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일
통도사 영각앞의 지장매를 만난 후 통도사를 천천히 걸었습니다. 얼라아부지는 이미 통도사입구에서 헤어졌기에 혼자 놉니다.
통도사는 선덕여왕 15년(646) 대국통(大國統) 자장율사에 의하여 창건되어 당시 경주의 황룡사가 왕실귀족불교의 중심지였던 것에 반하여 통도사는 산중에 자리 잡은 수행불교(修行佛敎)의 중심도량이었습니다. 통도사에 모셔진 부처님 사리와 금란가사는 자장스님이 문수보살로부터 바로 전해 받았다는 종교적인 신비감을 주고, 속고승전에서 당태종이 400함의 대장경과 금란가사를 하사하고 구부(九部)에 명을 내려 공양(供養)케 한 다음 귀국하게 하였음은 그 당시 당나라의 최고 권력자로부터 절대적인 귀의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통도사는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법보사찰이라는 역사적 의의도 갖습니다. 또한 금강계단을 설치하여 전국의 모든 승려들을 이곳에서 계를 받아 득도하게 함으로써 승보와 법보 등 불교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삼보가 이곳 통도사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통도사 대웅전입니다. 대웅전은 국보 제290호며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대웅(大雄)은 마하비라(ⓢmahāvīra)를 번역한 것으로, 석가모니불에 대한 많은 존칭 가운데 하나입니다. 따라서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사찰의 중심 건물이지요. 보통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시는데 문수는 지혜를, 보현은 서원을 세우고 수행하는 행원(行願)을 상징하는데, 본존불을 좌우에서 보좌하는 보살을 협시보살(脇侍菩薩)이라 합니다.
대웅전(大雄殿)의 격을 높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할 때는 석가모니불의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모시고, 다시 각각의 좌우에 보좌하는 보살을 모십니다. 근처 천웅사는 대웅전 대신 한글로 '큰법당'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통도사 여기저기를 관람하다보니 대웅전 측면에도 편액이 있었습니다.
대웅전 뒤로 작은 연못이 있어 다가가 살피니 삼성각 맞은편 대웅전 뒷면에도 편액이 있었습니다. 삼성각옆에는 산령각이 있었으며, 산령각과 대웅전(대웅전옆) 사이엔 사리탑을 모신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으며 사진촬영도 금지였습니다.
대웅전(大雄殿) 마당에는 오층석탑이 있으며 석등도 있고 향을 피우는 대형 향로도 있었으며 끊임없이 불자들은 대웅전 법당으로 들었습니다. 단청의 색을 입히지 않아 건축물은 더욱 고풍스러웠습니다.
대웅전은 다른 전각과는 달리 정면의 너비가 측면보다 좁은 장방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통도사 대웅전은 상로전의 주건물(主建物)로 대웅전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규모로 되어 모두 15칸 건물이며, 특이한 것은 두 개의 건물을 복합시킨 평면형이라 건물내부의 기둥배치가 다른 건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라고 합니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44년(인조 22)에 중건하였지만 건물의 기단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며,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아 통도사 대웅전은 참배의 기능만을 갖고 있는 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불상을 모시지 않은 대신 불단 뒤편으로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금강계단이 위치하는 구조를 보여주는데, 건물 내부 북쪽에는 화려한 불단만 있고 불상은 없는 이유는 실상인 진신사리가 있으니 허상에 해당하는 불상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요. 대신 창 너머에 있는 사리탑을 볼 수 있게 창을 내었습니다.
대웅전 편액의 글씨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통도사에는 유독 흥선대원군 즉 석파(石坡)의 글씨가 많이 있는데, 일주문(一柱門)의 편액인'靈鷲山 通度寺'의 글씨와 원통방 편액과 '금강계단'의 글씨 등이 모두 흥선대원군의 글씨라고 합니다.
대웅전에는 각각 주련이 달려있는데 글씨는 천보구하(天輔九河)스님의 글씨인데, 통도사의 많은 주련들이 구하스님의 선필(禪筆)로 쓰여져 있다고 합니다. 주련의 문장은 모두 다섯 구절로 이루어졌습니다.
금강계단(金剛戒壇)은 북쪽에 있지만 편액은 건물의 남면에 걸려 있습니다.
대웅전은 두 개의 건물을 복합시킨 형태로 내부의 기둥 배열이 다른 건물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지붕은 정(丁)자형을 이루고 있어 앞면과 옆면이 모두 정면처럼 보입니다. 대웅전에는 건물의 다양한 성격을 반영하듯 동쪽에는 대웅전(大雄殿), 서쪽에는 대방광전(大方廣殿), 남쪽에는 금강계단(金剛戒壇), 북쪽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금강계단의 글씨는 흥성대원군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금강계단은 승려가 되는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수계의식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戒壇가운데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종 모양의 석조물을 마련하였는데 이는 부처님이 항상 계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멀리서도 돋보이는 꽃문양이 수놓인 기단과 소맷돌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기단은 건물 하단에 위치하는 높은 대를 말하는 것으로 지면으로부터 발생한 습기가 건물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고 통풍과 채광 등을 유도하여 쾌적한 환경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대웅전 기단과 이어지는 금강계단 쪽 기단은 적당한 높이를 가지고 있는데, 그 단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을 새겨 넣었습니다.
다양하고 예쁘기 짝이 없는 꽃들이 기단을 수놓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최고의 기단이라고 하는데,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 이러한 가구식 기단은 창건 당시 신라시대의 석조기단(가구식기단은 석조기단의 일종으로 주로 화강석을 사용해 만드는데 그 만드는 방식이 마치 목조가구와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으로 보인답니다.
화려한 꽃 기단을 살리고 그 위에 꽃 같은 거대한 건물을 세웠으며, 지붕 위 기와위에는 일렬로 조그마한 백자항아리를 올려 멋을 더했습니다.
서쪽의 대방광전(大方廣殿)입니다. 대방광전 앞에는 구룡지라는 작은 연못이 있습니다.
작은 연못 가운데는 다리가 있으며 건너편에 삼성각이 있고 앞에는 배롱나무가 있습니다.
작은연못의 이름은 구룡지로 자장스님께서 중국 오대산 문수보살로부터 부처님 진신사리와 가사 및 발우를 전해받고 귀국하여 사리를 모시고자 할 때 당시 통도사는 큰 연못자리였다고 합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연못을 메우고 계단을 쌓고자 할 때 연못 속에는 아홉 마리의 악한 용이 살고 있었는데, 자장스님께서 설법을 하여 교화시키니 그중 다섯 마리는 통도사 앞산 넘어 오룡골로 날라 가고, 세 마리는 울산 삼동골로 급히 도망가면서 산문 어귀 큰 바위에 부딪혀 피를 흘리고 갔는데 지금도 바위 표면에 핏자국이 남아 있어 사람들이 '용혈암(龍血岩)'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나머지 한 마리는 눈이 멀어 떠나지 못하고 사찰에 남아서 도량을 지키고자 간청하여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살도록 하고 천왕문 옆에 조그만한 전각을 지어 '가람각(伽藍閣)'이라 이름 하였다고 합니다.
북쪽의 적멸보궁(寂滅寶宮)편액은 겨우 찾았습니다. 사리탑이 담장에 싸여 있었으며 출입문이 잠겨져 있었거든요.
적멸보궁은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봉안한 사찰 건물을 말합니다. 적멸은 모든 번뇌가 남김없이 소멸되어 고요해진 열반의 상태를 말하고, 보궁은 보배같이 귀한 궁전이라는 뜻입니다. 한반도에는 다섯 곳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는데, 설악산 봉정암 적멸보궁,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정선 정암사 적멸보궁,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 양산 통도사 적멸보궁입니다. 적멸보궁에는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봉안했기 때문에 불상을 모시지 않습니다.
대웅전의 기와지붕 위 기와위에는 일렬로 조그마한 백자항아리가 있는데 기와지붕 사면에 다 있습니다.
적멸보궁 편액앞에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금강계단)이 있으며, 너머에 있는 계절을 잊은 소나무까지 장엄하게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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