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섬투어3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슬픈섬 소록도小鹿島
1, 보리문둥이와 소록도 탄식의 장소 수탄장愁嘆場
어릴때 하교때면 먼길을 걸어 집으로 오곤 했는데 그때 우리는 보리밭을 지나면서 "보리밭에 문둥아 해 다 졌다 나온나~"이런 말(노래?)을 했는데 성격상 직접 부르지는 않았을 테며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들었을 정도였을 텐데 당시엔 문둥이가 우리와 다른 모습의사람인지 괴물인지도 모르고 어울렸습니다.
경상도 사람을 보리문둥이라고들 하는데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지역감정 조장이라는 설이 있으며, 문둥이는 문동(文童)이가 변하여 문둥이라고 한다는 설이 있는데, 자란 보리밭은 숨기에 아주 안성맞춤인 장소로 놀다 보면 해를 넘기기 일쑤였기에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장소로 적합했기에 보리밭에 문둥이(문뎅이) 이런 말이 나오지 않았나 짐작해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운 말만 쓰는 줄 았았던 시인의 문둥이란 시가 있에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라는 엽기적인 표현이 있는데 시인은 어떤 마음으로 이 시를 썼는지 궁금합니다.
문둥이/서정주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30년쯤 되었나 봅니다. 그때 우리는 부산 초량에 살았으며 청십자의료보험조합에 가입하여 의료혜택을 받고 있었는데 당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에서 매월인지는 기억에 없지만 책자를 발간하고 있었으며, 채규철 선생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채규철 선생은 화상으로 코도 없고 눈썹이란 것이 머리카락을 이식해서 붙여놓아 잘라주지 않으면 머리털처럼 자라고 손은 구부러지고 눈은 화상으로 인해 한쪽은 실명했고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괴인이나 다름 없었기에 버스를 타려고 하면 나병환자라고 거절당하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나병환자의 모습과 삶을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채규철 선생의 딸 이름이 채송화였기에 정스러운 이름 덕분에 아마 지금껏 기억하고 있는 듯 하며, 부산 용호동에 나환자촌이 있다는 이야기를 오래전에 풍문으로 들었지만 나환자를 만난적은 없습니다. 우리는 29일 저녁식사전에 오마간척지와 '오마간척 한센인 추모공원'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금방 어두어졌기에 아주 잠시 머물수 밖에 없었는데 오마간척지는 소록도 북쪽 봉암반도와 풍양반도의 한 가운데 떠있는 무인도인 오마도를 육지와 연결하고 안쪽 (330만평)바다를 메운 간척지로 1962년 소록도 전 자혜병원장 조창원의 주도하에 한센병 환자들이 농사를 짓고 살기 위한 생활 터전을 목적으로 바다를 메워 농지를 만들었던 오마도 간척사업입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건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며 꿈을 꿀 수 있다는 차이입니다. 버리진 삶, 인생 같았던 나환자들이 '내 땅을 갖게 된다'는 설레임 속에 붕대로 감싼 손에 괭이와 삽을 거머쥐고 손수레를 끌며 바다를 메워나갔을 그 고통은 짐작도 불가능한데 그들은 성치 않은 몸과 맨주먹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광활한 바다와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바다 매립공사를 시작할 무렵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이 닥쳤는데 섬 인근 뭍의 주민들이 문둥이들과 이웃이 되어 살아갈 수 없다며 반발하였으며, 간척지가 완성된 후 일반인들에게 분양되는 억울함을 당했으니 그 배신감 역시 당해보지 않은 이는 모를 겁니다. 국가에서 아직 보상을 해주지 않아 갈등이 끝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들은 이미 노쇠했으며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뀌었으니 마치 우리나라의 전통같은 누구도 책임을 지지않는 그런 현상이 반복될 것 같습니다. 한센환자들이 간척지를 만들며 당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고흥군에서 세운 추모공원이 간척지를 내려다보며 건립되었지만 그들과 후손을 위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 오마간척 한센인 추모공원에서 보는 간척지
소록도(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해안길 65,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 202-4번지)는 여의도의 1.5배 면적으로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과 비슷하다고 하여 소록도라 하며, 녹동항으로부터는 해상 약 600여m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소록대교가 건설되어 있기에 통행이 어렵지 않습니다. 소록도는 섬전체가 국립소록도병원으로 1916년 5월 17일 한센병 환자를 보호, 치료하는 목적으로 설립되어 약 100년의 역사속에서 한센병 환자의 삶의 질 향상과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을 하고 있으며, 방문객은 준수사항을 잘 지켜야 하며 만일의 사고시 모든 책임은 방문객이 져야 한다는 안내가 있습니다. * 한센인 : ‘나환자(癩患者)’를 달리 이르는 말. 나병균을 발견한 노르웨이의 의학자 한센(Hansen, G. H. A.)의 이름에서 유래한 명칭. 새벽에 내린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금방이라도 다시 비를 쏟을 듯 했으며, 11월 마지막날 아침식사는 녹동수협 뒷골목에 있는 밥집에서 우럭매운탕으로 하고 우리는 녹동 맞은편의 소록도(小鹿島)로 갔습니다. 11월 첫날 녹도성지에서 소록대교와 소록도를 확인하고는 꿈 하나가 생겼다고 했었는데 그 꿈이 생각외로 빨리 이루어졌기에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죄송한 일이 될 수 있겠지만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슬픔이 와 닿는 소록도를 한번쯤은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 소록대교를 지나며 소록도에 닿아 두리번거리다 걸음을 옮겨 처음 만난 역사의 현장은 수탄장(愁嘆場)이었습니다. 근심 수愁, 탄식할 탄嘆, 마당 장場. 이곳은 직원지대와 병사지대로 나뉘어 지는 경계선으로 1950~1970년까지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고 합니다. 병원에서는 전염을 우려하여 환자자녀들을 미감아보육소에 격리하여 생활하게 하였으며, 병사지대의 부모와는 이 경계선 도로에서 한달에 단 한번 면회가 허용되었습니다. 내 자식이 손 닿는 곳에 있는데, 부모님이 바로 앞에 계시는데 양옆으로 갈라선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눈으로만 만나야 하니 그 고문은 육체적인 아픔보다 더 잔혹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부모와 아이들은 이 면회를 통해서 그리움을 달래야 했으며,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탄식의 장소라고 하여 수탄장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한센병은 태반에서는 유전되지 않지만 어머니 품에서 자라다보면 부모로부터 전염될 가능성이 높으며 한센병의 잠복기는 5~20년 정도라고 합니다. 이름만으로도 슬픈 섬 소록도에서 그들의 애환에 한걸음 다가간 수탄장이었습니다. 우리는 수탄장이 아닌 테크로드를 따라 중앙공원쪽으로 갔는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미카엘 대천사가 창을 들고 싸우는 모습의 구라탑(救癩塔)으로 기단의 '한센병은 낫는다'는 문구가 서럽게 와 닿았습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 한하운 <전라도길-소록도 가는 길에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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