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0일, 걷기도 놀기도 여행하기도 좋은 날씨, 백산 안희제선생 생가에서 비 약간 맞음.
경남도민일보 해딴에서 이끈 '경남 이야기 탐방대 의령편 - 블로그'입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경남문화예술진흥원이 주최·주관하는 '경남·부산 이야기'중 두번째 방문지는 의령 곽재우 장군 생가 등입니다.
우리가 의령에 내려 처음 만난건 싱그러운 가을바람이었습니다.
가을바람 위로 정암루가 있으며 가을바람을 따라 걸어서 의령에서 함안가기였습니다.
우리는 정암교를 달려 의령에 들었으며, 정암교를 달리다보면 오른편에 반쪽짜리 붉은철교가 있는데 그 철교가 정암철교며, 아래로 남강이 흐릅니다.
정암철교는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건설되었으며, 6·25 전쟁으로 일부가 파괴되고 나서 1958년 개축된 길이 259.6m의 철골트러스 아치교로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며 민족의 애환을 함께한 민족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하여 문화재청은 문화재 등록· 예고하였는데 문화재위원회의 심의 절차를 거쳐 문화재로 등록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정암철교는 경남 중·동부지역에서 서부지역과 전라도로 가는 주요 길목에 있어 교통 요충지인데 의령군 의령읍 정암리 정암마을과 함안군 군북면 월촌리 정암마을을 연결하는 다리로 의령에서 걸어 함안으로 갈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1988년 말에 새 정암교가 생기면서 정암철교는 차량 통행 임무는 새 정암교가 하며, 2006년 1월부터는 모든 차량의 통행을 제한하고 자전거와 사람이 다니는 다리가 되었기에 여행객 입장으로서는 팔짝뛸 수는 없었지만 좋았습니다.
정암철교를 사이에 두고 (함안쪽에서 볼 때)오른편으로 정암나루와 벼랑위에 정암루가 있으며, 왼편으로 정암새다리와 곽재우장군 동상이 보입니다.
정암루 절벽이 가을로 물들었습니다.
남강을 가운데 두고 건너편이 함안군 군북면 월촌리 정암마을이며, 정암대가 있는 의령의 마을은 의령읍 정암리로 남해 노량대교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하동 노량이며 맞은편이 남해 노량인데 리와 마을 차이일 뿐 의령과 함안 모두 정암입니다.
정암철교를 조금 걷다보면 정암나루터와 솥바위가 보이며 남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정암나루(솥바위나루鼎巖津)앞쪽에 바위 하나가 있는데 솥바위(정암)입니다.
솥바위는 남강 가운데에 있는 큰 바위로 솥의 모양을 하고 있고, 특히 강물 속에는 솥의 발을 닮은 형상 세개가 숨겨져 있다고 하는데 솥바위의 숨겨진 발 세개는 솥바위를 중심으로 반경 8 km 이내 부귀가 끊이지 않는다고 전해지는데요, 의령에는 우리나라 3대부자가 태어 났으며 둘레길인 부잣길이 있기도 합니다.
정암철교 중간쯤에서 곽재우 장군을 당겨봤습니다.
곽재우 장군이 용맹을 떨친 대표적 전투가 경남 의령의 정암전투였습니다. 당시엔 의령이나 함안 다 둑이 없었을 것이며 일대는 남강이 지금보다 큰폭으로 흘렀을 겁니다. 강바닥은 깊은 곳도 있지만 모래톱이 보일 정도의 낮은 곳도 있었는데 곽재우 장군은 이순신 장군만큼 지형을 잘 이용한 듯 한데요, 곽재우 장군은 지형을 지혜롭게 활용하여 남강과 낙동강 일대를 방어하였는데 임진년 5월 1천여 명의 의병과 전국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정암나루에서 왜적을 무찔렀습니다.
곽재우 장군은 관군이 아닌 의병의 몸이었습니다.
의병은 나라가 위급할 때 백성들이 스스로 조직한 군대인데 의병은 양반보다는 그 이하의 신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있는 자의 자제가 의병으로 나서기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마음일텐데요, 곽재우는 평민신분이 아닌 양반가의 자제입니다.
생각이 바르지 않았더라면 양반댁 자제가 의병을 모집하지 않았을 것이며 활동으로 이어지지도 않았을 텐데, 곽재우의 스승인 조식선생의 실천사상을 곽재우는 행동으로 옮겼는데, 사람이 살아 가면서 부모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지만 스승은 제 2의 부모와 마찬가지입니다.
조식선생과 마찬가지로 곽재우 장군도 은둔생활을 했는데 은둔생활이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의식주는 해결되어야 가능한데요, 곽재우 장군의 집안을 보면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곽월(郭越)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로 생가의 규모에서 봤듯이 친가와 외가 모두 부유했던 것 같았습니다.
곽재우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34세(1585년선조 18)에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답안지에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가 있었기 때문에 파방(罷榜)되었는데, 이 일로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다가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義州)로 피난하자 같은 달 22일 선비로서는 제일 먼저 수십명의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으며, 의병의 군세는 더욱 커져 2천에 달할 때도 있었고, 5월에는 함안군을 수복하고 정암진(鼎巖津:솥바위나루)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이끈 곽재우 장군을 홍의장군이라고 하는데, 그의 호인 망월당과 홍의장군은 곽재우 장군 스스로가 붙인거라고 합니다.
누구도 가지않은 길을 앞서가 길을 만들고 길이 된다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실행은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인데 곽재우 장군은 그 길을 걸었습니다.
의령에서 정암철교를 걸으면 건너편의 풍경이 눈에 들어 옵니다.
채소밭이 있으며, 잘생긴 아름나무가 있는데 함안의 정암나루터가 아닐까 짐작을 하는 정도라고 하는데 최대한 큰나무근처까지 가 보겠습니다.
걸어온 철교를 돌아보면 아래의 풍경인데 장군의 동상과 정암루, 정암나루가 한눈에 들어 옵니다.
차량통행이 제한되다보니 근처 주민들은 볕이 좋은 철교에서 곡식 등을 말리는 듯 했습니다.
함안 정암나루터 근처입니다.
맞은편은 의령 정암나루터입니다.
아름 보호수들은 대부분 절로 자랐겠지만 마치 관리를 잘 하고 있는 듯 잘 자라 주었기에 보는 이도 흐뭇했습니다.
큰나무는 정암철교를 가렸으며, 정암루와 정암나루터만 보이는데 나무 아래쪽으로 배추밭이 펼쳐져 있는데 곧 김장을 해도 좋을 듯이 자랐었기에 많이 부러웠습니다.
우리 일행은 걸었던 길을 다시 되돌아와 정암루에 올랐습니다.
정암루에는 의령의 시인인 윤재환 선생께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인은 의령인으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정암루는 곽재우 장군과 의병들의 정암진 전투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935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이름 그대로 루(樓)에는 어떠한 것도 배치되지 않았으며, 사철바람이 기둥사이를 자유로이 오갈수 있고 주변에 좋은 나무가 여럿 있었는데 지금보다 더 깊은 가을이라면 떨어지는 단풍맞는 재미도 좋을 것 같은 곳이었습니다.
정암루에서 본 정암철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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