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9일
금융조합을 관람한 후 우리는 태백산맥 문학관과 현부자댁을 관람했습니다. 아직 해가 남았기에 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길을 더 걷기로 하고 벌교시장과 벌교천위에 놓인 소화다리와 홍교를 걸었습니다.
태백산맥 문학기행길은 소설 속의 주무대로 등장했던 여러 장소들로 태백산맥 문학관을 시작으로 현부자네, 소화의 집, 홍교, 철다리, 금융조합, 남도여관, 김범우의 집, 홍교 등 모두 현재까지 현존해 있는 건물들로 소설 태백산맥의 주 무대를 볼 수 있는 문학기행길입니다.
태백산맥 문학기행길은 아래 이미지의 번호와 황토색화살표를 따라 걸는 길로 우리는 보성여관 맞은편에서 꼬막정식을 먹다보니 번호대로 걷지는 못 했으며 기행길을 또 다 걷지 못 하고 돌아 왔는데 언제 또 기회가 주어지겠지요.
벌교천 상류부터 봉림교, 홍교, 소화다리, 미리내다리, 부용교, 철다리가 있는데 소화다리와 홍교는 벌교천 중간쯤에 있습니다.
소화다리의 본이름은 부용교입니다. 1931년, 일제강점기 소화6년에 만들어졌다고 '소화(昭和)다리'라고 불렸답니다.
벌교천 위에 놓인 낡은 다리는 이 땅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장본인입니다.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인 진압됐을 때도, 6 ·25전쟁 때도 수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죽어갔습니다.
좌우로 나뉜 이념의 틈바구니에서 밀고 또 밀릴 때마다 이 다리 위에서 총살이 이루어졌습니다. 소설 <태백산맥>의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겄구만이라, 사람 쥑이는 거 날이 날 마도 보자니께 환장 허겄구만요' 구절은 당시의 처참함을 알려줍니다. 영화를 보면 총소리가 귀청을 뚫을 듯이 들리며 사람들이 나가 떨어졌습니다.
소화다리에서 상류로 올라가면 소설에서 염상진이 지주들에게 빼앗은 쌀을 소작인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쌓아 놓았던 홍교(보물 제304호)가 있습니다.
지금은 일제때 원 다리 옆에 잇대어 새 다리가 살을 맞대고 놓아져 있는데 새 다리는 왕복차도며 옛 소화다리는 사람만이 다니는 인도교입니다.
모든 다리는 이름이 있습니다.
태백산맥에 나오는 무당 소화와 이름이 같은 소화다리는 1931년 6월(단기 4264년)에 건립된 콘크리트 다리로써 원래 부용교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였던 그때가 소화 6년이기도 해서 누가 부르기 시작했는지 모르게 소화다리로 더 잘 알려져 있고 지금도 대부분 소화다리라고 부른답니다. 부용교에는 단기로 준공년도가 나와 있으며 새부용교는 1988년에 완공이 되었습니다.
소화다리에서 하류를 보면 미리내다리가 갈대밭위에 있습니다.
소화다리에서 상류로 600m즘 가면 홍교(虹橋)가 있습니다. 홍교는 전남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다리로 길이 27.6m. 보물 제30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인도교입니다.
원래는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곳에 뗏목을 이은 다리가 있어 '벌교(筏橋)'라는 지명이 생겨났고, 지명으로 지어질 만큼 중요한 교량 역할을 하였습니다. 횡갯다리라고도 불리는 홍교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보물로 지정된 4개[(불국사의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선암사(仙岩寺) 승선교(昇仙橋), 보성 벌교 홍교(寶城 筏橋 虹橋)]의 홍예교량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합니다. 소설 속에서도 홍교는 벌교의 근원이자 상징으로 등장하고 김범우가 다리를 건너다가 멈춰서서 지역과 역사를 되새겨보는 장소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홍교는 돌을 쌓아 만든 무지개 모양의 다리로, 원래 숙종(肅宗) 44년(1718)에 당시 낙안현(樂安縣)의 주민들에 의해 현지에 떼다리(강과 해류가 교차하는 곳에 원목을 엮어 놓은 다리)를 놓았는데, 영조 4년(1728년) 에 전남도 지방에 내린 대홍수로 이 다리가 유실되자 그 이듬해 선암사 주지 호암화상 (護岩和尙(약휴:若休))이 제자인 초안선사(楚安禪師)를 화주(化主)로, 습성대사(習性大師)를 공사감독으로 천거 착공하였으며, 이 공사는 6년후인 영조10년(1734)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위 내용은 선암사 승선교 근처 홍교비에 승선교 조성내용과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홍교는 1981∼1984년까지 4년에 걸친 보수공사를 실시하였으며, 홍예의 밑부분과 석교 외벽의 시멘트를 제거하고 모두 화강암으로 교체하여 원형을 되찾았는데, 3간(間)의 이 석교는 각처에 있으며 또한 선암사(仙岩寺) 승선교(昇仙橋)와 함께 구조형식이 아주 뚜렷한 예라고 합니다.
왼쪽의 3칸이 홍교입니다.
다리는 부채꼴 모양의 돌을 맞추어 둥근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만들고서, 홍예와 그 위에 막돌을 쌓아 석벽을 만든 구조입니다. 원래 홍예는 반원형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현재는 아래부분이 갯벌에 묻혀 있어 전체적으로 활 모양을 이루고 있습니다.
선암사(仙岩寺) 승선교(昇仙橋)입니다.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길 450(죽학리) 선암사에 있는 조선후기 다리로 보물 제40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 7m, 길이 14m, 너비 3.5m로 길다란 화강암으로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을 연결하여 반원형의 홍예(虹蜺)를 쌓았습니다.
홍예를 중심으로 좌우의 계곡 기슭까지의 사이에는 둥글둥글한 냇돌을 사용하여 석벽을 쌓아 막았으며, 다리 좌우의 측면석축도 난석(亂石)쌓기로 자연미를 그대로 살렸으며 원형을 잘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승선교위의 문화재 기념비와 홍교비가 있으며, 승선교 교체 홍예석 전시비입니다.
보물 제 400호 선암사 승선교
선암사 승선교는 조선 숙종39년인 1713년에 호암대사가 축조한 홍예교(무지개 다리)로써 당초 자연암반위에 설치하였으나 자연암반에 절리(균열로 떨어져 나가는 현상)가 발생하여 승선교를 세운지 290년이 지난 때인 2003년 11월~2004년 6월 완전 해체하여 자연암반부에 석재(지대석)를 보충하는 대대적인 수리를 하였습니다.
이곳에 전시된 석재들은 당초 승선교를 구성하던 147개의 홍예석(아치석)중 노후부식등으로 강도가 저하되어 재사용이 불가능한 석재 30개를 전시해 놓은 것 입니다.
벌교 홍교입니다. 홍교옆으로 다리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기에 내려갔습니다. 벌교에는 며칠전에 눈이 내렸는지 벌교천에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기도 했습니다.
홍예 한복판에 돌기둥 같은게 아래로 삐죽 나와 있었는데 이것은 선암사 승선교(위의 사진 확인)의 홍예도 마찬가집니다. 승선교의 용 머리 모양의 돌 설명에서는 석축에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으며 예로부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오고 있다고 합니다.
벌교 홍교 3개의 홍예마다 천장 가운데 부분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용 머리 모양의 돌[龍頭石]이 돌출되어 있는데, 다리의 아래부분을 향하고 있는데 곧 다리의 천장 위에 용두석을 두는 것은 물이나 용과 관련된 민간신앙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용의 코 끝에 풍경(風磬)을 매달아 은은한 방울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전합니다.
다리가 놓인 벌교천(筏橋川)에는 바닷물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썰물 때는 다리의 밑바닥이 거의 드러났지만 밀물 때는 다리 대부분이 물 속에 잠겨버렸다고 합니다. 이 다리는 화려하고 정교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풍기는 다리로, 주변 마을의 주민들이 60년마다 한 번씩 다리의 회갑 잔치를 열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채동선 생가쪽에서 본 홍교다리 윗부분입니다. 다리의 길이는 27.6m, 높이는 3m, 너비 4.5m의 인도교입니다.
홍교는 인도교인데 홍교윗쪽의 봉림교는 차량통행이 가능했습니다.
홍교 옆에는 비석군이 있었는데, '보성 벌교 홍교중수비군'입니다. 이 중수비에는 홍교를 보수한 시기와 내역, 공사를 담당했던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있습니다.
'마음 나누기 > 가본 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도여행, 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 한 바퀴 (0) | 2018.03.01 |
---|---|
어른 키높이의 육필원고가 인성적인 태백산맥 문학관과 현부자집 (0) | 2018.02.28 |
舊 진해우체국과 닮은 벌교 금융조합의 변신 (0) | 2018.02.23 |
웰컴 투 벌교 월곡 영화골 (0) | 2018.02.22 |
벌교의 영원한 핫 플레이스 보성여관 (0) | 2018.02.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