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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영암사지 금당 사자가 웃는 까닭은

by 실비단안개 2012.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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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합천 영암사지 금당 사자가 웃는 까닭은

모산재를 무사히 내려온 일행은 영암사를 거쳐 영암자지로 갔습니다.

영암사지는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 가회면(佳會面) 황매산(黃梅山)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터입니다.

창건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1014년(고려 현종 5) 적연선사(寂然禪師)가 입적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되며, 절 규모는 1984년 동아대학교박물관 팀의 발굴·조사로 일부가 밝혀졌으며, 현재도 발굴 조사중입니다.

 

불상을 모셨던 금당(金堂)·서금당(西金堂)·회랑(回廊)·기타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금당은 3차례의 변화가 있었음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건물 축대석이 잘 보존되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에 걸친 각종 기왓조각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지금도 영암사지와 주변에 기왓조각이 흩어져 있습니다. 

 

▲ 모산재에서 보는 영암사와 영암사지

 

말로만 듣던 영암사지는 모산재를 오를 때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잘 다듬어진 잔디는 영암사지 그냥 스치면 안되지 할 정도로 유혹이 강했습니다.

모산재는 영암사지를 감싸고 있으며, 입구에는 수령 600년 느타나무와 안내문이 있고 누군가 흩어진 기와조각을 정성스레 모아 두기도 했습니다.

안내에 보면 영암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일 뿐, 정확한 기록에서 확인된 것이 아니어서 절의 정확한 이름과 내력은 알 수 없다고 했으니, 후에 영암사지는 다른 이름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만, 전해지는 영암사지를 둘러 보겠습니다.

합천 영암사지는 사적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절터에 들어서기전에 삼층석탑과 석등이 보입니다.

 

 

잘 정비된 축대석은 요즘 돌과 옛날 돌 색이 다릅니다.

옛날 돌은 마치 녹이슨듯하며 복원된 축대는 색은 다르지만 원형에 가깝도록 돌과 돌 사이에 긴 돌을 박았으며, 돌의 길이나 넓이 등이 비슷합니다.

축대석의 두께가 아래가 특별히 넓거나 하지 않았는데 이는 비교적 안정된 지형이라 그런지 신라시대 건축이 이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팸투어대원들과 우리 일행은 벌어질대로 벌어졌기에 영암사지 설명은 고향이 합천인 김천령 님이 했습니다.

 

 

금당으로 오르는 아치형 계단은 높고 폭이 좁았기에 금당으로 오를 때 이미 부처님에게 절로 경배를 하게 되니 전체적인 건축이나 계단을 만든이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으며, 3층석탑은 금당 아래에 있으며 석등은 금당 앞쪽에 있습니다.

 

 

정면에서 본 삼층석탑입니다. 쌍사자석탑과 함께 모산재가 감싸고 있으며, 현장을 보면 참 좋은 자리에 자리를 잡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영암사지 삼층석탑은 보물 제48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의 석탑으로 탑 꼭대기 부분은 모두 소실되고, 몸돌(옥신석)이 무너져 내려있던 것을 1969년에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아래 기단과 윗기단 모두 지대석과 중석을 함께 붙여 조각한 4개의 석재로 구성되었고 중석 모서리와 가운데에 모서리기둥(우주)과 버팀기둥(탱주)을 조각하였습니다.

 

각 층마다 몸돌(옥신석)과 지붕돌(옥개석)을 각기 다른 돌로 만들었는데, 몸돌에는 모서리기둥(우주)이 모각되어 있고, 지붕돌은 얇은 편이며, 처마 밑은 수평을 이뤘습니다.

탑은 지붕돌(옥개석)의 받침수가 4단으로 줄어 탑의 규모가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점으로 보아 9세기경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문화재 정보 참고) 

 

규모가 커지않은 영암사지 금당처는 정사각형에 가까우며, 사방이 소통되어 있는 개방형 구조로 어느 곳에서건 본존불을 볼 수 있도록 사방에 계단을 두고 있습니다.

 

소맷돌에는 통돌을 파서 만든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는데, 안쪽의 모습은 아름다운 여자 보살이 춤추며 하늘을 나는 비천상처럼 조각되어 있고, 바깥쪽을 보면 천사가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 소맷돌 : 돌계단의 난간 부분.

* 가릉빈가 :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을 한 상상의 새로 깃이 아름답고, 소리가 매우 맑다고 합니다.

 

영암사지 금당터의 금당을 떠받친 기단부입니다.

사면은 각 면마다 두 마리씩 부조의 형태로 동물상을 새겨 놓았습니다.

해태상이니 개니 사자상이니 개인마다 생각과 느낌이 다르지만, 우리는 사자라 하기로 했습니다.

동물상은 희화화 되어 있음으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하는데 다름 아닌 사자상의 사자가 웃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암사지뿐 아니라 대게의 건축에서 이런 상을 볼 수 있는데 우리 조상들의 낙천적이며 긍정적인 정신을 엿볼 수 있으며, 그 시대상도 작은 상에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요즘처럼 살기가 팍팍하다면 석공인들 동물상을 회화화 할 수 있겠습니까.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은 보물 제353호입니다.

 

김천령님은 석등의 애환을 들려 주었습니다.

금당에서 봐 왼편 사자 다리가 색이 약간 다름을 알 수 있는데요,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가져가면서 훼손된 부분인데 지금은 색이 원형의 색에 거의 가깝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렇구나 하고 보면 색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석등은 사자를 배치한 가운데받침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기본형태인 8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래받침돌에는 연꽃모양이 조각되었고 그 위로 사자 두 마리가 가슴을 맞대고 서 있으며, 사자의 뒷발은 아래받침돌을 딛고 있으며 앞발은 들어서 윗받침돌을 받들었습니다.

화사석은 4면에 창이 있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사천왕은 불교의 법을 지키는 신으로 당시 호국사상의 목적아래 많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지붕돌은 8각으로 얇고 평평하며,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자그마한 꽃조각이 솟아있습니다.(문화재 정보 참고) 

일본인은 보는 눈은 제대로인지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재를 밀반출했지만, 보는 눈과는 달리 마음이 바르지 않기에 문화재를 모두 환수하지는 못 했습는데 쌍사자석탑은 반출직전 되찾았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1933년경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가져가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막아 면사무소에 보관하였다가 1959년 절터에 암자를 세우고 원래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고 하며, 당시 가회면장의 공을 기린 공덕비가 가회면사무소 앞에 있다고 합니다.

아래 동그라미안의 마을까지 뒤쫒아 쌍사자석등을 찾아 왔다고 했는데, 산 넘고 고개 넘어 되찾은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김천령 님은 쌍사자 사이로 보이는 삼층석탑을 즐겨 찍는다고 했습니다.

김천령 님의 이야기를 듣고 금당터에 앉아 맞댄 배 사이로 보이는 삼층석탑을 바라보니 마음이 그윽해졌습니다.

 

 

쌍사자는 오른쪽은 엉덩이가 토실한 반면 왼편의 사자는 마치 흉기에 맞아 살이 찌지 못 한 사람의 그것마냥 약간 야윈듯이 보입니다만 꼬리는 역동적입니다.

천년 세월을 잘 버텨준 튼실한 쌍사자 다리가 고맙습니다.

 

 

영암사지 귀부(陜川 靈岩寺址 龜趺) 2기입니다.

보물  제48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영암사지 귀부 2기는 영암사터 내의 법당터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남아 있습니다.

영암사의 정확한 창건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통일신라 전성기 때의 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어 그 즈음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귀부는 거북의 모습을 하고 있는 비의 받침돌로, 원래는 그 위로 비몸돌과 비머릿돌이 얹혀져 있었을 것이나, 양쪽 모두 지금은 귀부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동쪽 귀부는 거북의 등무늬가 6각형이고, 비몸돌을 괴는 네모난 비좌(碑座) 주위에는 구름무늬가 있으며, 전체적인 모습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머리처럼 새겼고, 목은 똑바로 뻗어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습니다.

 

동쪽 귀부의 등은 섬세하며 발가락도 아주 섬세합니다.

서쪽 귀부가 남성적이라면 동쪽 귀부는 다소 다소곳하며 섬세한 여성적인데, 비의 비좌에는 물고기와 연꽃이 새겨져 있습니다.

 

▲ 동편 귀부

 

서쪽 귀부는 목이 건강하게 표현되었으며 거북의 몸을 하고 있지만, 머리 부분은 포효 하는 용의 모습이 사실감 있게 표현되었고 부릅뜬 눈에서 강한 힘을 느낄 수 있는데, 이 또한 나라가 태평성대하니 백성과 석공까지 힘이 넘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서편 귀부

 

경남도민일보 주관,  갱상도문화 공동체 '해딴에' 주관, 합천군 후원 1박 2일 경남 합천(陜川郡) 팸투어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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