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9일
남도여행 마지막 코스는 낙안읍성이었습니다. 짧은 겨울해가 지려고 하여 마음이 바빴습니다.
낙안읍성을 다녀온지 10년이 넘었으니 당시의 기억은 가물거리며 기억을 하고 있더라도 변했을 겁니다.
낙안읍성(전남 순천시 낙안면 충민길30. 동내리)은 1983년 국내 최초로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행정 구역상 3개 마을(동내리, 남내리, 서내리) 85여 가구의 약 300여 명이 100여 채의 초가집에 거주하고 있으며, 관광용으로 세트화한 민속촌이 아니라 실제 남도 사람들의 삶이 배어 있는 마을입니다.
근처에 웅천읍이 있는데 웅천읍성은 현재 동문쪽만 건설되어 개방했는데, 웅천읍도 낙안읍성처럼 개발한다는 말이 들리기는 하지만 언제가 될런지는 알 수 없는 사항입니다.
낙안보다 먼저 벌교를 다녀왔는데, 일제에 의해 1908년 낙안군이 폐군되면서 낙안은 순천군, 벌교는 보성군으로 분할되었으며, 마을은 동북쪽으로 지리산, 서쪽으로 무등산과 이어져 있고, 남으로는 여자만(汝自灣)의 해풍을 받는 낙안 들판이 펼쳐지는 해발 50미터의 분지형입니다.
그럼 낙안에 사람은 언제부터 살기 시작했을까요.
순천 조계산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낙안읍성은 마한 시대부터 선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다고 합니다. 백제 시대에는 분차, 분사, 부사라고도 불리는 파지성이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는 분령군으로, 고려 시대에는 양악, 낙안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낙안읍성이 현재와 같은 역사 마을로 등장하는 계기는 인조 4년(1626) 충민공 임경업 장군이 낙안 군수로 부임하면서부터입니다. 태조 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김반길 장군이 흙으로 축조한 것을 인조 때 돌로 다시 쌓아 지금의 형태를 갖추었으며, 세종 때 석성으로 축조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낙안읍성 동문 밖, 즉 동문 매표소 건물 뒤에 있는 소공원 안에는 고인돌 5기가 원형 그대로 옛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예전에는 읍성 주변과 마을 여러 곳에 많은 고인돌이 산재해 있었으나, 논밭으로 개간되면서 일부 없어졌다고 합니다.
동문 입구에는 밥집들이 즐비하며, 주차는 무료고 관람권을 구입해야 입장이 가능합니다. 성인 1인 4,000원인데, 순천·여수·광양·고흥·보성·진주 ·사천·남해·하동·구례·완도주민은 50% 할인되었습니다.
낙안읍성 안내도(http://www.suncheon.go.kr/nagan/)입니다.
우리는 동문(낙풍루)으로 입장을 했습니다. 성벽이 견고했습니다.
낙안읍성의 출입구는 동서남에 있는 성문으로 동문(낙풍루), 서문(낙추문), 남문(쌍청루 또는 진남루)입니다. 낙안은 농사 고장으로 문루마다 사계절과 농사에 관련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동문은 봄을 상징하고 풍년을 기원하는(봄에 씨앗을 뿌리며 풍년을 염원함)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동문은 1987년 복원되었으며 현판은 일중 김충현의 글입니다.
낙안읍성에 들어서니 초가가 바로 보였으며, 한복입기 체험과 음식점 등도 있었지만 우리는 어떠한 체험도 하지 않았고 무얼 먹지도 않았습니다. 해가 지고 있었거든요.
임경업 장군 비각(전남 문화재 자료 제47호)입니다. 임경업 장군이 낙안 군수로 1626년부터 2년간 봉직하면서 선정을 베푼 것을 기리기 위해 1628년 군민이 세운 비각이라고 합니다.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 군민이 제향을 모시고 있으며 현재는 낙안읍성민속마을보존회에서 주관합니다.
임경업 장군은 충주달천촌(達川村) 출생(평안도의 价川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음)으로 낙안군수시절 토성(土城)을 석성(石城)으로 증축한 인물입니다. 옛날 낙안은 왜구의 침입이 잦은 곳이었기에 조선초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고 왜구를 막았습니다. 흙으로 쌓은 성이 자주 무너지자 세종 때 돌로 짓기 시작해 인조 때 낙안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완성했는데, 평야지대에 있는 낙안읍성을 높이 4m, 너비 3~4m의 자연석으로 쌓았습니다. 성곽의 총 길이는 1410m인데 얼마나 견고하게 쌓았는지 400년 지난 지금도 건재합니다.
객사를 지나 낙민루를 스쳐 동헌에 들었습니다.
낙민루는 남원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더불어 호남의 명루로서 6.25전쟁(1951)중에 소실 되었다가 1984년부터 시작된 낙안읍성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1987년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문지기가 있는 건물이 동헌인데, 이 건물은 조선시대 지방관아 건물로서 감사, 병사, 수사, 수령등이 지방행정과 송사를 처리하던 곳입니다.
지금의 동헌은 1990년에 정면5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동헌은 사무당이라고도 불리는데 사무는 논어 안연편에 이르기를 지방 수령이 송사까지 책임을 지고 있어 더러 백성의 피해가 많아 권력을 남용하거나 백성들을 함부로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를 낙안읍성 당호에 담고 있다고 합니다.
내아(군수의 관사)로 들겠습니다.
동헌의 좌측에 위치한 이 건물은 수령의 안채로 사용하던 건물로 내동헌이라고도 합니다.
군수의 거쳐인 내아와 내아의 정지옆으로 돌아가면 천하의 명당터가 있는데, 뒷쪽의 금전산을 바라보고 복을 달라고 기원하면 부자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지인데 정지가 꽤 넓었습니다.
이제 민가쪽으로 갑니다. 가을 은행잎이 단풍이 들때였다면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이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민가를 향해 걸었습니다.
6~70년대 시골마을과 같습니다. 마치 드라마 세트장같습니다.
초가지붕 위로 여름이면 박들이 주렁주렁 열리고 겨울이면 눈이 쌓이지만 우리가 갔을 때는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새이엉을 이은 초가가 예뻤습니다.
낙안읍성에서는 전통가옥체험장이 있는데, 숙박이 가능하며 전통가옥앞에는 그 가옥의 정보가 있습니다. 이 가옥은 낙안성 김대자 가옥입니다. 김대자 가옥은 중요 민속자료 제95호로 낙안읍성의 동서를 잇는 큰 도로변에 자리 잡고 있는 초가집로 19세기에 건설되었으며 대문을 들어서면 깊숙한 자리에 안채가 있습니다. 낙안읍성 안의 건물 중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모두 9채입니다.
계단을 올라 서문성벽을 걸을 겁니다. 성안에는 기본적으로 초가라는 걸 알고 있는데 성밖에도 낙안읍성 근처의 가옥들은 초가였습니다.
성벽은 돌로 쌓아졌으며 성위는 흙이 다져져 있었고 대나무잎과 가지 사이에서 작은 새들이 쉼없이 노래하며 움직였습니다.
성벽위에서 보면 낙안읍내가 잘 보입니다. 고마고만한 초가들이 나란히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돌담장을 그대로 둔 가옥도 있으며 이엉을 엮어 얹은 가옥도 있고, 대부분의 가옥에는 텃밭이 있었고 우리 어릴때처럼 집집마다 감나무가 한 두그루 있다시피 합니다. 나무의 크기와 자태를 보니 수령이 오래된 듯 했습니다.
서문성벽을 타고 걸으면 남문(쌍청루)에서 내려가거나 쌍청루를 건너 더 걸을 수 있습니다. 여기도 성밖에 초가가 있었으며 따지 않은 유자가 노랬습니다.
성벽을 걷다 아래를 보니 마을회관과 경로당이 한 건물에 있었는데 여기도 역시 초가며 마을 할머니들이 저녁 식사 준비를 하러 댁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사람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한 모양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마을에도 낮에는 마을 할머니들이 회관에 모여 화투놀이를 하기도 하며 모여서 식사를 하기도 하는데 저녁이 가까워지면 일어나십니다. 우리는 부녀회도 있는데 대부분 5~60대입니다. 우리끼리 그러지요. 더 나이들면 우리도 여기서 놀고 먹읍시다라고. 지자체에서 보조를 해주기에 마을회관이나 경로당은 여름에는 시원하며 겨울에는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쌍청루가 가까워오니 성벽이 높았으며 성벽 사이사이에 구멍이 있었습니다. 성벽의 구멍은 전쟁시 활이나 총을 넣어 쏘는 총안(총구멍)입니다. 낙안은 왜구의 침입이 심해 낙안읍성을 쌓았다고 했습니다.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은 낙풍루, 남문은 쌍청루 또는 진남루, 서문은 낙민루라 부르며 북문은 폐쇄했습니다.
낙안읍성의 남문입니다. 남문은 쌍청루 또는 진남루라고도 하며, 1987년에 복원되었습니다. 여름을 의미하며 무더운 여름철 이곳에 올라서면 남다른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고 하며, 성안 사람이 사망해 상여가 문밖으로 나갈 때 이 문을 통해 나갔다고 전하며, 서문은 아직 복원되지 않았습니다.
쌍청루 바로 아래에는 도예방이 있었습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는지 연기가 피어 오릅니다. 도예방의 작품은 판매도 하며 옆에 가마가 있기도 했습니다.
낙안군수도 식수로 사용한 우물 큰샘입니다.
낙안읍성의 특징 중 하나는 깊은 우물이 없다는 점인데, 우리나라 전통 마을 중 여러 곳이 풍수지리에서 행주형으로 성내에 깊은 우물 파는 것을 금했는데, 낙안읍성도 그런 예라고 합니다. 배는 물에 떠다니므로 언제나 가라앉을 위험이 있어 우물을 파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물이 없다면 낙안읍성 사람들은 식수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물을 떠나 생활이 불가능하니까요. 다행히 마을 중앙에 1미터 정도의 낮은 천연 샘이 있어 식수 공급은 걱정 없었다고 하는데, 풍수에서 깊은 우물을 파는 것은 금지했지만 천연 우물은 적극적으로 활용한 거지요. 이를 배 안에 고인 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배 안에 들어 온 물은 퍼내야 안전하므로 천연 우물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다행히도 천연 우물은 물이 깊지 않은데도 가뭄 때나 우기 때나 마르거나 넘치지 않고 별 차이 없이 본래 수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우물은 큰샘 또는 미인샘이라고 하며 원님이 우물물을 식수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며, 남내리 마을에서는 정월 초삼일 우물제를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성벽을 내려와 다시 마을을 걸었습니다. 체험이 가능한 가옥도 있으며 그렇지 않은 가옥은 주인의 허락없이 들어가지 마라는 안내가 있습니다.
10년도 더 전에 갔을 때 할머니께서 길쌈을 하고 계셨는데 시간이 오후 5시를 넘어 그런지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모유수유실이 있기도 햇으며 세계 복식 체험장과 판소리를 하는 분이 거주하는 가옥도 있었습니다.
대장금 촬영장으로 가려면 긴 골목을 걸어가야 합니다. 무심히 걸었습니다. 수원화성에도 대장금 촬영장소가 있었는데 대장금 촬영장소는 여러 곳인가 봅니다.
대장금 촬영장소입니다. 낙안읍성은 대잠금외에 허준, 아름다운 시절, 태백산맥, 취화선 등도 촬영했다고 합니다. 오래된 사진들만이 촬영장소임을 알려주었습니다.
요즘 관광지마다 있는 추억의 우체통입니다. 느린배달과 빠른배달중 택하여 편지를 넣으면 되며, 옆엔 포토존입니다.
나무를 이용한 식물의 지지대입니다. 텃밭 농사시 참고하려고 찍었습니다. 성벽은 서문에서 남문으로 가는, 우리가 걸었던 성벽입니다.
이제 얼라아부지를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어딜가면 언제나 따로 놀거든요. 요즘에야 휴대폰이 있지만 옛날에는 어떻게 다시 만났는지 기억에 없는데 그래도 서로 잘 놀고 다시 만나 집으로 왔습니다.
통화를 하고 계속 걸었지요. 작은점방이 있으며 할머니께서 골목을 쓸었습니다. 밤새 아무일도 없었지만 어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골목을 쓸고 해질녘에도 골목을 쓸지요. 옆에 농협 퇴비를 받아 두었습니다. 우리가 보성으로 막 출발했을 때 엄마께서 연락을 하셨더군요. 오늘 퇴비온다고. 하여 지금 전라도인데 대신 받아주세요 했는데 여긴 벌써 퇴비를 받았네요.
남문 근처에 있는 연지입니다.
성내에서 사용한 각종 생활용수가 연지를 거쳐 정화된 뒤 수구를 통해 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인데, 과거에도 오수 처리에 많은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인들을 가두던 옥사입니다. 남문으로 가는 길목 왼쪽에 위치하며 전면 5칸의 우진각 지붕으로 2002년 복원되었습니다. 다른 관청 건물들은 팔작지붕인데 옥사를 우진각 지붕으로 한 것은 위계를 낮게 보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툇마루를 따라서 일렬로 감방들이 배열되어 있고, 칼을 쓴 죄인을 비롯해 다양한 모형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다른 고을의 경우 관아 옆에 옥사가 있기 마련인데 이곳은 관아와 떨어져 있는 것이 특징인데, 담장은 2.5미터 높이로 여타 담장보다 높게 쌓았으며, 주변에 연지를 두어 죄수들의 탈주를 막는 장애물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낙안읍성을 잠시 더 걷다가 동문성벽에 올랐습니다.
아래를 보니 초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으며 제법 넓은 텃밭에는 목화를 재배하기도 했습니다. 요즘 꽃다발용 목화를 수입한다고 하는데, 오래전 목화는 우리 조상들에게 이불도 되고 따뜻한 옷도 되었지요. 초가집들이 불을 밝힙니다.
이제 어디로 갈거요?
이제 하동가서 저녁먹고 잠자고 하동 투어해야지요.
그때 엄마의 전화가 왔습니다. 퇴비가 오늘이 아닌 내일 온다나요. 오전 통화때 이미 전라도에서 1박한걸로 했기에 집으로 와야 했습니다. 1박 2일로 나선 남도여행은 아쉽게 여기서 끝입니다.
오는 길에 순천의 기사식당중 부페식으로 하는 곳이 있었기에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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