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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월드컵등대공원, 대~한민국 함성이 들리는 듯

by 실비단안개 2017.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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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부산 기장 연화리 젖병등대 해맞이 후 대변의 월드컴 등대공원으로 갔습니다. 지난해 1월 젖병등대에 갔을 땐 근처의 닭벼슬등대는 갔지만 앞바다의 장승등대와 월드컵 등대는 멀리서 보기만 했는데, 월드컴 등대가 월드컴 등대공원으로 새단장을 했다고 하니 등대 공원 구경을 가는 겁니다.

지난해 젖병등대 방파제에서 찍은 젖병등대, 닭벼슬등대, 장승등대, 월드컵등대입니다.



연화리 포구에서 찍은 월드컵등대와 장승등대입니다.



새해 첫 날 월드컵등대와 장승등대입니다. 월드컵등대로 갑니다.



방파제 입구에서 등대까지 400m 입니다 가까운 거리는 아닙니다.



안전사고가 발생했을 때를 대비하여 구조가 용이하도록 번호를 적어 두었습니다. 산행시에도 곳곳에 어디 몇 번 이런 푯말을 봤을 텐데요, 같은 역할을 하는 듯 합니다.




CCTV가 설치되어 있으며, 인명구조함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음식점 연락처가 모두 적혀 있었습니다. 근처 대장동 계곡엔 치킨집 연락처가 많은 데 말이지요. 죽섬과 대변항이 보입니다.




방파제 밖을 보니 장승등대가 가깝게 보입니다. 장승등대는 모양때문에 마징가등대라고도 하는데, 장승등대는 마을에서 가장 멀리 있어 마을의 안전을 지켜주는 장승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데, 하나는 바다쪽을 또 하나는 육지쪽을 보고 있습니다.





월드컵 등대입니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기념해 한국 축구발전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있는 월드컵 등대는 대변항의 방파제에 있는데, 준공은 2003년이었으며, 2015년 12월 부산 지방해양수산청이 대변항 월드컵등대 주변에 테마공원을 조성했습니다.
테마공원은, 등대 주변에 제1회 우루과이 대회부터 최근 제20회 브라질 월드컵까지 역대 월드컵에 사용된 모든 공인구 모형이 전시됐고, 모든 참가국과 대회 우승국 등 월드컵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또 역대 월드컵 개최국 대사의 등대공원 조성 축하 메시지와 친필 서명을 전시하고, 방파제 벽체와 바닥에는 2002 한·일 월드컵 당시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을 그림타일과 부조타일 형태로 조성했습니다.



등대공원 바닥입니다.




여행인구의 증가로 등대는 더 이상 신비의 대상이 아니며, 어릴 때 불렀던 '등대지기'노래도 이제 몽롱한  노래가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갈 수 있는 곳이 등대인데 부산 기장은 정말 많은, 여러 종류의 등대가 모여 있는 지역입니다.


항해하는 선박이 육지나 배의 위치를 확인하고자 할 때 사용하거나 항만의 소재, 항의 입구 등을 알리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연안의 육지에 설치된 등화를 갖춘 탑 모양의 구조물을 등대라 하며, 암초나 수심이 얕은 곳 등에 설치하여 주변을 항해하는 선박에게 장애물 및 항로의 소재 등을 알리기 위하여 사용하는 구조물로서 등화가 있으면 등표라고 하고 등화가 없으면 입표라고 합니다.

 

한국 등대역사는 우리에게 불행한 시기에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의 술책과 강압에 의한 시대적 산물로 등대가 건설되었기 때문입니다.
1876년에 이루어진 강화도조약은 우리나라를 쇄국주의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뒤 개항장을 드나드는 제국주의 침략세력은 이권을 먼저 차지하려고 싸움을 벌였지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용기를 얻은 일본은 개항장을 통하여 한일 양국간의 선박 왕래가 날이 갈수록 빈번해졌는데 한국 연해의 요소에 등대나 초표가 설치되지 않아 불편한 점이 많다며 등대건립을 촉구하는 외교문서를 보내옵니다.
또한 등대건설위치선정을 위한 측량선의 인천 도착 날짜를 통보하니 협조원을 보내라는 독촉도 하였으며 각 항구에 출입하는 상선으로부터 징수하는 관세를 등대건설에 충용하라는 제의도 하였으며, 또한 러시아 영국으로부터도 비슷한 요구가 있었습니다


등대의 효용성을 알고 있었지만 극심한 재정난으로 난감해 오던 우리 정부는 결국 열강의 강권에 못 이겨 1902년 인천에 해관등대국(海關 燈臺局)을 설치하고 그 해 5월부터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자(北長子) 등대와 백암(白岩) 등표(燈標) 건설에 착수해 1903년 6월에 이를 각각 완공하였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등대의 효시입니다. 결국 우리 나라를 넘보던 열강들의 이양선(異樣船) 길잡이 역할을 해 주기 위한 바다의 이정표(里程標)로 등대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자의가 아닌 타국의 힘에 부쳐 등대를 세웠지만, 설사 그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후에 우리의 필요에 의해 등대를 건립했을 테지만, 우리나라 등대의 역사는 우리 근대사와 맞물려 있는 슬픈 역사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등대는 여행지며 사진가들에게는 좋은 출사지고, 지자체는 관광객 유치를 위해 특이한 모양의 등대를 건립하는데 기장의 등대들이 대표적입니다.


대변항의 월드컵기념 등대입니다. 등탑에 올라가지는 못 했지만 붉은 등대와 축구공에서 위엄이 느껴집니다.





참 오래전 일 같습니다. 제17회 2002년 월드컵은 한국과 일본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공동 개최 형태로 치러졌으며, 아시아 대륙에서 개최된 첫 번째 대회였습니다. 브라질이 우승했고 한국은 4강에 진출했습니다.

한일월드컵 개최로 한국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4강신화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열렬한 길거리 응원은 한국축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으며 국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

붉은 악마가 주도한 월드컵 길거리 응원은 2002 FIFA 한일 월드컵에서 폭발적이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16강 진출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시청 앞 광장, 광화문 등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장소에 모여 다 같이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를 연호하며 응원했는데 당시 우리나라는 4강에 진출했었습니다. 이곳 시골에도 빨간티셔츠를 구입하여 티비앞에서 응원을 했습니다. 대~한민국~ 함성이 들리는 듯 합니다.

2002년 월드컵 승리 기념으로 등대로 남긴 건 잘 한 일 같습니다.


2002년 월드컵 기념 안내문과 참가국, 우리나라 참가선수, 히딩크 감독, 월드컵 엠블렘 등입니다. 한일월드컵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히딩크 감독인데요, 히딩크감독은 한국 축구를 단시간에 4강에 올려놓은 분입니다. 1998년 FIFA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4위, 2002년 FIFA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4위, 2006년 FIFA 월드컵에서 오스트레일리아를 16강에 올린 경력이 있으며, 2006년 FIFA 월드컵이 끝난 이후,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거쳐 현재 첼시 FC의 임시 감독을 맡고 있다고 합니다.







테마공원은 등대 주변에 제1회 우루과이 대회부터 최근 제20회 브라질 월드컵까지 역대 월드컵에 사용된 모든 공인구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데 더러 공이 없는 곳도 있었습니다. 설마 누군가가 가지고 간 건 아니겠지요.



방파제에 차량진입이 금지다보니 자전거로 이동하기도 하며 방파제를 거닐기도 하고, 아래에는 낚시를 즐깁니다. 기장에 가면 구경거리가 많으며 먹을거리도 많지만 등대구경도 꼭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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