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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7주갑 특별전, 일본인이 올까/부산박물관

by 실비단안개 2012.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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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어렸을 땐 숙제를 위해서라도 방학이면 가야 했던 부산박물관이었는데 부산박물관 다녀온지가 언제인지 기억에도 없을 때,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 카페에 부산박물관 임진왜란 특별기획전시회 안내가 올랐습니다.

우리 평생에 한번 맞는 임진년이며, 1592년에 임진왜란이 있었으니 올해는 7주갑이 되는해이기에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에 대한 학술회와 강의 등이 어느해보다 많으며,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전시회는 안동 국학진흥원에서 '임진전쟁, 그리고 420년의 기억' 특별전이 있으며, 부산박물관에는 '임진왜란' 특별기획전시회가 7월 29일까지 있습니다.

 

한꺼번에 여러가지를 하지도 못 하지만 기억도 오로지 하나만 하는 편이기에 이배사카페의 임진왜란 특별전 안내확인후 잊고 있었는데, 대연동 문화골목에 들어서니 전시회 포스터가 있었기에 아~ 박물관 가야지 하게 되었습니다.

부산박물관 역시 대연동에 있기에 문화골목에서 걸어 2~30분 거리에 있기에 도시구경을 할겸 걸었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조선건국(1392) 200년만인 1592년(선조 25년)에서 1598년(선조 31년)까지 2차에 걸쳐 왜군이 우리 나라에 쳐들어온 싸움으로 임진년에 일어났다 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하며, 정유년에 또 다시 쳐들어온 싸움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하지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기간 7년을 합하여 인진왜란 7년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조선은 선조 때에 접어들어 양반들이 당파 싸움을 일삼으면서 국방을 소홀히 하였는데 이이(李珥)가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국방의 중요성을 역설해도 지배 계급들은 도리어 배척하는 실정이었습니다.

 

이때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을 통일하여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여 대륙 침략을 꿈꾸게 되었는데, 처음 의도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침공하자는 데에 있었기에 조선에 사신을 보내 길을 내줄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원정군을 편성하여 1592년(선조 25년) 4월 조선을 침공했습니다.

 

7년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조선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으며, 경제적 파탄과 사회 질서의 붕괴를 가져왔으며, 인명손상과 문화재 손실이 컸습니다.

일본은 조선백성을 포로로 데려다 경작 노동과 노예로 매매했고, 납치당한 유학자, 도자기 기술자는 일본의 활자, 서적, 도자기업을 발전시키는데 한몫했습니다.

 

박물관으로 가는 도로변에 임지왜란 전시기가 나부꼈으며, 부산박물관 정면에 전시회 안내가 있기도 했으며, 전시는 특별기획전시실에서 합니다.

 

 

- 임진왜란 7주갑 특별기획전 2012년 6월 5일~7월 29일

부산박물관 : 부산 남구 유엔평화로 63 (0511-610-7111)

 

안내를 하는 분에게 다가가, "박물관 전시품은 사진 찍으면 안되지요?"하며 웃으니, 웃으며 "후레쉬 사용않고 찍으면 됩니다" 하더군요.

하여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안내에는 한글과 함께 일본글이 있었기에 큰늠이, 일본사람들이 관람을 올까 하기에 안골왜성 탐방을 하던 일본인 교수가 생각났기에 그늠들이 어떤 늠들인에 하며 분명 올거라고 했습니다.

 

전시는 제1부 '임진왜란과 부산', 제2부 '전쟁이 남기다', 제3부 '전쟁을 기억하다'로 기획되어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곳이면서 왜적이 마지막으로 물러간 장소인 부산과 관련된 유물들을 중심으로 전시되는데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육군박물관, 부산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 부산 충렬사, 현충사, 천곡 송상현 종가, 상곡 마씨 종가 등 전국 17개 기관 및 종가에서 소장한 임진왜란 관련 유물 200여 점을 공개하였습니다.
전시장에서 육군박물관, 송상현 종가, 울산 박물관이 소장한 각기 다른 '동래부 순절도'와 육군박물관이 소장 중인 '부산진 순절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이 소장한 '임진전란도'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국내에 있는 5점의 순절도를 처음으로 한 곳에 모아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임진왜란과 부산

육군박물관 소장 '동래부 순절도(東萊府殉節圖)'입니다.

보물 392호로 선조 25년(1592) 4월 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에 대응하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과 군민들의 항전 내용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비단 바탕에 그린 이 그림은 숙종 35년(1709) 처음 그려진 것을 영조 36년(1760) 화가 변박(卞璞)이 보고 다시 그린 그림으로 크기는 가로 96㎝, 세로 145㎝로 위에서 내려다 보는 듯한 기법을 사용하여 치열했던 교전의 장면을 화폭에 나타냈습니다. 중심에 동래성이 둥글게 자리잡고 있고 남쪽 성루를 중심으로 동래 병사들이 수비하고 있으며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왜병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성곽 아래쪽으로는 왜군과 죽음의 결전을 벌이는 장면이 있고, 성곽 안쪽 중심에는 붉은 조복을 입고 북쪽을 향해 앉아있는 송상현의 순절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북문 밖으로는 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경상좌변사 이각(李珏)의 무리들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참고 : 다음 문화유산)

 

 

왜군이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내놓아라"고 하자, 동래부사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는 글을 쓴 목패를 적중에 던져 단호한 항전의지를 표시했습니다.

그러자 일본군은 3개 대로 나누어 동래성을 포위하고 전면공격을 개시하여 성벽을 파괴하여 난입해 순식간에 성내는 대혼란속에서 아비규환의 대접전이 벌어졌지만 결국 함락되었습니다.

 

부산 충렬사 소장 다대진첨절제영 투구와 갑옷입니다.

 

 

동래읍성 해자발굴 현장 사진을 관람하는데 일본말이 들렸기에 돌아보니 일본인 몇이 관람을 왔는데, 그들은 수백년이 흐른 지금도 조상의 만행에 대해 부끄럽거나 죄송한 마음이 없는지 웃으며 관람을 했기에, 연신 "나쁜놈들"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우리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 하는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한달도 안되어 영토의 1/3이 일본에게 먹혀들어 갔으며 제대로 무능한 선조 임금은 의주로 피란을 갔는데 그 임금의 도장인데, 임금의 도장을 '어보'라고 합니다.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저항은 민중들에게 괭이, 낫, 곡괭이 등을 들게 했지만 휘두르는 적의 칼날에 온 가족이 다 죽어 곡해 줄 사람조차 남기지 못한 집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2007년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 현장에서 인골과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동래읍성의 해자로 밝혀졌는데, 동래읍성 전투에서 죽거나 처형 당한 동래읍성 병사들과 백성들을 왜군들은 해자에 버리고 메운 것으로 추측합니다.

 

왜병은 어린이와 여성 등 힘 없는 백성들까지 죽여 해자에 무더기로 내던졌는데, 5살 미만 유아의 인골, 왜병이 꿇어 앉아있거나 고개를 숙인 여인의 머리를 위에서 두 번이나 칼로 벤 것으로 보이는 인골도 있는데 100여구의 인골과 칼과 화살촉 같은 무기류도 나왔습니다.

이 참혹한 희생으로 오늘날 한반도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 해자(垓字) : 성벽주변에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자연 하천 등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성의 방어력을 증진시키는 방어시설의 하나입니다.

아래는 진해 웅천읍성 동벽 해자로 바닥에는 돌이나 목익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임진왜란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왜성인데, 왜성은 군사적 목적으로 축성된 이외에 문화적 약탈과 인적 약탈의 거점이었습니다.

가까운 곳에 웅천왜성과 안골왜성, 가덕왜성이 있는데, 일본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 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한성, 평양에 이르는 지역에 성을 축조했습니다.

임진왜란은 조선인과 조선의 문화가 일본에 의해 포획당하고 짓밟힌 기간으로 이는 왜성을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조선의 불교문화재와 기록물 등 왜성을 거점으로 많은 문화재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도공과 유학자, 세공이나 바느질에 능한 기술자 등 일본으로 잡혀가거나 조선인과 서양의 포르투칼 상인에게 가장 값싸게 팔려가는 조선인 노예를 포획하고 모집하는 노예상인들의 거점이 바로 왜성이었다고 합니다.

 

- 가덕왜성 답사 안내

   7월 14일 토요일 : 이배사 카페 참고(http://cafe.daum.net/jjmkssm1545-1598/dVPf/179)

 

 

 ▲ 조선의 도자기 등을 훔쳐나르는 왜선

 

전쟁이 남기다

임진왜란 7년간의 전쟁을 치른 후 조선사회는 전화에 따른 직접적인 인명 피해는 물론 전국적으로 농경지가 황폐화되었습니다. 또한 국가재정을 마련하기 위한 납속책의 시행과 전쟁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신분에 관계없이 특전을 주거나 면천의 혜택을 주어 신분 제도가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전란동안 민간의 생활은 더욱 처참해져 수만명의 백성이 노예로 끌려갔으며, 문화재의 피해도 극심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많은 건축물이 소실되었고 수많은 서적과 미술품이 없어졌거나 약탈당했으며, 역대 실록을 보관하던 사고도 전주사고본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동아시아 문화 후진국이었던 일본은 이 전쟁을 통해 조선에서 약탈해간 활자, 서적, 도자기, 그림, 그리고 납치해 간 유학자와 도공을 비롯한 많은 기술자들을 통해 도쿠가와 시대의 에도문화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의 유학자 강항과 홍호연 등은 일본에 유학을 전수했고, 도공 이삼평은 일본 도자기 시조가 되었습니다.

 

조선백성이 일본의 포로가 된 반면 일본인 역시 투항하는 자들이 늘어 났는데, 그들중 조선의 언어와 습속에 익숙한 자를 골라 통역이나 외교업무에 종사케 하거나 첩자로 활용했습니다. 또 무술이 뛰어난 자는 훈련도감에 배치하여 조선군에게 검술이나 조총을 가르치게 하고, 무기제조 기술이 있는 자는 화약과 조총을 제조하는 임무를 부여했다고 합니다.

귀화한 일본인을 항왜, 향화왜 등으로 불렀는데 항왜 가운데 공로가 뛰어난 자에게는 상을 내리고 관직을 제수하였으며, 성명을 내려 우대하기도 했습니다. 이들 항왜는 임진왜란 기간동안 수천 명에 이르렀으며, 이후 각종 내란이나 외적을 토벌하고 방어하는데 기여도가 상당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사야가(沙也可)로 귀화하여 김충선(金忠善)이란 성명으로 우록김씨(友鹿金氏: 뒤에 김해김씨로 賜姓)의 시조가 된 이도 있습니다.

이후 참전 후손들이 귀화한 경우 등이 있는데 그 후손들은 소주 가씨((蘇州 賈氏), 상곡 마씨, 절강 서씨, 영양 천씨, 곡부 공씨 등 중국의 본관을 그대로 사용하며 오늘날 번성하여 현재 18만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친정 할머니 성씨가 천씨인데 귀화한 일본인 후손이거나 명의 장군으로 임진왜란 때 참전해서 귀화한 천만리 장군의 후손일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데요, 할머니의 친정은 웅천입니다.

 

한편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은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재정 부담을 겪었으며, 요동방면의 군사력이 약화되어 끝내 여진에 멸망 당했습니다.

일본에서 귀환한 노인(魯認)의 금계일기와 귀화인의 유물로 '합천 송림리 충무후 마귀 영정', '마씨종택 철검', 김충선의 '모하당집' 등이 전시중입니다.

 

 

조선과 일본, 명 삼국이 참전한 임진왜란은 삼국의 문화가 교류하는 장이기도 했는데, 당초 전쟁의 목적은 아니었지만 전후 삼국의 역사 전개와 문화생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선은 일본에 유학을 보급 ·발전시켰으며, 불교의 교류, 도자기 제조기술을 전파했습니다. 동시에 조선도 문화전반이 파괴되고 약탈되어 참담한 피해를 입었지만, 조총 제조기술과 고추, 담배의 전래 등을 통해 일정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전쟁을 기억하다

부산박물관의 임진왜란 특별전시회는 제목과는 달리 '부산편'이라고 할 정도로 기울어져 있었기에 섭섭했는데, 책자에서 '전쟁을 기억하다'를 옮겨 보겠습니다.

동래지역은 조선 전기부터 국가적인 교린외교 정책의 기조에 따라 대일교섭의 교두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해방의 관문으로서 중요한 군사적 특성이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피해복구사업이 국가적으로 진행되는 시기에 특히 동래는 국경의 관문으로서 전쟁후의 사회수습과 군사방비 시설사업 문제가 우선시 되었다. 그중에서도 또 다른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적 업무는 전쟁직후부터 강조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동래부사로서 수행해야 할 고을의 정사중에서 가장 중요시 되었다.

 

또한 전쟁의 참상에 대한 기억과 현실을 통해 변방수비의 절대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아가 순절자 사당의 존엄성을 각인시켜 전쟁후의 재건의지로 만들어 가고자 했다.

이로써 전쟁의 기억을 통해 지역민의 정서를 대민통치에 활용해 나갔다.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인물들에 대한 표창작업은 송상현 부사와 정발 장군 및 동시 순절한 막하의 비장(裨將)과 군민들을 숭모하고 전쟁을 기억하는 작업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송상현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충절을 지킨 인물로서 가장 먼저 추송되고 기억됙기 사작하였다.

기념을 위한 상징성 매체로 사당인 충렬사가 세워졌으며, 매년 향사(享祀)를 통해 절의를 기억하며 사회의 이념화가 전개되었다. 또한 동래 일대에서 일으킨 의병에 대한 논공행상도 복호(세금과 요역을 면해줌)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표창사업은 시호를 하사하고, 사당에 제사를 위한 사액 및 추가적인 별묘향사, 서원에서의 향사, 그리고 직계 자손에 대한 관직등용 및 복호와 노비 증여 등 다양한 층위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기념화 사업은 조선후기 이래 줄곧 동래의 지역적 특성이 되었으며, 이후 통신사 파견을 통한 교린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개항기까지 군사적 중요성이 인식되어 관방시설에 대한 정책적 관심이 지속되어 왔다."

어디서나 사진을 많이 찍는 편인데 정리하여 포스트로 이어려니 지식이 짧아 아쉽습니다.

블로그나 기타 자료로 전시를 보는 것 보다 그 시대의 유물이나 유적은 직접 다녀보면 그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니 부산박물관에서 직접 관람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임진왜란 7주갑 특별기획전 2012년 6월 5일~7월 29일

   부산박물관 : 부산 남구 유엔평화로 63 (0511-610-7111)

 

- 이배사 진해지부 모임(http://cafe.daum.net/jjmkssm1545-1598/dVOU/5)

   7월 13일 금요일 오후 6시 30분  석동(이순신과 이배사 카페에 관심있는 진해시민 참석가능함)

 

- 가덕왜성 답사 안내

   7월 14일 토요일 : 이배사 카페 참고(http://cafe.daum.net/jjmkssm1545-1598/dVPf/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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