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4일 비가 큰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http://cafe.daum.net/jjmkssm1545-1598)회원은 가덕왜성 답사길에 올랐습니다.
가덕도는 오래전에 창원군 천가면이었는데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산시에 편입이 되었습니다. 신항공사로 가덕으로 가는 선편의 선착장은 몇 차례 이전되었고, 이제 다리 공사가 끝났기에 용원에서 버스로 가덕도로 갈 수 있습니다.
역사의 섬 가덕도(加德島)
가덕도는 보개산이 바다 가운데 침몰되었다가 다시 솟아서 이루어 졌다는 전설이 있는 부산 최대의 섬이다. 최고봉인 연대산(459.4m)을 위시하여 수많은 산들이 펼쳐져 있으며, 해안선을 따라 동북쪽으로 눌차·동선 사이를 이어주는 주변 백사장에서부터 기도원앞 바닷가의 경관, 동남쪽으로 대항 새바지의 넓은 자갈밭과 용두암을 시작으로 펼쳐지는 동백숲과 아동섬일대와 동두말, 가덕도 등대 주위의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 서남쪽으로 돌아 외양포 해수욕장, 두문의 길게 뻗은 솔섬, 천수말 코바위 등 가덕도는 해금강 절경을 방불케 한다.
가덕도는 역사의 섬이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고,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일본의 침략이 잦았던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군사기지와 곳곳에 성을 축조하였으며 병기를 만들던 곳집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왜군이 외양포에 만든 군사기지와 인공동굴 등 아픈 역사의 현장을 남기고 있다. 국토수호와 나라사랑의 마음이 절로 생겨난다.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등산로, 봉수대, 빼어난 해안선, 전통어로방식인 숭어들이를 볼 수 있고 유자와 대구가 유명한 곳, 곳곳에 산재된 문화유적들, 꼭 한번 다녀올 만한 곳이다.(출처 : 부산 강서구청 홈페이지)
가덕도며 이동경로입니다.
가덕도 선창에서 눌차교를 지나 눌차로 갔는데요, 눌차다리는 예전엔 하나였지만 지금은 차량통행이 비교적 수월한 새다리가 있으며, 장마가 지나면 눌차다리 아래는 낚시꾼이 득실거리기도 합니다.
눌차왜성을 가덕도왜성이라고 하는데, 산세를 잘 이용한 성으로 가덕첨사님과 거리가 좀 있었기에 설명을 제대로 듣지는 못 했습니다만, 인터넷을 한껏 활용하여 기록합니다.
▲ 출처 : 가덕도 닷컴 http://gadeokdo.com/zbxe/
이배사회원들이 걷고 있는 곳이 가덕도왜성(加德島倭城)입니다.
여름, 그것도 장마철 성답사는 풀이 많이 자라 성곽의 체성을 알기 힘든데, 눌차의 경우 형태가 없다시피 하니 답사란 이름으로 성벽에 오르긴 했지만 손에 쥘수 있는 건 여기가 왜성자리였다뿐이다시피 했지만, 가덕도는 지리적으로 대마도에서 부산과 진해쪽으로 진입하는 바닷길의 요충지로 예로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길목입니다.
가덕도왜성(加德島倭城)은 부산광역시 강서구 눌차동에 있는 일본식 성곽(왜성)으로 임진왜란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축성을 담당하였으며, 시마즈 이에히사 등이 주둔하였다고 합니다.
1593년 4월 22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모리 데루모토에게 조선 수군의 함선을 대항하기 위하여 주요 항구에 성곽을 축성할 것을 명령했는데, 가덕도에 축성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시기는 바로 이 무렵부터로 생각되며, 축성을 담당한 자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다치바나 무네시게 등이었다고 합니다.
사실상 당시는 본격적인 성곽이라기보다는 전략적인 요지에 간단한 임시성이 구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덕도왜성에 7월경 5천명의 병력을 본성과 지성에 주둔할 것을 명령했고, 윤9월 25일에는 이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가덕도 축성을 마치고 귀국하려는 의사를 밝히고 있으므로, 가덕도에 본격적인 왜성이 완성 단계에 이르른 것은 바로 이 무렵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기에 가덕도왜성의 축성기간은 임시성에서 견고성으로 완성단계에 이르기까지 길어야 약 5개월 정도 소요된 것으로 생각된다고 합니다.(위키백과 참고)
눌차왜성에서 보이는 신항과 선창에서 율리·장항쪽으로 가는 확장도로입니다.
눌차만은 깊지않은 수심과 조수간만의 차가 거의 없는 천혜의 자연조건으로 지금도 굴종패사업이 활발하기에 외눌, 항월, 정거마을에선 줄에 꿴 조가비를 볼 수 있는데, 시댁동네인 남해에 가면 대부분의 마을 할머니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가덕첨사님이 눌차에 왔으니 섬을 돌아 보자고 하여 좁은 포구길을 달려 마을버스 회차지가 있는 정거마을에 잠시 내려 갈매기 한마리 잡아 가덕진성지인 천가초등학교로 이동했습니다.
▲ 정거마을 포구
가덕진성은 수군 첨절제사가 주둔하면서 가덕도 전체를 지키고 다스렸던 곳입니다.
예전에 선창에서 천가까지 걸어 간적이 있긴 하지만 그때는 갯벌이 드러난 바다에 홀려 바닷가를 따라 걸었기에 천가초등학교가 어디쯤에 있는지 관심을 가지지 못 했으며, 가덕진성은 생각지도 못 했습니다.
(위)사진의 가덕도 지도에는 가덕진성이 선창마을과 성북사이에 표시되어 있는데 답사시 가덕진성은 천가초등학교담장과 마을의 들판이었습니다.
천가초등학교는 오랜 역사를 지닌 시골초등학교지만 흙마당 운동장이 없으며, 마당 가운데 따로 화단이 조성된게 특이했습니다.
학교 담장은 곧 성벽인데, 웅천초등학교 학교터가 읍성이었다보니 옛동중과 함께 학교담장 부분이 성벽입니다.
학교는 작은터에 아담하게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천가초등학교에 들어서면 좌우로 은행나무 한 그루씩이 있는데, (1931년 개교)1931년 봄 제1회 졸업생들이 졸업기념으로 식수를 하였다고 하니 학교의 역사와 함께 합니다.
그 나무아래 가덕도척화비(加德島斥和碑)가 있습니다.
척화비는 조선 고종 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백성들에게 서양 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드높이고자 전국 곳곳에 세우도록 한 비중 하나로 가덕도척화비는 념물 3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비는 건축공사 도중 발견되어 선창마을회의 소유지에 세웠 두었다가 1995년 천가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긴 것으로 비의 모습은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간단한 형태입니다.
비문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할 때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경고 섞인 내용의 글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란 한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척화비를 세운 시기는 고종 8년(1871)으로, 후에 임오군란(1882)이 발생하고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일본공사의 요구로 대부분 철거되고, 현재는 이처럼 몇 기의 비들만 곳곳에 남아 있는데, 가덕도척화비옆에는 3기의 영세불망비가 있습니다.
천가초등학교를 나와 강서소방서 천가파견소 주변 들녘에 섰습니다.
천가파견소에는 섬의 화재예방과 진압을 위해 미니소방차가 있었으며, 들녘은 섬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풍성하게 느껴졌는데, 풍성하다고 하는 것은 지형적으로 물이 주가 되기도 하겠지만 재배작물과 마을의 살림살이정도까지 포함됩니다.
옥수수밭과 참깨밭 사이 밭두렁을 이루고 있는 벽들이 성벽부분이며 성벽은 넓게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이대로 내쳐걷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들녘과 마을 풍경이 정다웠기에 어딘가의 소속은 이런때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성곽확인 후 이 길 어디쯤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던 사람들처럼 우리도 기념사진 한 장 남겨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카메라가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남는 건 사진이라는 말이 있으니까요.
천가초등학교에서 천성마을로 이동했습니다. 승용차로 약 10여분 거리.
낮 12시 30분, 딱 점심시간입니다.
궂은 날씨였으며 섬에서 먹을 수 있는 요깃거리는 그리 많지 않은데, 가덕첨사님이 콩국수를 잘 하는 집이 있다며, 용순반점으로 안내했습니다.
용순반점은 중국요리점이라기 보다 마을의 아이와 어른의 외식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음식점으로 냉면과 팥빙수, 통닭 등이 가능한 음식점으로 콩국수는 여름별미입니다만, 섬마을 중국집에서 만드는 콩국수에 별기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일행은 용순반점 홀이 아닌 마당에 안내되어 자리를 잡았으며, 콩국수가 나올동안 통영 김응함님과 통제사님이 준비해온 찐감자와 고구마빼데기죽, 진주의 태인현감님이 준비해온 모시떡으로 허기를 재웠습니다.
모시떡은 태인현감님의 특허며, 고구마를 납작하게 썰어 말려 한겨울에 양대 등을 넣어 푹 끓여 먹던 어릴때 간식이었던 빼데기죽은 재조명되는 통영의 웰빙음식으로 차조를 넣었기에 달며 구수했습니다.
얼음동동콩국수입니다.
콩물이 아주 부드러웠으며 잘 맞는 간과 함께 시원하기까지 했기에 입에 착착감겼기에 섬마을 음식점에 대한 편견이 더위와 함께 날아 갔습니다.
김치는 김장김치였는데 보관을 잘 해서인지 상큼한 맛이 날 정도로 맛났습니다.
동자갑선님이 준비해온 수박과 역시 태인현감님이 준비한 이디오피아커피와 꽃차로 마음까지 뽀송해졌기에 새로운 다짐으로 천성진성을 찾아 나섰습니다.
2009년 9월, 외양포로 가는 선표구입후 시간이 남았기에 천성들녘을 거닐다 고구마꽃을 만났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고구마꽃을 만나긴 했지만, 천성은 거제 등 섬특성상 담장이 돌로 되어 있는 부분이 많으며, 들의 두렁또한 돌로 많이 되어 있기에 천성의 밭두렁이 돌로 되어 있어도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으며,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고구마밭 밭두렁이 되는 그 돌들이 천성진성이라고 합니다. 성벽일수 있으며 성터부분이 되겠지요.
세상은 내가 관심을 가지는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천성진성 답사시 무지가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만, 세상 사람 모두가 다 안다면 선생과 학자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며, 세상살이가 별재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빼데기죽도 먹었고 하니 고구마꽃 본김에 고구마에 대해 학습하지요.
고구마는 메꽃과(―科 Convolvulaceae)의 식용식물로 경제성이 높고 관상용으로도 쓰이는 덩굴식물입니다.
아메리카 대륙 열대지역이 원산지이나 열대와 따뜻한 온대지방에서도 널리 기르며, 가지과(―科 Solanaceae)에 속하는 가지속(―屬 Solanum)의 감자 또는 마과(Dioscoreaceae)에 속하는 마속(Dioscorea)의 마와 혼동하기도 하는데, 이들과는 식물학적으로 서로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줄기는 길게 땅 위를 기어가고 잎은 갈라지거나 갈라지지 않으며, 그 모양과 색이 다양한데, 방추형, 긴 타원형, 뾰족한 계란 모양 등이며, 뿌리의 색깔은 안쪽은 흰색에서 오렌지색 또는 보라색을 띠기도 하고, 바깥쪽은 연한 황갈색에서 갈색 또는 자주색을 띠기도 합니다. 뿌리에는 녹말이 아주 많고 오렌지색을 띠는 변종에는 카로틴이 풍부합니다.
고구마꽃은 메꽃과지만 색깔이 메꽃이나 갯메꽃과는 달리 나팔꽃과 비슷하며, 꽃은 깔때기 모양으로 자주색이고 잎겨드랑이에 모여 핍니다.
원산지인 중앙아메리카 등의 열대지역에서는 고구마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 않기에 꽃말은 행운입니다.
고구마는 하루에 8~11시간 정도 햇볕을 받아야 꽃이 피는 단일식물인데, 고구마꽃이 피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지구온난화현상으로 우리나라 기후가 점차 아열대기후로 변화되고, 근래 고온에 의한 이상 기후적 징후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고 합니다.
▲ 2009년 9월 천성
천성진성(天城鎭城)입니다.
1988년 12월 23일 경상남도 기념물(92호)로 지정되었다가 1989년 1월 1일 부산시 강서구에 편입됨으로 1989년 3월 10일 부산시 지정기념물 제 34호로 재지정되었습니다.
그런데 Daum 문화유산에 보면 지금도 옛주소지와 지정번호로 나오고 있는데, 이런 부분은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에서 앞장서 수정토록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http://heritage.daum.net/heritage/25719.daum
진성이 복원되어 이 충무공 사당도 건립하고 충무공의 정신 교육장도 만들어 교육받는 학생들이 대한민국을 건강하게 이끌어 나갔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안고 가덕첨사님은 천성진성 복원운동중입니다.
천성진성 안내문이 없다면 여기가 진성자리라고 누구도 짐작을 못 할 정도로 훼손이 심하지만 가덕첨사님을 비롯 뜻 있는 분들의 관심으로 복원과 토지보상중이지만, 거가대교 개통 등으로 지가상승이 더해져 사업진행이 늦어지면서 더 많은 예산 소요가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가덕 천성진성은 임진왜란 당시 가덕도에 있는 연대봉수대에서 가장 먼저 왜군을 발견하고 봉화를 올렸을 정도로 수군의 전초기지로서의 역활을 하였습니다.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 주로 방어를 위한 목적으로 쌓은 것이라고 안내문에는 이야기를 합니다.
천성진성 안내문 옆에는 향토민의 마음을 담은 전적비 진충보국비가 있습니다.
예 부터 남해안 지역의 요충지인 이곳 천성진은 임진왜란 당시 이충무공이 왜군의 서해안 진출을 저지한 교두보였다.
특히 적정을 탐지하는 전초기지로 웚포, 제포, 안골포 등의 해전을 승리로 이끈느데 중요한 몫을 다한 작전보루였다.
국난극복의 사적이며 민족의 기상과 조상들의 불굴의 의지가 서려있는 이곳을 민족의 문화유산으로 보존하며 이충무공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자랑스런 터전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하는 향토민의 마음을 여기에 새긴다.
흐리던 하늘은 기어코 비를 뿌렸습니다.
연대봉 등산은 접어야 했으며, 우리의 답사도 오후 2시를 넘기지 못 하고 끝냈기에 9월 1일 가덕도 틈새답사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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