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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가본 곳

'고향의 봄' 정말 꽃대궐일까, 김종영 생가를 찾아

by 실비단안개 2012.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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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월, 창원 고향의 봄 도서관에서 이원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선포식과 흉상제막식후 '고향의 봄' 무대가 된 창원 소답동 김종영 생가를 방문했으며, 당시 봄이 아니었기에 따스한 봄날 이곳을 다시 찾으리라 약속했습니다.

그리곤 두 번째 봄 4월 22일, 일기예보와는 달리 하늘이 개이기에 창원행 757번 버스를 탔습니다.

 

애국가보다 많이 불린다는 노래 '고향의 봄'은 이원수 선생이 15세 때 지은 시에 홍난파가 곡을 붙여 만든 노래입니다.

마산에서 소년회 활동을 하던 이원수는 어린이운동의 선구자인 방정환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잡지 '어린이'지에 투고 당선되었으며, 당시 마산에서 활동하던 이일래(산토끼 작사)선생이 곡을 붙여 마산일대에서 불려지다 1927년 홍난파 선생이 다시 곡을 붙였습니다.

 

'고향의 봄'의 배경이 된 곳은 경남 창원 소답리며 소답리 일대의 아름다운 경험을 풀어낸 시가 고향의 봄입니다.

꽃대궐의 무대는 조각가 김종영 선생의 종택입니다.

이원수 선생은 '월간소년' 1980년 10월호에 '자전회고록-흘러가는 세월 속에'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습니다.

"내가 난 곳은 양산이라고 했다. 양산서 나긴 했지만 1년도 못되어 창원으로 왔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난 곳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 봄>이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 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 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아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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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 올라 천부인권님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김종영 생가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한국 근대 조각의 선구자 김종영 생가 앞에는 아름드리 큰 나무가 있는데 수령 300년 이상 된 느티나무며, 증조부 모연 김영규(1857-1931)선생의 송덕비와 등록문화재(근대문화유산)200호 안내 표지판이 있습니다.

 

 

 

파일 참고 :

200509--(등록고시)근대문화유산.hwp

 

 

돌담엔 담쟁이넝굴이 파릇하며 담장안쪽엔 보리수나무가 또 다른 울타리처럼 빙둘러져 있습니다.

 

 

 

돌담장을 돌면 벽돌시멘트담장이 나오며 또 다른 대문이 있는데, 이 문도 굳게 닫혀 있었지만 또 허탕을 칠 수 없어 길을 지나는 할머니께 주인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여쭈니 할머니께서 친절히 (현재) 관리하는 분의 영업장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송덕비가 있는 대문쪽의 가로등 위치와 함께 현재 이용하는 대문과 담장 등이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등록문화재가 맞긴 맞나 할 정도였습니다만, 관리를 하는 분이 친절했기에 오랜시간 마당을 서성이며 여러 풍경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동네가 변했듯이 고향의 봄 무대가 된 소답동 일대도 도시화되어 그 옛날 꽃대궐은 우리들 마음에 있으며, 변하며 사라지다보니 더 그리운 게 고향의 봄 풍경일 겁니다.

좀 늦긴 하지만 봉숭아꽃이라도 만날 수 있기를  바랐는데 김종영 생가엔 복숭아나무는 없었으며, 매실인 듯한 열매가 달려있었기에 매화나 벚꽃이 필 때 생가 방문을 한다면 작은 꽃대궐이라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외부와 마찬가지로 담장안도 관리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는데 창원시에서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재 관리를 하는 분이 식물을 좋아하다 보니 여러 종류의 봄꽃이 피어 있긴 했습니다만 (관리인의 말이)400여평이 되다보니 관리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등록문화재(근대문화유산)란 우리 근대사(1876년 개항 - 6.25전쟁까지)에서 지역 역사와 문화의 뿌리가 되고 한 시대의 조형의 모범이 되며, 학술적 가치가 큰 건축물 중 보존해야 할 필요가 있는 문화재를 등록 관리하는 것으로 2001년 도입되어 현재 전국적으로 350여 점이 지정되어 있다고 했는데, 이 가옥은 전체적인 형상은 팔작지붕으로 구성이 되어 있고, 조선후기 전통가옥으로 전통적인 형태를 유지하면서 수납공간과 높은 다락, 미서기 유리문과 출입문 상부의 채광을 겸한 환기창 등 현대적인 주거요소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건물로 인물사적 건축사적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안채 유리문 윗쪽에 근대문화유산 표시판이 있습니다.

 

 

 

마루를 사이에 두고 다락이 있었지만 이 또한 관리가 되지 않았는데, 깊은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전체적으로 관리가 부족했기에 내내 안타까웠습니다.

고사리, 무말랭이 등이 말려지는 풍경과 목단을 비롯 풀꽃이 핀 마당과 화단 풍경은 영락없는 고향의 봄인데.

 

 

 

관리와 함께 하나 더 안타까운 건 김종영 생가가 분단가옥이라는 겁니다.

현재 남아 있는 본채는 산업화에 따라 아파트에 둘러싸여 있으며, 2층 누각이 있는 별채 사미루와의 사이에 소방도로가 있기에 두 건물은 마치 다른 건물같습니다.

관리 등 모든면에서 진해 근대문화유산과 비교가 되기에 창원시가 갑갑합니다.

 

▲ 본채 ▼ 별채 사미루

200509--(등록고시)근대문화유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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