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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 만든 정걸 장군, 그는 누구인가?

by 실비단안개 2014.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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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http://cafe.daum.net/jjmkssm1545-1598)고흥 답사 고흥 발포만호성(충무사)과 이순신의 오동나무에 이어 씁니다.

 

고흥답사 주요학습은 정걸 장군에 대해서였습니다.

임진왜란을 공부하며 이순신을 배우고 영화 명량을 봤지만 정걸 장군은 거의 거론되지 않는 인물이며, 판옥선을 검색하면 부연설명이 있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1555년(명종 10년) 개발한 조선시대에 널빤지로 지붕을 만든 대표적인 군선(軍船)입니다.

- 판옥선 (조선 배) [板屋船]

 

조일전쟁(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을 빼면 이야기가 전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순신 장군의 활약이 지대했지만, 이순신 장군의 승리 뒤에는 장군을 도운 장군들과 병사들, 의병과 승려군 그리고 군량미, 노역 등에 헌신적으로 참여하고 도운 민초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며, 이순신 장군의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도운 장군들중에는 녹도만호 정운 장군, 송희립 장군, 정걸 장군 등 많은 장군이 있는 데 고흥출신 정걸 장군의 생애와 활약에 대해 자료를 바탕으로 기록합니다.

정걸(丁傑) 장군은 1514년에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후동마을에서 출생하였으며, 30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부안현감, 전라좌·우수군사와 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전라좌수영 경장으로 임명받아 이순신, 나대용 등과 함께 거북선을 만듭니다.

판옥선은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졌는데 우리는 거북선에 열광하지 판옥선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거나 보이지 않는데, 영화 명량에 나온 전선이 판옥선이며 판옥선을 만든이가 정걸 장군입니다.

 

▲ 각선도본의 판옥선(고흥 발포역사전시체험관에서 찍음)

 

[이배사모 답사자료집´ 14-2(통권8호)]에 따르면, 판옥선을 만든 사람이 정걸이라는 사실은 영조 때 언급한 한 가지 기록때문이라고 하는데 영조 때 어사 이이장(李彛章)이 해진을 돌아보다가 판옥선을 보고 그 운용이 어려우므로 계를 올려 폐지하자고 하자 영조가 말하길, 그것은 명장 정걸이 만든 것이므로 폐지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하였다는 기록입니다.

그러면 이 한가지 기록으로 고증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 다음 카페는 이순신, 임진왜란, 거북선 연구에 관하여 우리나라 최고 전문가들이 함께 활동하는 카페이기에 답사자료집의 자료는 의심을 가지지 않아도 되지만, 당시(16세기)의 시대상황을 짚어볼 필요는 있습니다. 당시 왜구로부터의 침입이 빈번하였으며, 정걸 장군이 활동하던 중종 ·명종대에는 그 침입 횟수가 상대적으로 많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군의 군비와 군선의 성능이 문제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이때에 군선은 맹선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것은 평화로운 시대에는 조운을 겸용하는 겸용선이었던 만큼 삼포왜란 이후 속출하는 변란에 아무런 소용이 닿지 않았으며, 맹선은 적을 방어하는 데 쓸모가 없다는 비판이 높았습니다. 따라서 맹선을 버려두고 한동안 10명 정도의 병사를 가지고 운용이 되는 소형 경쾌선을 이용해 보지만 왜적은 점차 큰 배와  개량된 무기로 침입하기에 이르며 1523년(중종18년)경부터 왜는 대맹선만한 크기의 배와 화포, 화통 등 무기를 가지고 왔으며, 그후 위세가 점차로 강성해져 1555년(명종10년) 을묘왜변 무렵에 이르러 더 고대견실한 배와 강력한 화기를 가지고 침입했기에 대맹선이나 소형 경쾌선으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남의 것을 탐하기 좋아하며 지은죄 또한 사과는 커녕 온갖변명으로 늘어놓기에만 급급하니 참으로 딱한 나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의 잦은 침입과 큰 배, 고성능 무기들을 막아내려 조선은 적선을 제압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군선개발에 부심한 결과 판옥선이 출현하기에 이른 것이나 판옥선이 언제 개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언급이 없어서 그 날짜를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아울러 처음에는 판옥선이라는 명칭도 찾아볼 수 없는데, 다만 1555년(명종 10년)에 기록된 기사를 참조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왕이 망원정에 행행하여 전선을 시험한 뒤에 서교에서 관가하고 날이 저물어서 환궁하였다.(명종실록 권 16, 10년 9월 戊申)

망원정은 당시 서강에 있었고 전선을 시험한 것은 새로 만든 전선을 시험한 것으로 보아지는데 여기서 새로 만든 전선이란 기존에 사용하고 있는 전선이 아닌 새로운 구조와 기능을 가진 배라고 볼 때 이것이 판옥선이 아닌가 하고 주장되지만 그 여부는 불투명하다고 합니다.

판옥선이 실록에 정식 명칭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557년 경인데 이 시기에 판옥선을 만든 것은 틀림이 없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판옥선과 전선을 구분하여 명칭을 쓰고 있으며 판옥선을 새롭게 만들어 시험하다가 강풍으로 떠내려갔다는 기록을 보아 이 시기 판옥선을 전국에서 건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판옥선을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이 단순히 명칭만 나타나고 있는데 판옥선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이 나온 것은 을묘 달량포왜변이 일어난지 11년이 경과한 시점에 판옥선에 관련한 구체적인 언급들이 등장하는데, 을묘년 달량포왜변이 있던 해에 왜구들이 전선 특징을 살펴보고 그에 대응하여 만든 전선이 판옥선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데 약 10여 년 동안 판옥선을 너무 많이 건조하여 그 폐단을 우려하고 있을 정도라는 것도 업급되었다고 합니다.

고흥 발포역사전시체험관에 전시되어 있는 판옥선의 구조와 설명입니다.

백병전에 능한 일본군은 주로 상대방의 배에 올라타 싸움을 벌였다. 이런 일본군을 막기 위해 조선은 판옥선의 몸체를 높고 크게 제작하였다. 판옥선의 높은 구조는 위에서 아래로 활을 쏠 때 유리했고, 화포를 올려놓는 포좌가 높게 만들어져 명중률 또한 높았다.

공간을 2,3층으로 구분하여 설계해 노를 젓는 격군과 함포를 발사하는 포수가 서로 방해받지 않고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배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으로 수심이 얕은곳에서도 효과적으로 운용되었다. 특히 키를 잡고 돌리면 제자리에서 바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판옥선의 등장으로 상대적으로 작고 견고함이 뒤떨어지는 일본 군선으로부터 조선의 바다를 지킬 수있었다. 

▲ 판옥선의 구조(고흥 발포역사전시체험관에서)

 

정걸 장군은 언제 판옥선을 만들었으며 그 장소는 어디일까?

정걸 장군의 생애를 살펴볼 때 판옥선을 건조할 당시 근무한 곳은 남도포(진도 팽목항 곁)만호직과 부안현감직입니다. 남도포만호직에서는 1555년 달량포(達粱浦 해남군 북평면)왜변이 진압된 이후부터 이듬해까지 불과 1년간 근무하였고 이어 부안현감직에 5년간 근무하였습니다. 1년간 근무한 남도포만호시절에는 판옥선을 건조할 여건이 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부안현감으로 근무할 때 판옥선을 건조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고 합니다.

당시 부안은 전선건조에 적합한 환경이었을까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 부안은 바닷가에 있는 지방행정단위라는 점과 무엇보다 선재인 의송이 풍부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충분한 요인이 된다고 합니다. 당시 전라도 지역에는 의송지(宜松地)가 3곳이었다고 하는데 외도, 고도, 화이도 등의 섬은 자연적으로 송림이 조성된 곳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바닷가에서 연접한 지방행정단위도 수사관할하에 있었기 때문에 전선을 건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정걸 장군이 부안현감 시절에 판옥선을 건조했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이 시기 부안에서 판옥선을 건조한 것으로 보아진다고 합니다.

 

정걸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에 전라도 수군 조방장으로 근무하면서 이순신 장군을 도와 판옥선과 거북선 건조에 도움을 주었고, 여러가지 총통류 등 군비를 확보하는데 기여 한 조선 수군명장으로서 대표성을 가질 수 있을 만큼 크게 활약한 인물이지만, Daum검색의 경우 판옥선에 정걸 장군은 언급되지 않았으며, 인물 검색에도 정걸 장군은 없는데 임진왜란 인물을 조명하는 전문가들과 고흥군 관계자들은 정걸 장군의 활약상을 발굴·연구하여 정걸 장군이 검색되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에서도 정걸 장군의 활약이 보이는 데, 권율 장군이 이끈 조선군이 왜적을 잘 물리치고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 무기가 떨어져 곤란을 겪을 지경에 처하게 되는데 이때 충청수사 정걸이 화살을 가득 실은 배 두 척을 몰고 통진에서 한강을 올라와서 적의 후방을 찌를 기세를 보이니 이를 알아차린 적은 당황하여 내성에서 물러나기 시작했으며, 이후 아군은 용기백배하여 적을 크게 물리치게 됩니다.

 

 

자료를 보면 정걸 장군은 수십 년간 쌓아온 전문지식과 다양한 경험을 십분발휘하여 조선 수군의 활동을 음지에서 도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입니다.

장군의 나이 30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50여년간의 관직생활 중 2년간 파직으로 쉬었을 뿐 평생 봉직했으며, 1583년 2월 창원부사로 부임하여 5개월이 되던 때에 북변 방어를 위해 경장으로 전보된 기록이 있다고도 합니다.

 

정걸 장군(1514년 중종 9년~1597 선조 30년)은 임진왜란 이전 시기에 이미 수군과 육군의 고위직을 역임했으며, 장군의 나이 78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며 83세에 작고하였습니다. 지금으로 쳐도 천수를 누렸으며 활약 또한 남달랐지만 정걸 장군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은 활약도에 비해 비미하며 어린시절은 자료가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걸 장군에 관한 자료가 부족한 이유는 후손들이 임진왜란 시기 단절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하는데, 장군의 아들 연(淵)은 무과급제 후 영광군수를 지냈는데 정유재란때 의병으로 참전하여 흥덕에서 전사하였으며, 손자 홍록(泓祿)도 무과급제후 낙안군수를 지냈으며 7년전쟁이 종료된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마지막 남은 증손자 정엽이 성장하여 독자집안 손을 400여 년간 이어내려 오고 있는데 정걸 장군의 14대 자손인 정종욱 선생께서 이배사회원에게 점심식사를 준비해 주었으며, 포두면사무소 근처의 일조갈비에서 식사를 한 후 정종욱 선생의 안내로 유적지를 참배했습니다.

 

이동중에 정종욱 선생은 이배사회원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는데 여기서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느껴야 했습니다.

정걸 장군의 활약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기록이 부족한 탓입니다.

요즘에야 본인이나 가족이 아니더라도 중요한 일들은 여러 곳에서 많은 이들이 기록을 하지만, 임진왜란중에 이순신 장군의 일기형식의 기록은 전무후무 하기에 난중일기를 바탕으로 이순신 장군은 계속 조명을 받고 있지만 정걸 장군의 경우 기록이 소소하다보니 활약도에 비해 조명을 받지 못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소한 일상일지라도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 정걸 장군의 14대손 정종욱 선생

 

우주로 도로변에는 자헌대부 병마절도사 정걸 유허비와 신도비가 후손들에 의해 세워져 있습니다.

14대손 정종욱 선생은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는데 귀한 분 모시고 공부를 했으니 이배사회원인 우리가 감사를 드려야 마땅한 일입니다. 

 

 

정걸 장군을 비롯 7분을 모신 사당인 안동사로 갔습니다.

안동리는 따스웠고 고요한 동네였습니다.

 

 

안동사 승유재(承裕齋)는 제사를 지낼 준비를 하는 재실인데 관리가 전혀되고 있지 않은 듯 했기에 안타까웠는데, 고흥군은 명량을 등에 업고 일을 자꾸 늘리기보다는 있는 문화재와 사당부터 살펴야 할 것입니다. 안동사의 경우 문중에서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경제적인 지원이라도 해 주었으면 합니다.

 

 

 

▲ 안동사에 모셔진 위패

 

안동사 현판은 오래전 정권의 실세였던 정일권의 친필이라고 하며, 후손이 정걸 장군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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