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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낙동江과 팸투어·답사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와 망개떡

by 실비단안개 2014.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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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30일

경남 이야기탐방 의령편의 대상은 곽재우 장군이었지만, 꼭 가보고 싶었던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가 근처에 있다고 하였기에 백산 선생의 생가를 방문하고 싶다고 하니, 해딴에 대표께서 그러자고 하여 우리는 짬을 내어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를 방문했습니다.

 

백산 안희제 선생의 기념관은 부산에 있으며, 흉상은 부산 용두산 공원에 있습니다.

백산 기념관은 2006년 2월말에 두 번 다녀왔으며, 이듬해 블로거 이노래삼춘과 한 번 더 갔으니 세번 갔는데 그 이후로는 방문을 하지 않았기에 다음 소식은 알 수 없지만 의령에 가면 선생의 생가를 꼭 방문하리라 마음을 먹었고 여러해가 흘렀습니다.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는 (외관상)곽재우 장군의 생가에 미치지 못 하지만 그렇다고 초가삼칸은 아니었습니다.

독립군 후손들이 대부분 당당한 친일파들보다 넉넉치않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자랑스런 선조를 두었음에도 그들은 나설 수 없었으며, 그러다보니 친일파 자손보다 못 배웠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후 친일파들은 당당했으며 지금도 그 피는 속일 수 없는지 그들의 자손들도 그들 못지않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목숨을 바쳐 일제침략에 항거하였으나 안희제 선생의 경우처럼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한 경우는 흔하지 않는데, 안희제 선생의 묘비문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민족사상의 고취자요. 민족교육의 선각자요. 민족자본의 육성자이시며, 민족언론의 선각자이시자 민족의 지도자이신 백산 선생이 여기 잠들어 계신다."

 

백산 안희제 선생은 1885년 8월 4일(음력)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설뫼마을) 168번지에서 안발(安鏺)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는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특히 문장에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 후 안희제 선생은 사립흥화학교에서 신문학을 수학하였으며, 1905년 보성전문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가 다음해 양정의숙 경제학과에 재입학하였습니다. 보성전문학교와 양정의숙 등에서 신문학을 수학하고 민중계몽을 위한 교육구국운동에 투신하여 1907년 윤상은(尹相殷)과 함께 구명학교(현재 부산구포초등학교 전신)를 설립하여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같은 해 고향인 경남 의령에 의신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다음해 1908년에는 창남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전념하였습니다.

 

1909년 10월 남형우.서상일.김동삼 등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하고 초대단장 남형우에 이어 2대 단장을 지냈으며, 1910년 일제의 한국강점으로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안희제는 1911년 러시아와 중국으로 망명하여 국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지도자들과 국권회복을 위한 대책을 협의한 결과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독립운동 자금조달의 중책을 맡고 귀국하였습니다.

 

1914년 부산에서 무역회사인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는데 백산상회는 표면적으로는 해산물과 농수산물을 구매·위탁하는 무역상이었으나 실은 독립운동자금 조달과 국내연락망 구축을 위한 국내 독립운동기지였습니다.

독립운동자금의 원활한 조달을 위해 국내에는 서울.대구.원산.인천 등 18개소, 국외에는 중국 안동.봉천.길림 등 3개소의 백산상회 지점 및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보냈습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백산 안희제, 백야 김좌진 장군을 3백이라고 하며, 백산 안희제 선생을 이야기 할때 빼놓지 말아야 할 분이 바로 최준 선생인데 경주 최부자로 알려진 분으로 상당액의 재산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자금으로 제공했는데 그 자금을 전달하는 창구가 백산 선생이었다고 합니다.

훗날 백산 선생이 돌아가시고 백범 김구 선생이 경주 최부자를 만나 독립자금과 그에 관련된 영수증을 보여주며 고마움을 전하게 되었는데, 그 영수증을 받아 본 최준 선생은 백산에게 전달했던 자금과 한푼도 차이가 나지 않았음을 알고는, 가는 길에 뭐라고 한 그릇 사먹었겠지 하는 약간의 의심을 가졌는데 백산이 한푼도 축을 내지 않았기에 의구심을 품은 것을 후회하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1919년 11월 부산에서 백산상회 주주들과 영남지역 지주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양성을 위하여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국내 및 해외유학 시키기 위해 장학재단인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였습니다.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통하여 양성 된 인재로는 초대문교부장관 안호상, 국문학자 이극로, 신성모, 전진환 등이 있는데 안호상 초대문교부장관의 생가 역시 의령에 있습니다.

 

백산 선생은1911년 러시아로 망명하여서는 최병찬과 함께 '독립순보'를 간행하였으며, 1920년 '동아일보' 창립발기에도 참여하였으며, 1926년에는 시대일보를 인수하여 '중외일보(中外日報)'로 개칭하여 날카로운 항일봉필을 휘둘러 일제로부터 여러 차례의 정간과 탄압을 받았습니다.

1911년 대종교에 입교한 안희제 선생은 일제의 대대적인 대종교 탄압인 임오교변(壬午敎變)을 당하였으며, 1942년 11월 19일 중국 목단강성 경무대 형사대에 체포된 후 혹독한 고문으로 1943년 8월 3일 병보석 출감하여 안영제가 경영하는 영제의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3시간 만에 순국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습니다.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전 회장은 1910년생이며 1938년 삼성상회를  세웠으며 같은 의령인이지만, (물론 1세대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삶의 방향이 달랐기에 대삼성그룹으로 키웠지만, 백산 선생은 더 일찍 백산상회라는 사업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영달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했다보니 본인은 물론 후손까지 넉넉한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백산의 후손은 선조를 영광스러워 하리라 생각합니다.

 

백산 선생의 생가는 안채는 기와지붕이며 사랑채는 초가입니다.

생가의 특징으로는 정지쪽을 제외한 세 방향으로 마루가 있으며, 사랑채 정지앞쪽에는 시렁이 있습니다.

안채의 문을 열면 마루가 있으며 안쪽으로 작은 방이 나누어져 있는데 특이한 구조로 지방문화재(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93호)로 지정되었다고 했습니다.

생가는 비교적 깨끗했지만 곽재우 장군의 생가처럼 표시나게 관리는 되고 있지 않았기에 어느 분이 더 잘나고를 떠나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정면 여섯칸의 안채에 '백산고가(白山古家)'편액이 있으며, 우리 일행은 마루로 올라 문을 열어 내부를 잠시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굴뚝이 안채 뒤로 두 개가 있으며 앞쪽에 한 개가 있고, 기둥이 네모였는데 안채는 집안의 여자들이 거처하는 곳이기에 조심스럽게 행동하라는 뜻으로 기둥이 네모라는 이야기가 오갔는데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

 

 

 

마루에 올라 문을 열면 큰마루가 있는데 남해에서는 안청이라고 하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어떻게 칭하는지 모르지만 백산 선생의 초상화가 있었습니다.

 

 

안채 뒷쪽인데 두개의 굴뚝이 있으며, 앞쪽의 굴뚝이 있는 곳을 보면 벽장과 마루 사이가 다른곳보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우리는 이부분에서 집구조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고, 다시 앞으로 와 마루에 올라 문을 열기까지 했습니다.

백산 선생 생가는 일정에 없었다보니 방문 시간이 짧았기에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는데, 개인적으로 방문한다면 마루에 올라 또 다른 마루문을 열어 볼 수 있을지 장담을 할 수 없기에 아쉬움이 더 큽니다.

 

 

조촐한 장독대며 뚜껑이 열린 독안에는 망개잎이 있었습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망개잎 독은 원래 뚜껑이 닫혀있었는데 누군가가 열더둔 모양이라고 하더군요. 그 누군가 덕분에 망개잎 절(삭)이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채인데 굴뚝이 안채의 굴뚝보다 낮은데 군불용 아궁이만 있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 안내판입니다.

 

 

생가 안내 표지판이 있는 담장밖이며, 마을 할머니 말씀이 예전에는 잔디와 시멘트길까지 백산 선생 생가였었다고 하더군요.

할머니에게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차에 시동이 걸렸습니다.

 

 

예전에 백산 선생에 대한 글을 블로그에 올렸을 때 블로거 이웃이 설뫼망개떡 이야기를 했습니다.

또 이런 추억도 들려주었습니다.

백산 안희제선생님의 생가가 어딘 줄 아십니까?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 있거든요. 몇 년전에 가보니 생가는 새로 복원해서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답니다.
그런데, 입산리 바로 옆동네 단원리가 제 고향이고요.
생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백산 선생님이 설립하신 학교가 있었는데 제가 다닐때 교명으로 입산국민(초등)학교-전신이 창남학교입니다.
(입산은 한자로 立山이었는데 그곳과 이웃에서는 동네 이름을 설뫼라고 불렀지요. 순 우리말로~실제 발음은 사투리로 설미라고 했음)
이곳에 제가 3학년때 때 부산으로 전학을 왔지요.
그런데 몇 년 전에 가보니까 학생이 없어 폐교가 되어버렸지뭡니까.
제가 다닐 때만 해도 학년에 2개반씩이었는데 그 이후 학생 수가 줄어 신반초등학교 입산분교로 되었다가 수년 전에 폐교가 되었다고 하네요.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저의 고향과 제가 다니던 학교의 새로운 감회 느끼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블로거 이웃이 다녔다는 창남학교는 백산 선생이 1908년에 설립한 학교입니다.

그러면서 백산 선생의 손녀가 망개떡 장사를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망개떡을 한번도 먹어보지 않았으며, 그런 이름의 떡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지만 망개떡을 사먹기 위해 의령으로 갈 정도의 정성은 갖지 못 했었습니다.

 

백산 선생의 생가에서 망개떡 이야기를 주고 받았으며, 강창덕 선생님이 안희제 선생 손녀 소식이 궁금하느냐 망개떡이 궁금하느냐고 묻기에 기왕이면 손녀분이 만든 망개떡이면 좋겠지만, 그 어른을 뵐 수 없다면 망개떡만이라도 사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태전인가, 무주에 다녀오는 길에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의령군청 근처를 돌았을 때, 그때 망개떡을 만드는 방앗간을 봤지만 피곤에 절었기에 당시에는 망개떡 구경조차 하지 않았거든요.

 

9월 30일 마지막 방문지는 의령 '토요애'장이었는데 장날이 쓰여 있었지만 상설시장같기도 했습니다.

'망개떡'간판이 보입니다.

망개떡 방앗간쪽은 의령 소바 전국본점이 있기도 했기에 신기하기도 했는데 소바와 망개떡은 의령의 특산품입니다.

 

 

방앗간엔 삭인 망개잎이 가득했으며, 아주머니들은 망개잎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얼굴은 찍지마라고 하시면서 웃어주시고 브이를 해 주시기도 했지만 약속한대로 모자이크처리를 합니다.

 

 

외출을 하거나 먼길에서 돌아오는 날 제 손에는 대부분 뭔가가 들려 있습니다.

엄마 아무것도 사오지마세요 하면서도 작은늠은 엄마 얼굴보다 손을 먼저 보거든요. 망개떡 작은상자는 돌아 오는 차 안에서 나누어 먹었으며, 큰상자의 망개떡은 친정에 좀 드리고 우리가 먹었습니다.

망개잎 냄새가 확 풍기는 떡은 말랑하며 소는 달았습니다.

 

 

망개떡의 망개란 청미래덩굴을 칭하는 경상도 방언으로, 떡을 이 망개잎으로 싼다고 하여 망개떡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망개떡은 물에 불린 멥쌀을 가루로 만들어 익반죽한 네모난 떡에 보자기 싸듯 팥소를 넣어 만들게 되는데 한여름에 채취해 놓은 망개잎을 쪄낸 후 두 장의 망개잎 사이에 떡을 넣어 다시 한 번 쪄내면 망개떡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떡을 찔 때 망개잎을 쓰게 되면 떡에 망개잎 특유의 상큼한 향이 배어들 뿐만 아니라 위와 간에 부담을 주지 않는 망개나무의 특성 때문에 속이 편안하고 떡이 서로 달라붙지 않아 보관이 쉽고 먹는데도 편리하며, 남은 망개떡은 냉동실에 보관하였다 먹고 싶을 때 꺼내 망개잎 그대로 살짝 쪄 먹으면 됩니다.

망개떡을 안 건 안희제 선생 손녀의 설뫼망개떡에서였다고 했습니다.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의 친손녀이기도 한 의령백산식품의 안경란 대표는 망개떡의 전통을 5대째 이어가고 있는 망개떡 지킴이로, 전에는 안희제 선생의 손녀딸로 유명세를 탔지만 이제는 망개떡 할머니로 더 유명하다고 합니다.

 

의령에서 백산식품을 방문하지 않았기에 인터넷 검색으로 안경란 대표와 통화를 했습니다.

의령 생가에 다녀왔는데 할머니 망개떡을 먹고 싶었지만 찾지 못 했다고 말씀을 드리니, 안경란 대표께서 "내가 그 할맵니더. 테레비서 대청마루에서 망개떡 만들던 그 할매." 하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백산식품은 생가근처, 학교와 교회가 있는 근처 2층집인데 안 대표께서는 공장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장, 경남도민일보 기자며 해딴에 대표인 김훤주 씨는 경남도민일보를 칭할 때 늘 공장이라고 했기에 공장이 기름때 흐르는 그런 공장이 아닌 겸손의 단어란 걸 알고 있었기에 안 대표의 공장이란 말이 정겹게 다가왔습니다.

 

우짜겠노, 생가까지 갔다가 요도 못 보고.... 어데 사노, 마산 대우백화점에서 망개떡 장사를 하는데 글로 오면 되는데, 내가 기억을 몬하니 생가 갔다왔다케라.

망개이파리 봤나, 관리 할아버지가 매일 청소를 하는데 누가 뚜껑을 열어 났는가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셔요. 조만간 꼭 찾아 뵙겠습니다.

 

망개떡을 펼치면 망개냄새가 납니다.

머지않은 날 할머님을 찾아 뵙고 그때 망개떡에 대해 자세히 알아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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