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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낙동江과 팸투어·답사

새마을운동으로 가치 잃은 여도진과 비석군

by 실비단안개 2014.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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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http://cafe.daum.net/jjmkssm1545-1598)고흥 답사 고흥 사도진과 기념물 해지된 520년 은행나무에 이어 마지막이 되는 여도진 성지편입니다.

- 지붕없는 박물관 고흥과 녹도진 성지(쌍충사)

- 고흥 발포만호성(충무사)과 이순신의 오동나무

- 판옥선 만든 정걸 장군, 그는 누구인가?

- 고흥 사도진과 기념물 해지된 520년 은행나무

 

하루에 수군 진성 몇 곳을 답사하는 일은 무리였습니다.

여도진성에 도착했을 때 오후 4시 40분이었기에 수박 겉 핥기식으로 여도마을을 둘러봐야 했는데 여호마을앞까지 버스로 이동했으며, 마을앞에서 하차하여 그나마 많은 인원이 찬성하여 해가 저물고 있음에도 진성에 좀 더 가가이 하고픈 마음으로 골목을 걸어 여호한길목길로 나왔습니다.

 

▲ 화살표 시작이 여도진로며 화살표가 나오는 길이 여호한길목길

 

우리가 여호한길목길을 벗어나려니 할아버지 한 분이 여도진성이 있는 마을로 들고 있었는데 이 길이 여도진로며, 가운데 봉긋한 동산에 석성흔적이 남아 있지만 밭둑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멀리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버스가 멈춘곳은 여호해안길 44 일대로 여도진성을 부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어촌계장님의 안내로 골목을 들어 고개를 넘으며 설명을 들었지만, 대부분의 유적지가 그러하지만 여도진성은 설명만으로 부족하기에 여유롭게 걸어 확인해야 하는 성지이기에 고흥에 갔어도 여도진성도 못 봤네 할 정도로 마지막 성지 여도진은 아쉬운 답사길이 되었습니다.

 

여도진 성지는 지방기념물 제155호(지정일 1994년 12월 5일)로 조선시대 수군 진성입니다.

기념물로 지정된지 20년이 되었지만 고흥군은 관리를 하지 않았는지 진성이라고 하기에는 흔적이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우리의 경우 이순신과 임진왜란에 대해 학습을 하기에 전문가를 대동하여 답사가 가능했지만 개인이 여도진 성지를 답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여도진 성지高興呂島鎭城址

전남 고흥군 점암면 여호한길목길 52(여호해안길 30-8)

고흥군 점암면 여호리 684번지

 

1994년 12월 5일 전라남도의 기념물 제155호로 지정되었다.

여도진성은 1491년(성종 2)에 축성된 것으로서 그 둘레가 1,320자(尺), 높이가 15자이었다고 《성종실록》에 기록되었으나 지금은 성터의 유구 일부만 남아 있다. 1991년 목포대 박물관이 낸 『고흥군의 문화유적』에 나타난 조사결과를 보면, 성벽의 현존상태는 남벽이 길이 약200m에 높이가 60 ~ 150cm, 서벽의 경우는 약95m의 길이에 높이가 약 180cm 정도의 규모라고 한다. 그리고 북벽의 길이가 약 195m, 동벽이 약 110m이지만 사실상 서벽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벽이 그 윤곽만 남아있는 셈이다. 그러나 지금도 성남북 양쪽에는 문지(門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여도진은 임진왜란때 전라좌수영 관내 5관(官)5포(浦) 가운데 하나의 수군진으로서 당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여기에는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주둔하고 있었으며(임진왜란중에는 종9품관인 권관이 주둔했음), 견고한 방어성으로서 진성(鎭城)이 갖추어져 있었지만 현재는 석성의 일부만 남아있다.

남쪽으로 팔영산을 등지고 자리 잡은 이곳은 그 전방에 원주도(元 珠島), 북쪽에 내백일도·우모도(牛毛島)·계도(鷄島), 그리고 동쪽으로 항도(項島)에 둘러쌓인 해상요충으로서 여자만해역을 방어할 수 있는 천연의 요새지이다. 이곳에 수군진이 처음 설치된 것은 알 수 없다. 수군제도가 기록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조선초기부터였으니 《세종실록지리지》에 반영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의 전라도 수군편제를 보면 무안현에 전라수군처치사영을 두고(현재는 함평관내) 그 밑에 좌우의 도만호영(都萬戶營)을 설치하였다. 좌도 도만호영은 고흥 여도에 있었고, 우도 도만호영은 무안 원포(垣浦, 현재의 해제면)에 있었다. 이 때 여도의 전라좌도수군 도만호영에서는 내례(內禮, 여수), 돌산(突山, 여수), 축두(築頭, 고흥), 녹도(鹿島, 고흥), 회령포(會寧浦, 장흥), 마도(馬島, 강진), 달량(達梁, 해남), 어란(於蘭, 해남) 등 8개소의 수군만호영을 통할지휘하는 전라좌도의 수군본부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후 세조때 개편된 진관체제하에서 여도진은 도만호영에서 만호영으로 격하, 같은 고흥반도에 위치한 사도진(蛇渡鎭)의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예하에 귀속된 후부터 큰 변화없이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란 기간중 여도진 수군은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여도만호 김인영(金仁英)의 지휘하에 해전에 참전, 일본군을 섬멸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니 그에 대한 기록이 《이충무공전서》와 《난중일기》에 자세하다.
(출처 : 고흥문화관광 http://tour.goheung.go.kr/templetview?site_id=7&menu_id=34&type=LOOK&tmno=94&page=1

 

석성부분이 보이는 곳에서 우리의 흔적을 만들고 어촌계장님의 안내로 골목으로 들었습니다.

여도진성의 성곽은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성 곳곳에서 잔존석렬이 남아 있어 성의 윤곽을 확인할 수 있으며, 성문은 북문과 남문이 기록되어 있고, 구전으로도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객사와 동헌으로 지목된 곳은 현재 밭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재 여호리 175-5번지가 해군관련 시설이었다는 이야기도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으며, 여도진의 우물은 여호리 172번지가 우물터로 전해집니다.

 

 

오래전 공중화장실은 주민들이 농사용 거름 등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여호한길목길 13 근처로 화장실옆에 비석군이 있었습니다. 비석은 약 100년 전에 여호리 345-2번지를 경작하는 도중에 땅 속에 있던 것을 발견하여 토지 경계로 옮겨놨다가 약 30여 년 전에 마을길을 넓히면서 마을의 어른들이 그래도 옛 비석인데 모아서 보관을 하자고 하여 비석 4기는 마을입구로 이건하였으며, 후에 다시 발견된 1기의 비석은 이후 여호리 215번지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비록 여도진만이 아니지만 성(城)에 대한 가치를 모르다보니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성벽돌을 빼 담을 쌓거나 방파제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보존을 했으면 훌륭한 유산이 될 텐데 당시 새마을운동은 옛것은 헌것이다라는 짧은생각이 지배적이었기에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새마을 운동을 내세워 부수고 없애는 일에 앞장섰는데 최대피해는 문화재일 것입니다.

2013년 6월 18일에 새마을운동 관련 기록물이 난중일기와 더불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긴 했지만 문화와 역사, 우리의 정서를 파괴한 것은 사실입니다.

 

- 새마을 운동

새마을운동 : https://mirror.enha.kr/wiki/%EC%83%88%EB%A7%88%EC%9D%84%EC%9A%B4%EB%8F%99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소장 소재구)는 급속하게 사라져 가는 도서․해양 지역의 해양문화유산을 조사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이 기록들을 보존과 활용을 위한 기초자료로 삼기 위해 매년 현지조사를 시행하고  있는데 해양문화유산 조사․연구의 결과물인『상․하노대도(上․下老大島), 두미도(頭尾島)』,『여서도(麗瑞島)』,『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 보고서 3권을 올해 발간했는데, 이번에 발간한 3권의 보고서는 2013년도에 조사한  '경상남도 통영시 욕지면의 상․하노대도와 두미도',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 '여서도'와 2012∼2013년도에 조사한 '전라좌수영과 그에 속한 7곳의 수군진'은 전라남도 여수의 전라좌수영을 비롯하여 방답진, 녹도진, 발포진, 사도진, 여도진, 고돌산진 등 7곳의 수군진(水軍鎭)을 조사·연구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현재 대부분의 수군진 원형은 많이 훼손되었으나 방답진 선소 등은 원형이 잘 남아 있음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했으니,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꾸준히 조사하여 결과물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바랍니다.

 

 

비석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하여 고흥문화원(061-835-5245)에 연락을 하여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비석은 조선 중기 역대 여도진 만호들의 선정비로 박홍엽, 박종기, 신행즙, 김연서의 비라고 했습니다.

그나마 이 정도의 기록이라도 전해지니 다행이다 싶었는데 고흥문화원측에서 새마을 운동으로 흩어졌던 비석을 모아 두었다는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았으며 아마 더 있었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습니다.

 

 

지도와 사진으로 설명이 부족하여 로드뷰 주소 올리니 여도진 성지를 직접 걸어보셔요.

- http://map.daum.net/?srcid=12740342&confirmid=12740342&rv=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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