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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가본 곳

동피랑 벽화마을 11년, 그대로인 건 '안녕!' 하나

by 실비단안개 2017.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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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3일

마을 부녀회에서 하루코스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산청 꽃축제에 간다고 하더니 부산쪽으로 가기에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보니, 산청만 가기에는 하루가 길기에 통영에 들렸다 산청으로 간다고 하더군요. 통영 참 오랜만입니다.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을 처음 방문한 때는 2007년이었습니다. 당시 푸른통영21 김형진 위원장님의 초대로 서울의 우근님과 함께 방문했습니다.

동피랑 마을은 통영의 달동네였습니다. 그런 달동네가 지금은 최고의 벽화마을로 자리잡아 통영을 알리는데 일조를 하지요.

동피랑은 '동쪽'과 '비랑'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생긴 이름으로 비랑은 비탈의 통영 사투리입니다. 옛 통영성의 동포루가 산 정상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푸른 통영21 추진협의회는 2007년 10월 도시재생의 색다른 시선 '통영의 망루 동피랑의 재발견'이라는 사업을 시행했는데, 이는 통영시가 동포루 복원과 공원 조성 목적으로 마을을 철거하려고 하자, 공공미술을 통한 마을 살리기 사업이었습니다.


통영 중앙시장 맞은편에서 하차하여 우리는 중앙시장통을 걸어 동피랑으로 올랐습니다. 중앙시장 근처에 통영 꿀빵집이 많이 생겼더군요.



중앙시장에서 동피랑 벽화마을을 오르는데 벌써 동네가 달라져 있었습니다. 주민이 운영하는지 외지인이 유명세를 타고 들어 와 문을 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자그마한 가게들이 있었습니다. 처음 동피랑을 방문했을 때는 커피점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은 완벽한 관광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통영하면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을 빼놓을 수 없는데, 한산도가입니다.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笳)는 남의 애를 끊나니

* 一聲胡笳 : 한 곡조의 피리 소리 


커피와 기타 먹을거리를 팔고 있는 가게들이 반갑기도 했지만 좀은 낯설기도 했습니다.




오래전에 있었던 천사의 날개는 아닌듯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번갈아 천사가 되었습니다.



처음 동피랑을 방문했을 땐 벽화들이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 했습니다. 11년이 지난 지금 동피랑은 보다 적극적으로 세상과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더 걷다보니 천사가 또 나타났습니다.



동피랑에도 세월호가 있었습니다. 응답하라 1988로 재조명된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가 표절논란에 휩사이기도 했지만 여기선 세월호 미수습자가족을 위로하는 듯 했습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 선생님에 이어 여학생을 합해 2명의 신원이 확인되었다고 했습니다. 나머지 7명도 응답하십시오.



거북선이 액자를 뚫고 나왔습니다. 동피랑은 과거와 현재를 쉼없이 넘나들었습니다.




통영이 낳은 음악가인 정윤주와 윤이상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타일에 그림을 그리고 글도 썼습니다. 요즘 도자타일아트가 유행인 모양입니다.



예전에 천사의 날개가 있었던 자리같습니다. 김춘수의 꽃도 이 자리에서 만난 듯 합니다. 두 분의 사진을 우리 일행이 찍은 후 잘못 찍었다면 다시 찍어드리겠다는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피랑 난간에 시와 통영 사투리가 있습니다.




2010년 당시 푸른통영21에 의하면, 동피랑 구멍가게에 '푸른통영21'에 전해달라고 詩를 맡겨놓고 가셨답니다. 누구신지 찾으려해도 연락처도 안남기고. 전현배님은 신안군의 시인입니다.


가풀막에 핀 꽃 / 전현배
            
통영 동피랑,
삐죽이 고개 내민 채 거드름 피우는
꽁치 한 마리
뒷짐 진 꽁무니에 달고 귀갓길 재촉하는
김 간난 할매
가다 쉬고, 쉬다가는 또 냉큼 몸 일으켜
어물창고 붙박이로
굴 껍데기 까느라
웅크려 앉아 다 놓쳐버린,
물때로 더께지어 각질만 남은
여든 평생,
 
조붓한 가풀막
한 서린 점액 뱉어 내며

무겁게 떼어놓는 걸음걸이
칠십만 되었으면 좋겠다고
뒷걸음질해보는 십년
 
초년 과수되어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
바람처럼 나뜬 자식들
시린 발등 적실 뜨신 물이 될 깜냥으로
거친 숨 몰아쉬며 오르고 내린 길
 
손바닥만 한 툇마루에
까칠하게 여윈 하루 내팽기듯 부려놓고
굽은 허리 바짝 세워보면                                                                                           
 
우두둑 우두둑 소리 내어
앙살하는 나이,어느 한 곳 겨울 아닌 것이 없어
불거져 내릴 듯해
늘 아슬아슬한 김 씨 할머니
 
 * 가풀막 : 몹시 가파르게 비탈진 곳.



쌔기 오이소!

서울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모르는 통영 사투리입니다.



제5회 통영 동피랑 벽화축제 대상작품입니다.



부녀회원 일행이 가풀막을 오릅니다.



마을 가운데쯤에 못 보던 건물이 있었는데 '마을만들기 통영지원센타'였습니다. 어른신 두 분이 청소를 하고 계셨기에 인사를 드리니 노인일자리 일환으로 일찍부터 나와 청소를 한다고 했습니다. 아래는 마을만들기 통영지원센타 내부 일부입니다. 통영과 동피랑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빠담빠담 드라마 촬여지라고 되어 있었기에 혼자 갔습니다.



드라마 내용은 모르지만 세트장엔 낭만이 있었습니다.



약간 평지에도 가게가 있었지만 피랑에도 가게들이 있었습니다. 사진찍기 좋도록 꾸며져 있었고요.



'마을커피'에서는 수익금을 마을주만 수도요금과 쌀을 사드린다고 하네요. 어린왕자님이 이곳으로 왔군요.



옛날에 바다리님이 살던 집입니다. 저는 인호삼촌이라고 불렀습니다. 낙향하여 자리를 잡는 듯 하더니 2011년 봄,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누군가가 사는지 열쇠가 따져 있었습니다.



동피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동포루東鋪樓입니다. 통영성지인 통영성내 3포루(동, 서, 북)는 숙종 20년(1694)에 세웠다고 합니다. 통영성을 방비하던 산성중군이 순찰과 경비를 하던 초소로 북포루는 여황산 정상에 있으며 지난 93년에 복원했고, 동포루는 성 동쪽 동피랑 꼭대기에 있으며, 서포루는 성 서쪽 서피랑 꼭대기에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동포루에서 내려다보면 강구항이 보입니다. 거북선과 판옥선도 보입니다.



동포루에 올랐다 다시 동피랑 골목을 걸었습니다. 얼굴은 잊었지만 황두리 할머니가 생각난 집이었습니다.





동피랑에서는 어디서나 바다가 보이기에 전망이 좋은 데 그 중 꽃과 낙서가 있는 한 가게에 들렸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풍경을 구경하고 싶어 들렸다고 했습니다. 당시 제 손에는 카메라가 있었으며 바지 뒷주머니에는 휴대폰이 있었습니다. 지갑을 차에 두었기에 좋아하는 커피 한 잔 팔아드리지 못했는데 다음에 동피랑에 간다면 지갑을 꼭 챙기겠습니다.



많이들 다녀갔습니다. 주인아주머니는 낙서를 훈장으로 생각하시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안녕!입니다.

이 안녕은 동피랑 벽화를 처음 그렸을 때 부터 있었습니다. 아래의 사진에 07 11은 2007년 11월입니다.

바다리님도 떠났고, 황두리 할무이도 떠났고, 김형진 위원장님도 푸른통영에서 떠났으며 그동안의 벽화도 모두 새벽화로 단장을 했는데 오직 하나 안녕!만 그대로였습니다. 윤미숙 간사님, 우근님 잘 지내시지요? 김기자님과 부인분도 안녕하시지요? 모두 안녕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골목을 걸어 중앙시장통을 구경하며 버스가 있는 도로로 왔습니다. 일행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에 얼른 풍경 몇 과 거북선과 판옥선을 찍었습니다. 통영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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