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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낙동江과 팸투어·답사

[창녕]잘 생긴 지석묘(고인돌)와 교동·송현동 고분군

by 실비단안개 2016.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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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7일

7월 17일~18일 창녕군 팸투어에 참가했습니다. 주최는 창녕군이며, 주관은 유한회사 해딴에(경남도민일보 자회사, 별도법인)였습니다.

참 많은 곳을 다녔으며 창녕의 많은 먹을거리를 직접 체험했는데 글이 어디까지 될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창녕의 군화가 배롱나무인가 할 정도로 도로변에 배롱나무가 많았습니다. 달리는 버스에서 꽃을 피웠으니 배롱나무인줄 알았는데, 창녕군화는 '국화'네요. 그럼에도 배롱나무가 아주 많았기에 해딴에 대표에게 물어보니 창녕뿐 아니라 경남엔 배롱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고성에도 배롱나무가 많긴 많았으며, 근처 성흥사 대웅전 뜰에 큰배롱나무가 혹 꽃을 피웠을까 하며 달리는 버스에서 성흥사에 전화를 하니 지금 봉오리가 졌는데 언제쯤 필런지는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창녕의 여러 유적지도 좋았지만 배롱나무가 참으로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창녕] 잘 생긴 지석묘(고인돌)와 교동·송현동 고분군

유리마을의 지석묘(고인돌)와 교동·송현동 고분군은 한 날이었지만 시간차가 있었는데, 지석묘와 고분군이 무덤이라는 공통점이 있기에 묶어 포스팅합니다.

예전에도 창녕군 팸투어가 있었으며, 답사도 한 번 다녀온 것 같은데 지석묘와 고분군은 처음입니다.

유리마을의 창녕 지석묘는 선사시대의 유적이며, 교동·송현동 고분군은 가야시대의 고분군입니다. 그러므로 창녕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창녕엔 유명한 부곡온천이 있고 우포늪과 억세가 유명한 화왕산이 있으며 양파시배지이기도 합니다.


1, 창녕 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제2호)

경남 창녕군 장마면 유리마을에 있는 지석묘를 찾아갑니다.

유리마을이라고 하니 티끌하나 없는 투명한 마을같습니다. 지석묘는 구릉에 있기에 낮은 계단과 오솔길을 걸었는데 마을메서 170M거리니 걸을만 했습니다. 큰나무가 오솔길 양옆으로 뻗어 그늘을 만들어 주었으며 바람이 살랑거려 시원하기까지 했습니다.



마을에 안내표지판이 없다면 이 숲속에 지석묘가 있다고 누가 믿을 까 할 정도로 마을은 고요했으며, 지석묘와 주변도 고요했습니다.

지석묘는 고인돌 또는 돌멘이라고 부르는데 선사시대 가운데 청동기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무덤은 전형적인 남방형 지석묘로 옛부터 과거를 보러 가기전 이곳에 치성을 드리면 급제를 한다하여 반드시 절을 한 다음 과거길을 떠나곤 했다고 합니다. 원래 7기의 지석묘가 북두칠성형으로 배열되어 일명 칠성바위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1912년 도로공사때 일본인이 일부 파괴, 공사에 사용하여 1기만 남게 된것을 1962년 국립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하여 하부의 구조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창녕 지석묘 안내표지판입니다.



지석묘를 여러 방향에서 찍었습니다. 돌덮개가 거대한데 이에 반해 벽체(굄돌)는 약했으며 여러개의 돌이 돌돞개를 받치고 있었는데, 무게가 상당할 것 같은데 잘 겨뎌주어 신기하여 앉아서도 보고 모로도 보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록같은 건 없는 듯 했습니다.



고인돌의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 해딴에 김훤주 대표가 팔을 벌려 보였습니다.

창녕 지석묘는 경남의 대표 고인돌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크고 잘 생겼습니다. 이 일대는 지표가 판상혈암(板狀頁岩)의 암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이 고인돌은 화강암인데 이 무거운 돌을 구릉까지 어떻게 옮겼는지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2, 교동·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호)

7월 17일 오후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으로 갔습니다.

창녕 송현동 고분군은 북서쪽으로 인접한 교동 고분군과 함께 목마산(牧馬山) 남쪽 기슭에 직경 20m 이상의 대형고분을 비롯해서 중·소형 고분 30여 기가 분포하고 있는데,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81호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에 지정 해제되고 사적 제514호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으로 재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송현동 고분군인데요, 송현동 고분군은 지금까지 소개된 고분의 구조와 축조기법 그리고 돌방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의 특징을 참고하면,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전반 사이에 축조된 창녕지역의 유력한 지배자의 무덤으로 판단된다고 합니다.



교동 고분군은 송현동 고분군 맞은편에 있는데, 1911년 일본인 학자 세키노 타타시(關野 貞)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때 일본은 우리 산하와 문화재를 그냥 두지 않았는데 고분군에서 발굴한 유물은 일본 도쿄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1917년의 분포조사를 시작으로 1918년, 1919년에 걸쳐 11기의 고분이 발굴조사 되었으나 제21호, 31호분을 제외하고는 보고서가 간행되지 않았으며, 조사자에 따라 고분번호를 달리하는 등의 요인으로 인해 조사된 고분이 어느 고분인지 정확하게 구분하기조차 어렵다고 합니다.
이 시기 조사를 통해 마차 20대와 화차 2량분의 토기와 금공품들이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나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일부 유물을 제외하고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하니 안타가운 일입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자료를 통해 보면 금동관, 금·은장신구, 은 관장식, 금동관모, 금귀걸이 등의 장신구와 각종 마구류, 장식무기류, 비늘갑옷을 비롯한 각종 철제무기류, U자형 삽날을 비롯한 각종 농공구류와 금속용기류, 각종 토기류와 목기류가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서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2007년 경남 창녕 송현동 고분군에서 남성 두 구, 여성 두 구 등 네 구의 유골이 발견됐다는 기사를 읽었을 텐데요, 이 중 무덤 입구 쪽에서 발견된 여성 유골 한 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전하게 보존돼 역사학자와 과학자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도굴(盜掘) 등으로 대형 고분에서 온전한 유골이 발견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성 유골은 송현동 고분에서 발굴되었기에 '송현이'로 이름지어졌습니다.

순장된 16세 소녀 송현이는 1500년 만에 세상 빛을 봤는데, 주인이 돌아가면서 죽어서도 주인을 모시라며 함께 묻혔다고 하는데, 소녀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컴퓨터 단층촬영, 방사성 연대 측정, 유전자(DNA) 검사 등 다양한 기법이 동원됐다고 합니다.



교동 고분군입니다.

광복 후 교동 고분군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1992년 동아대학교 박물관과 2009년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부분적으로 실시하였다고 하니 일본에 비해 상당히 늦은 편입니다. 창녕에 대학이라도 있었더라면 고분  연구는 더 빨라졌을 것이며, 고분에서 발굴된 문화재도 서울이나 외부의 박물관이 아닌 창녕박물관 소장으로 창녕지방에 남아 있을 겁니다.




교동 고분군은 경작지 개간으로 인하여 봉토 상부가 깎여나가기도 했다고 하는데 현재도 주변이 경작지였습니다. 잠시 짜투리 시간을 이용했기에 시간이 부족하여 고분군을 다 둘러보지 않아 아쉽지만 창녕박물관과 기타 사전에서 교동 고분군과 송현동 고분군을 검색했는데 여러분이 창녕을 여행할 계획이라면 고분군 관람시간을 넉넉하게 잡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하십시오.

민족문화대백과가 말하는 창녕 교동 고분군의 의의와 평가입니다.

창녕은『삼국지(三國志)』동이전(東夷傳)에 보이는 진한의 불사국(不斯國)으로서 비자화(比自火)·비사벌(比斯伐)이라고도 불렸으며 이곳의 중심부에 교동고분군이 자리잡고 있다. 교동고분군은 인접한 송현동고분군과 더불어 5세기 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군은 창녕지역 유력 집단의 수장급 무덤인 대형분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그 주위에 가족이나 친연관계를 가진 자들의 중·소형 무덤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고분군에서 경주에 분포하는 돌무지덧널무덤 다음으로 많은 양의 신라 계통 금속유물이 발굴되어 그 당시 창녕지역이 신라 중앙과 정치적 관계가 밀접하였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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