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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100년 영도등대에서 달팽이 되는 줄

by 실비단안개 2012.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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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영도구 태종대에 있는 영도등대(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2동 1054번지)입니다.

1906년 태종대 동남쪽 끝에 설치되어 지금까지 부산항 및 부근을 항해하는 선박의 안전운항에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 등대로서 천혜의 자연경관과 어울려 부산항을 지키고 있는 등대입니다.

1906년 12월에 설치되어 지난 100여년 동안 부산항의 길목에서 불빛을 밝혀왔으나 시설 노후로 2004년에 새로운 등대 시설물로 교체되었는데, 새로 건립된 영도등대는 등대시설, 예술작품 전시실, 자연사 박물관 등 3개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등대시설은 기존 등대와 같이 백색의 원형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높이 35m며 불빛은 40km까지 나아간다고 합니다.

가덕도 등대가 1909년에 설치되었으니 영도 등대가 형이 됩니다.

 

철로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등대 역사도 일본에 의해 세워졌는데요, 1876년에 이루어진 강화도조약은 우리나라를 쇄국주의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한 사건이며, 그뒤 개항장을 드나드는 제국주의 침략세력은 이권을 먼저 차지하려고 싸움을 벌였습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용기를 얻은 일본은 개항장을 통하여 한일 양국간의 선박 왕래가 날이 갈수록 빈번해졌는데, 한국 연해의 요소에 등대나 초표가 설치되지 않아 불편한 점이 많다며 등대건립을 촉구하는 외교문서를 보내왔으며, 또한 등대건설위치선정을 위한 측량선의 인천 도착 날짜를 통보하니 협조원을 보내라는 독촉도 하였으며, 각 항구에 출입하는 상선으로부터 징수하는 관세를 등대건설에 충용하라는 제의도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러시아 영국으로부터도 비슷한 요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등대의 효용성은 알고 있었지만 극심한 재정난으로 난감해 오던 우리 정부는 결국 열강의 강권에 못 이겨 1902년 인천에 해관등대국(海關 燈臺局)을 설치하고 그 해 5월부터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자(北長子) 등대와 백암(白岩) 등표(燈標) 건설에 착수해 1903년 6월에 이를 각각 완공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등대의 효시로, 결국 우리 나라를 넘보던 열강들의 이양선(異樣船) 길잡이 역할을 해 주기 위한 바다의 이정표(里程標)로 등대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부산 태종대 이야기를 다시 하겠지만 태종대는 광역시의 유원지답게 태종대 등대쪽에 군부대가 있음에도 일몰전까지 등대가 개방되어 있었기에 누구나 관람이 가능했습니다.

등대로 가는길에 내려다본 망부석과 신선대입니다.

이날 덥기도 했지만 많은 시민들이 바다와 등대를 찾았는데 신선대위로 갯방풍, 갯까치수영, 돌가시나무, 천남성이 꽃을 피웠기에 오랜만에 만나는 갯꽃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했습니다.

 

 

 

등대로 가는 계단옆엔 바다의 동식물 등이 안내되어 있으며, 매점에는 시원한 음료 등을 팔기도 했기에 우리는 아이처럼 슬러시를 쪽쪽 빨며 계단을 내려 갔습니다.

용두산 공원을 오를 때, 부산은 계단에서 시작하여 계단으로 끝난다고 했는데 영도등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해기사 명예의 전당이 있는 '바다의 혼'입니다.

바다의 혼은 2009년에 설치되었으며, '해기사 명예의 전당' 조형물은 우리 해양의 역사를 지키고 조국과 민족을 보호하는 수호자의 상징으로서 해기사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구상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주 조형물은 '해기사 명예의 전당' 중앙에 커다란 원형의 키를 바닥형태로 하여 그 위에 닻의 형상을 조형물로 상징화 하였으며, 닻의 아래 보습 부분은 바이킹선과 판옥선의 이미지를 해학적으로 조형화 하였습니다. 주 조형물의 오른쪽으로 '해기사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인물의 흉상과 업적을 알 수 있는 명예의 공간으로 해양 역사와 교육의 장소로서 역할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해기사 명예의 전당에는 6인의 흉상과 인물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요, 오른편부터 양무공 신순성, 금농 유항렬, 오당 황부길, 거성 박옥규, 해당 이시형, 소창 신성모입니다.

평생 바다와 함께 한 6인 해기사 개인 약력이며 흉상은 2009년~2012년 5월에 건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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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공 신순성

양무공 신순성은 1878년 1월 27일 서울 출생, 한성일어학교 재학 중 관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 중학과정과 동경상선학교를 졸업(1901)하고 조선인 최초로 정규 기선교육을 받은 감종 해기사가 되었다. 귀국 후 대한제국 최초의 근대식 군함인 양무호 함장, 최초의 신조기선 광제호 선장, 조선우선(주) 최초 조선인 선장(회령환)으로 승무하는 등 항상 최초라는 수식어하 따라 다녔다. 광제호 승무 시에는 인천해원양성소 항해학 실습교관을 겸직하면서 후진양성에도 기여하였으며, 일제의 강점으로 대한제국이 사라지고 광제로 선미의 태극기마저 일장기로 교체해야 할 운명에 이르자 신순성은 당시의 태극기를 소중히 챙겨 자택에 비밀리에 보관해 왔으며, 현재 실물 그대로 인천개항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렇듯 애국정신을 가진 근대 한국해운의 개혁자였지만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4년 2월 7일 영면하였다.

 

금농 유항렬
금농 유항렬은 1900년 11월 22일 충남 공주 출생, 공주보통학교, 나고야중학교, 동경고등상선학교 졸업(1925년), 조선우선(주) 항해사를 거쳐 영강환, 평안환, 회령환, 한성환 등에서 선장으로 승무하였다. 1937년 일제의 견제를 극복하고 조선인 최초 도선사 면허를 취득하여 인천항 도선사로 활동, 정년퇴임 때까지 약 30년 동안 2,000척에 이르는 입출항 선박을 도선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일본인 도선사들이 돌아간 후 홀로 인천항을 지키며 구호물자를 실은 화물선과 미군함 등 50여 척을 안전 신속하게 도선한 공로로 미군정 항만당국자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한국전쟁 중 1.4후퇴 때에는 인천항을 철수하는 유엔군 군함과 여타 선박들을 마지막까지 도선한 후 피난길에 나설 정도로 장인정신과 민족의식이 투철하였다. 일제 강점기, 미군정, 대한민국에 걸쳐서 해기사의 꽃인 도선사로 일생을 보내고 1971년 12월 6일 영면하였다.

 

오당 황부길

오당 황부길은 1905년 5월 25일 함북 경성출생, 경성고등보통학교와 동경고등상선학교를 졸업하고 대판상선회사 등에서 10여년 승무하였다. 해방 후 조선우선(주) 선박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1948년 건국과 더불어 교통부 해운국장(초대)에 임명되어 LST형 9척과 FS형 10척을 도입하는 등 우리나라의 선복확충에 공헌하였으며 대한해운공사와 대한조선공사 설립을 추진, 국영기업을 민영화하였다. 한국해양대학 학장(4대,6대) 재임시에는 국고와 UNKRA자금을 확보하여 교사를 신축하는 등 해운산업의 역군인 해기사 양성에 기여하였다. 대한유조선(조) 사장재임 중 허정 과도정보의 해무청장으로 발탁되어 한국선급협회의 창립을 주도하였고 부산항도선사, 한국해기사협회 회장(9대,10대) 등 해기사로서 보기 드물게 선장은 물론 산,학,관에 걸쳐 다양한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1995년 11월 13일 영면하였다.

 

거성 박옥규
거성 박옥규는 1901년 12월 16일 전남 거문도 출생, 거문공립보통학교와 조선총독부 교통국 고등해원양성소를 졸업하고 조선우선주식회사 등에서 20여년 승무하였다. 해방 후 초대 부산항만청장 대한조선공창장을 역임하였고 1949년 해군(중령)에 입대하여 인수함정의 단장 및 함장, 감찰감, 인사국장, 작전참모, 함대사령관을 거쳐 제 2대 해군참모총장(중장)을 역임하였다. 1952년에는 현역(준장)의 신분으로 고려호 선장에 발탁, 화물선 최초로 태극기를 달고 태평양을 횡당하여 한국해기사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해군의 창립과 육성, 한국 전쟁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금성충무, 금성화랑, 금성을지, 은성태극무공훈장과 미국 동성무공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전역 후 초대 중앙해난심판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71년 1월 28일 작고, 현재 국립서울현충원에 영면하고 있다.

 

해당 이시형

해당 이시형은 1910년 5월 26일 평남 개천출생, 신의주 고등보통학교와 동경 고등상선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우선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약 9년간 승무하였다. 태평양 정쟁에 징용된 선박에 승무하면서 해운력이 국가 흥망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통감한 해당은 해방 직후 미군정 당국을 설득하여 1945년 11월 5일에 경남진해에 해양대학을 창립하였다. 그 후 초대, 3대, 5대, 7대 학장을 역임하면서 해양대학의 존속과 발전에 혼신을 다하여 오늘날 한국해양대학이 세계 유수의 해양전문인력양선기관으로 자리매김하는 초석을 놓았다. 1956년 학장직을 물러난 후 다시 바다로 돌아가 정년이 될 때까지 10여년을 제자 해기사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승무하였다. 한국해양대학은 학교 창립과 발전 등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1970년 「명예 공학박사」학위를 수여하였으며, 1985년 4월 9일 영면하였다.

 

소창 신성모

소창 신성모는 1891년 5월 26일 경남 의령 출생,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제 강점기에 러시아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독립자금을 전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뒤 영국으로 유학하여 런던항해학교를 졸업하고 선장으로 발군의 실력을 발휘, 최고의 명예인 대영제국의 Exstra-Master 자격을 취득하였다. 해방 후 귀국 내무장관, 국방장관 겸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하였고 퇴임 후 대통령 자문기구인 해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평화선 선포, 해양경찰대창설, 해무청 설치 등에 기여 하였다. 1956년 한국해양대학 제 8대 학장에 취임하여 해군 예비원령 제정시행, 실습선 반도호 확보 등 해양한국 건설이 초석을 닦았다. 1960년 5월 29일 작고, 현재 국립대전현충원에 영면하고 있다. 정부는 자주독립과 국가발전 등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출처 : 영도등대 해기사 흉상에서)

 

등대 입구에 SEA & SEA갤러리와 사랑의 우체통이 있습니다.

우리가 영도등대에 갔을 땐 이현서 개인전이 있었으며, 갤러리는 15일 기준으로 무료대관이 가능합니다.

등대모양의 '사랑의 우체통'은 거친파도가 넘실거리는 망망대해에서 국가의 발전을 위하여 일하는 선원들에게 사랑의 메세지를 전달하는사랑의 우체통입니다.

- SEE & SEA갤러리 소식 : http://www.yeongdomcs.or.kr/index.asp

 

 

영도등대입니다.  영도등대의 정식 명칭은 '영도 항로표지관리소'로 영도 항로표지관리소가 하는 일이 안내되어 있었습니다.

영도등대는 1906년 12월 우리나라에서 10번째로 건립 되었으며, 세계 각국의 선박이 우리 등대를 보고 부산항을 찾아오고 있습니다. 모든 등대는 국제적 약속에 따라 각기 고유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 등대는 다음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형상표지 : 등대구조물은 흰색으로서 항해자의 식별이 쉽도록 하였습니다.

광파표지 : 등대불빛은 프리즘렌즈 등명기를 사용하여 매 18초마다 3번연속 발사하며 빛을 25마일(42.3KM)까지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음파표지 : 안개, 비, 눈 등 시야가 흐릴 때 전기혼을 이용하여 매 45초마다 5초동안 소리를 내어 5마일(9.26KM)까지 들리도록 하였습니다.

전파표지 : 인공위성에서 GPS 위치정보를 수집하여 오차를 수정하여 이용자에게 실시간 제공함으로서 정확한 위치를 측정할 수 있도록 DGPS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시설로는 자연사 전시실, 해양도서실 및 정보이용실, 해양영상관 등이 있으며, 등대아래의 배모양건물은 '푸른바다 카페'입니다.

 

 

 인어상입니다.

동남아 친구들이 많이 왔었는데 그 친구들이 인어상의 가슴과 엉덩이 등을 쓰다듬거나해 보기에 좋지 않았으며, 이 친구들은 등대를 오르는 내내 떠들기도 했기에 신경이 많이 쓰였습니다.

타이타닉하면 떠오르는 포즈를 취하는 모습은 위험한 행동같지요.

 

 

가덕도 등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영도 등대를 오릅니다.

등대 전망대로 가는 계단에는 여러나라의 선박이 소개되어 있는데, 임진왜란시 우리나라에 거북선이 있었다면 일본에는 '아다케'가 있었는데 선수부분은 우리의 거북선과 비슷하게 龍이었습니다.

 

빨려 들어가는 듯 해 마치 달팽이가 되는 듯 했습니다.

그래도 할짓은 다 하는데요, 아래를 보고 찍을때는 아찔하기까지 했습니다.

 

 

등대전망대에서 아래를 본 풍경입니다.

오른편으로 우리가 걸었던 계단이 있으며, 푸르고 붉은 원에 뿔이 나 있는 조형물은 '무한의 빛(이원경)'으로 두 원의 겹침은 푸른 원이 밀어 붉은 원이 앞으로 나가는 듯이 보이게 하여 움직임의 흔적으로 이어지며, 푸른 원은 바다와 하늘을, 붉은 색은 태양과 동백꽃을 상징하며, 또한 영원한 우주와 오대양 육대주를 나타냈다고 합니다.

가운데 봉은 등대의 빛을 상징하며, 바다와 하늘을 뚫고 무한 우주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의미와 세계로 향한 해양국가로서의 힘찬 이미지를 같이 표현했는데 전체적으로 자연 암벽을 뚫고 나온 형상으로 자연과 조형의 일체성을 유도 하였으며, 문과 같은 개념으로 작품과 사람이 함께 어우러지는 친근감을 도모하였다고 합니다. 예술인의 마음을 읽는 일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왼편을 보면 절경과 함께 오륙도가 보이며 전망대 바로 아래에선 해산물 등을 팔기도 하며 유람선이 수시로 드나듭니다.

- 영도 해양문화공간 : http://www.yeongdomcs.or.kr/guide/guide_1.asp

 

 

▲ 아래에서 올려 본 모양

 

피곤하여 등대아래의 바다쪽엔 내려가지 못 했지만 식구들과 오랜만의 나들이었기에 옛이야기를 하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곳 진해로 오기전에 해양대학교 근처에 살았었는데 부산은 아이들이 태어난 곳이기에 아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고향인 셈입니다.

그때는 밤에도 자갈마당으로 바람쇠러 다니고 했으며, 하리선착장에서 대게나 장어회를 먹기도 했기에 출출하여 장어회를 먹기위해 하리선착장으로 가니 이곳도 개발의 바람은 피하지 못 했더군요.

그래도 해양대학교가 보이는 2층에서 장어회를 먹고 함지골 절영로와 남항대교를 타고 돌아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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