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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함성, 웅동 4·3 독립만세운동 기념행사와 재현

by 실비단안개 2019.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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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벚꽃에 가려졌던 웅동 4 ·3 독립만세운동 재현 행사에 다녀왔습니다.

3·1운동 100주념식에 이어 웅동 지역에서는 두 번째 독립만세운동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웅동 4·3 독립만세운동 기념식은 1919년 4월 3일 웅동·웅천 지역에서 일어났던 4·3 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하여 순국선열들의 희생정신과 뜻을 계승하고자 개최되고 있는데 웅동중학교가 주최하며 22회째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이 고장은 군항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일제가 헌병과 경찰을 많이 배치하였고, 한국인 보조헌벙이나 경관들이 항시 주민과 생활을 같이 하면서 감시를 하고 있어서 항일운동을 하기란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당시 마천동 소재 '계광학교(웅동중학교 전신)'에서는 민족사상이 투철한 교사 배재황, 허전, 주기용, 신자균 등이 학생들에게 나라 잃은 슬픔과 광복의 긴급함을 강조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이며 민족혼을 일깨우는 민족적 선구자의 정신문화를 선도하였습니다.

1919년 4월 3일(음력 3월 3일), 약 600여명 가량의 군중들이 마천 냇가에 모였고, 주기용(주기철 목사 사촌) 선생이 군중앞에서 독립선언서를 힘차게 낭독, 이에 이부군의 선창으로 독립만세의 함성이 진해만으로 퍼지고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웅동 4·3 독립만세운동 기념식 장소는 마천동 독립운동 발원지 뒤편 공터였습니다.

행사장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요사진 20선'이 전시중이었는데 만세운동 행사 후 군항제 행사장으로 옮겨 전시를 계속 한다고 했습니다.

 

 

 

 

웅동 4·3 독립만세운동 이야기와 수형자 명단이 있었습니다.

제가 웅동중학교를 졸업하긴 했지만 행사 참여는 처음이었습니다. 가슴이 벅찼습니다. 큰아이의 친구 엄마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선조들의 이런 희생으로 지금 우리가 있는데 다음 세대는 어떻게 받아 들일지 알 수 없습니다.

 

 

웅천과 웅동 사이에 평발고개가 있으며, 웅동 만세 운동후 일부는 소사수원지뒷산을 넘어 웅천으로 가서 합류를 했다고 했습니다.

 

 

식전 행사로 풍물패의 풍물놀이가 있었습니다.

 

 

만세운동 기념식에는 웅동중학교 학생과 선생님, 웅동초등학교 학생과 선생님, 지역 주민 등 많은 분들이 함께 했습니다.

 

 

행사는 기념사, 격려사, 축사, 독립 선언서 낭독, 독립운동 재현극, 3·1절 노래 제창, 만세 삼창, 진혼무 공연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김형갑 광복회 경남지부장의 독립선언문 낭독이 있었는데, 앞부분은 함께 한 시민들도 함께 낭독을 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삼일절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어 만세 삼창을 했습니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한때는 365일 베란다에서 태극기가 펄럭였었는데 태극기 부대의 극성으로 태극기를 내렸습니다. 새로 구입한 태극기는 태극기함에서 한 번도 나오지 못 했습니다. 태극기, 애국가, 아리랑 이런 단어는 어머니와 동급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데, 다시 가슴이 뜨거워질 날이 오기를 바람해 봅니다.

 

 

 

문화두레 어처구니와 웅동중학생들의 재현극입니다. 팔뚝에 일장기가 있는 이가 일본 앞잡이입니다. 일본놈보다 더 미운 놈들이지요.

 

 

1919년 4월 3일 주기용 선생과 학생, 지역주민들이 만세운동을 하는 모습입니다. 일본군은 총칼을 앞세워 진압을 했지만 만세는 계속되었습니다.

 

 

 

 

 

 

재현극이라 독립만세 함성에 일본군은 물러 갔지만 여러 선생들이 당시 투옥되었습니다.

 

 

 

 

 

진혼무가 이어졌습니다.

진혼이란 죽은 사람의 넋을 달래어 고이 잠들게 하는 일입니다. 당시 사망한 독립운동가를 위한 진혼무인데, 영화 '귀향'의 진혼굿이 겹쳐졌습니다.

 

 

 

만세운동 1부 행사는 여기까지였으며, 시민들을 위한 조촐한 상을 봉사자들이 마련했습니다.

 

 

독립운동 2부는 근처의 3·1 독립기념비 참배였습니다. 독립기념비는 소사생태숲 입구 맞은 편에 있습니다.

 

 

 

 

웅동중학생은 거리행진을 하여 소사마을로 향했으며 초등학생은 기념비에 참배하러 왔습니다. 흐드러진 벚꽃이 더 슬펐습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 자랑스럽습니다.

 

 

 

 

마천 냇가위에 있는 4·3 독립만세운동 발원지 표지석입니다.

 

 

학생들이 다 지나갈 때 까지 기다렸다 다시 한 번 더 찍었습니다.

 

 

마천川과 소사다리입니다.

국민학교 저학년때 봄날 선생님은 어린 우리를 데리고 이 냇가로 가서 묵은 때를 벗기도록 했으며 여름이면 은어를 잡는 이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몇 년째 공사차량이 다니고 있습니다.

 

 

소사다리를 건너고 있습니다. 이 마을은 유명인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시인 김달진을 비롯하여 여러 문인들이 있으며, 전 국회의장 정의화, 그리고 이훈희 씨가 kbs본부장에 취임했으며, 선한 친구들의 고향마을이기도 합니다.

 

 

생태하천(?) 공사중인 소사천을 따라 마을 골목을 접어 들었습니다.

 

 

먼저 도착한 중학교 성생님이 경운기를 단상으로 하여 이 자리를 설명했습니다.

1919년 당시 이 자리가 면사무소(현 주민센타)였는데, 독립운동에 적극적이 못 했던 면장을 무릎꿇게 하여 독립운동에 동참하도록 한 장소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만세를 부르며 수원지쪽에서 고개를 넘어 웅천으로 향했는데 시위군중의 흰옷자락은 산을 하얗게 뒤덮었다고 합니다.

웅천으로 들어서면서 군중은 더 늘어가고 시위군중은 만세를 부르며 웅천의 헌병분견대와 면사무소가 있는 성내동 중심거리로 들어갔습니다. 이 때 갑자기 웅천 성내리에 총소리가 나면서 헌병들은 칼과 총으로 진압에 나섰고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까지 대창과 칼을 들고 나와 시위대를 위협했다고 합니다. 맨주먹의 시위대는 흩어지게 되었고, 진해 헌병들이 시위진압을 위하여 투입한 기마병의 총에 쫒기는 과정에서 보리밭에 쓰러지는 군중을 비롯하여 잡혀 끌려 간자가 무려 32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 지역의 선조들은 광복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 우리 고장을 지켜냈습니다.

 

 

마지막으로 만세 삼창을 했습니다.

학생들은 참배를 위해 3·1 독립기념비로 갔으며 저는 김달진 문학관으로 갔습니다. 걸음걸음 뜨거운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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