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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낙동江과 팸투어·답사

지붕없는 박물관 고흥과 녹도진 성지(쌍충사)

by 실비단안개 2014.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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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곳에 따라 흐리고 해 반짝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http://cafe.daum.net/jjmkssm1545-1598) 2014하반기 정규답사날입니다.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기에 우산을 준비하여 진해 벚꽃마을 아파트쪽으로 갔습니다. 오전 6시 45분 출발이었기에 몸도 그랬지만 마음이 더 바빴습니다.

카페지기 격군, 동자갑선, 진해현감 님과 함께 사천만남의 광장으로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사천만남의 광장에서 통영지부와 기타지부 회원들과 합류하였으며, 섬진강휴게소, 광양읍 로타리에서 지역회원이 합류하여 전남 고흥으로 출발했습니다.

전세버스 좌석이 꽉 찼기에 승용차로 함께 이동한 회원이 있었을 정도로 하반기 답사는 열정이 넘쳤습니다.

 

이동중에 답사자료집으로 정걸 장군의 생애를 학습해야 했기에 창밖 풍경 구경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누구도 불만을 나타내지 않는 답사입니다.

고흥 만남의 광장에서 고흥군청 문화관광과 관계자 두 분이 합류하여 '이순신 프로젝트'소개자료를 나누어 주었기에 우리의 학습량이 늘긴 했지만 그다지 머리 아파하지 않아도 되는 데 책의 내용물을 떠나 저같은 경우 머리가 아프다고 엄살을 표현했습니다.

답사나 여행시 메모보다 출발 ·도착시간도 사진으로 찍어 시간을 확인하며, 안내판 등도 확인하다보니 사진을 많이 찍는 편이기에 주최측이나 주관을 하는 단체의 설명을 듣는 일에는 소홀하게 되기에 집에 돌아오면 답사자료집을 꼼꼼하게 읽어야 하며, 부족한 부분은 검색을 더합니다.

 

녹도진으로 이동하는 차량안에서 군청관계자는 고흥을 소개했는 데, 고흥반도는 해안선 굴곡이 매우 심하며 유인도 38개, 무인도 122개 섬과 다도해국립공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러 지역에 걸쳐 고인돌군이 분포하고 있다고 하니 오래전부터 인간이 거주한 지역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복잡한 해안선과 섬이 많은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해안에 발포진, 사도진, 녹도진, 여도진 등의 주요 진이 설치되어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는 데, 전라좌수영 관하 5관 5포 중 1관 4포가 있었던 곳이며 전라좌수군의 핵심 역할을 수행한 곳으로 단일군에 이렇게 많은 수군진이 있는 곳은 고흥 한 곳 뿐일 정도며, 이순신 장군이 근무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지붕없는 박물관 고흥은 장흥부 고이부곡(高伊部曲 고흥군의 고려시대 이전 이름)이었으나, 1285년 고흥으로 되었다가 1441년에 홍양현에서 1914년 다시 고흥군이 되어 올해가 고흥군명칭사용 100년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조선후기 '여지도서'에 의하면  인구가 41,996명으로 호남에서는 나주, 순천, 전주, 영광 다음으로 큰고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난 1월 30일 나로호 위성을 성공적으로 발사시킨 국내 최초의 나로우주센타가 있는 곳이 고흥이며, 스포츠스타가 많이 배출되었는 데 박치기왕 김일 선수, 축구의 박지성 선수가 고흥출신이며, 포두면사무소 마당에는 노래자랑을 박지성 공설운동장에서 한다는 걸게가 걸려 있기도 했습니다.

 

고흥 특산품으로는 해산물과 유자가 있으며 한우도 유명하고 커피농장도 있다고 했습니다만, 우리는 바쁜 일정으로 유자향기도 못 맡고 돌아 와야 했는 데, 고흥의 임진왜란 유적지답사는 1박 2일이 적당할 듯 했습니다.

 

▲ 정걸 장군 사당 맞은편 남의 집 밭 귀퉁이에 있는 유자를 줌으로

 

녹도진은 고흥군 도양읍 평화마을(도양 녹동)에 있으며, 앞으로 바다가 있고 바다 건너편에 한센인의 보금자리인 소록도가 있습니다.

같은 자리에 앉은 행주산성 님이 섬 전문 여행가였기에 여러가지 설명과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에 평소 듣기만 했던 소록도를 알게 되었으며, 학습책자 던지고 소록도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꾹 누르고 이배사회원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녹도진성 입구의 홍살문입니다. 발포진에 있는 충무사 입구에도 홍살문이 있었습니다.

홍살문은 왕실의 능·원·묘·궁전 관아 등의 입구에 붉은 칠을 한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연결한 보에 붉은 살을 박은 형태로 세워 경의를 표하는 곳이란 의미를 지닌 문입니다.

 

 

녹도진은 성종 21년(1490)에 둘레 2,020척, 높이 13척의 규모로 축적되습니다. 성내는 대부분 건물이 들어서 있고 경작으로 훼손되어 전체적인 위치나 형태는 파악이 어렵지만, 지금도 성뜰이라 불리는 평화마을 경작지에 약 50m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이대원, 정운 장군을 모시는 쌍충사가 있습니다.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은 닉을 임진왜란과 이순신이 관련되는 닉을 사용하기에 정운 장군 하면 대부분 아~ 하게 되는 데 회원의 얼굴이 실제 정운 장군보다 먼저 떠 오르며 다대포 몰운대가 이어 떠오르며 아, 그곳에서 장군님이 전사하셨지로 이어지는 데 이배사 회원 닉은 정말 갑입니다.

 

쌍충사는 시도기념물 제128호(지정일 1990.02.24)로 조선시대 충열공 이대원 장군과 충장공 정운 장군을 모신 사당으로 조선 선조 20년(1587) 손죽도에서 순절한 이대원(李大源) 장군과 선조 24년(1591)에 옥포, 한산 해전에서 전과를 올리고 부산 몰운대에서 순절한 충장공 정운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이대원 장군은 선조 20년(1587) 녹도만호(만호는 조선시대 종4품의 무관직 품계로 지금으로 치면 연대장 정도의 직급)가 되어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대파하였고, 다시 흥양에 왜구가 침입하자 맞써 싸우다가 손죽도 해상(정해왜변 1587)에서 순절하였습니다. 이에 선조는 사당을 지어 모시게 했는데 이것이 쌍충사의 전신입니다. 정운 장군은 선조 24년(1591) 녹도만호로 부임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과 함께 목포·당포·한산해전 등에서 용감히 싸우다 부산 몰운대에서 순절하였으며, 선조 25년(1592) 이순신 장군의 청으로 이대원과 함께 사당에 모시게 되었으며 해마다 4월 이곳에서 제사를 지냅니다.

정유재란(1597) 때 불타버린 것을 숙종 7년(1681)에 새로 지었으며, 2년 뒤 쌍충사로 사액(임금이 사당祠堂, 서원書院, 누문樓門 따위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되었습니다. 그러다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22년 고흥향교 선비들이 다시 지었습니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42년에 일본인들이 폐허로 만든 것을 1957년에 신실과 강당을 다시 세운 것입니다.

 

 

 

▲ 충렬공 이대원 장군과 충장공 정운 장군

 

▲ 쌍충사 내삼문과 묘정비

 

 쌍충사 참배후 쪽문을 나서면 충혼탑이 있으며, 아래로 고만고만한 집들이 정답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습니다.

 

 

충혼탑 근처에서 우리는 학습을 했는 데 발 아래엔 봄이었습니다.

 

 

콩을 닮은 열매는 등나무 열매며 사이로 소록대교가 보입니다.

 

 

소록대교 아래쪽부터 왼편으로 녹동항이 이어져 있으며 주변에 횟집이 여럿 있고, 제주도 왕래가 가능한 녹동신항여객선터미널이 있는 데, 제주행 여객선에 타고 있는 이들이 근처에 녹도진 성지가 있다는 걸 알고 임진왜란과 이순신을 비롯 당시 장군들을 한번쯤 생각해 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녹도진 성지에서 보이는 작은 사슴을 닮았다는 소록도와 소록대교입니다.

꿈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올랐던 녹도진 성지에서 내려와 올라갈 때 담지 못 했던 비석군입니다.

이제 발포진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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