천도요지의 가마터 비석과 대나무를 배경으로 선생님이 함께 풍경이 되어 있는 사진과 히라도 공동묘지에서 꽃을 피운 무궁화 사진도 걸려 있었습니다.

대나무 뿌리를 숨기듯 품어 와 심었는데 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자랐으니 선생님은 대나무를 볼 때 마다 가슴이 뜨거웠을 것이며, 무궁화꽃이 필 때도 같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 웅천요 전시관 액자사진 촬영

 

그런데 웅천도요지 가마터 복원공사를 하면서 대나무는 포크레인에 밀렸고 가마터 비석은 정리되지 못한 채 누워 있습니다.

선생님은 대나무 뿌리가 있으니 살아 날 거라고 했지만, 눈길은 도편에게만 애궂게 주었기에 앉아 건물짓고 비석 세우는 관계자들이 참으로 야속한 시간이었습니다.

현재 웅천도요지 가마터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니 하루 빨리 대나무와 문화재비석이 제 자리에 세워져 조선 도공의 혼령등이 위안 받기를 바랍니다.

 

▲ 2010년 6월

 

▲ 2012년 12월 4일

 

▲ 2012년 3월 1일 포스트 등록 후 웅천도요지로 갔습니다. 잘못 된 기록으로 웅천도요지 관계자들이 벌을 빋으면 아니 되기에요.

문화재등록비와 겨우 남은 대나무(붉은 동그라미)를 확인하니 예전과 비슷한 자리에 등록비가 세워졌으며, 안내판은 아직 공사관계로

정리되지 않았더군요. 현재 가마 복원공사와 테크로드, 가마가 비에 젖지않도록 작업중이었습니다. 히라도 공동묘지 묘석을 등록비

밑에 묻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은 다시 철관음을 내렸습니다.

언젠가 두레헌에서 철관음을 마신적이 있는데 당시 차 맛 이야기입니다.

향기속에 맛이 있고, 맛 속에 향기가 있다고 할 정도로 매혹적인 향으로 첫 잔을 버리고, 둘째 잔부터 마시는 철관음은 주로 작은 잔을 사용하는데, 작은 잔으로 여러번 우려서 마시는 방법을 공부하듯 마신다고 해서 공부차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작은 잔이 아닌 사발잔에 철관음을 주었기에 두손으로 받아 조심스레 마셨습니다.

 

 

EBS 한국기행 방송 안내를 했습니다.

2월 27~3월 2일까지 창원편이랍니다.

27일 아차하며 EBS를 켜니 방송이 끝났기에 둘째날인 28일엔 티비앞에서 지키고 있었더니 '마산의 맛 아귀'였습니다.

3월 1일 방송되는 4부는 웅천 찻사발편으로 '웅천, 찻사발 맥을 잇다'가 방송됩니다.

마침 삼일절이고 하니 일본과 우리나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며 시청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 방송 안내 : http://home.ebs.co.kr/ktravel/index.html

 

철관음 두세잔을 마시며  이야기는 이어졌고, 우리는 웅천요에서 가까운 밥집으로 옮겨 김치찌개를 먹으며 이야기를 계속 이었습니다.

웅천도요지 전시관의 미래를 함께 이야기 하며.

 

전시관 넓은 창은 앞산을 끌어 들여 정원을 만듭니다.

봄꽃 흐드러진 그날 얼마나 멀미가 나든지.

 

3월 말경 가마에 불을 지필 거라고 했습니다.

선생님 꼭 연락 주셔야 해요?

보개산 함께 타 흙을 채취하고 싶고, 물레질 구경도 하고 싶고, 밤새 반야심경 묵향도 맡고 싶지만 모든 것 삼키고 가마에 불 지필 때 라고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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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요와 최웅택 사기장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웅천요 웅천차사발'에서 옮겨 적습니다.

 

망국의 혼이 된 400년여 전 웅천 사기장은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웅천지역(현경남도문화재160호)은 15~16세기경 분청사기(이도차완, 귀얄차완, 웅천차완)를 제작하는 등 다양한 다완 들을 제작하여 어느 지역보다 활발한 도예문화가 꽃피웠던 지역이다. 특히 대일무역의 삼포를 중심으로 옛 도공들이 예순혼과 장인 정신을 담아 긍지 있는 삶을 영위했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으로 전쟁의 참화가 닥쳐 조선의 도공들을 납치·유린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기도 했는데, 이 곳 웅천에서도 그런 불행이 발생하여 선조 31년(1598년)왜군이 퇴각하면서 웅천도공을 포함한 125명이 마쯔우라 시게노부(히라도 섬 영주)에게 피랍되었다. 그 중 일부 도공들은 끝까지 항거하다 그 자리에서 참살되고 일본으로 끌려가던 뱃길위에서 또한 일부의 도공들이 살해되는 참화를 겪었다.

 

  히라도 섬에 납치된 도공들은 먼저 동굴에 수용시키고 도자기를 굽도록 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한 곳에 모아 고려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촌락을 형성하고 그들이 선호하는 찻사발을 구워내게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13킬로 떨어진 야스만다케 산 중턱에 가마를 차리게 했다.

  끌려간 도공들은 고향을 애타게 그리워한 나머지 불상을 동굴 속에 모셔두고 고향을 향하여 기원을 올리기도 했으며, 이름 모를 한 웅천여인이 사당을 세우고 예술혼을 불태워 후일 도조신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또한 웅천 선조 도공으로 이름을 전하는 거관 후손들이 웅천 신사를 세우기도 하는 등 그들의 망국에 대한 한과 설움을 인할 수 있는 유적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400여년 전 웅천가마터에 불이 꺼지고 도예의 맥이 끊어진 것을 가슴아파 하다 20여년 전부터 다시 가마에 불을 지핀 후 비공식적으로 300년을 먼 이국 땅에서 떠돈 망국의 혼이 된 선조 사기장의 추모제를 해마다 올렸다. 그들의 혼을 위로하고 보듬는 후예가 대를 잇고 있으니 그 옛날 웅천사기장은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조선 웅천 도공 거관 대 후예 최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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