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함께 즐거우면 더 좋지 아니한가!
마음 나누기/가본 곳

남해 충렬사 봄 풍경과 잘린 히말라야시다

by 실비단안개 2019. 4. 5.
728x90

3월 30일

4월 1일부터 10일까지 진해 군항제가 있으며, 1일날 추모대제가 북원로타리 특설무대에서 진행된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그날 추모대제에 갈 수 없을 것 같아 남해를 빠져 나오기전 충렬사로 갔습니다.

남해 충렬사에는 이순신 장군이 3일간 묻혔던 자리에 아직도 가묘가 있습니다.
1598년 11월 19일 돌아가신 충무공의 유해는 충렬사 자리에 안치되어 있다가 고금도를 거쳐 12월 중순경 아산에 도착, 1599년 2월에 정식 발상하여 11일 안장,  금성산에 안장되었다가 1614년 현재의 어라산 묘소에 안장되었습니다.

충렬사의 역사는 장군이 돌아가신지 34년이 지난 1633년에 한칸의 초사를 건립하여 제사를 봉행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남해충렬사는 규모가 통영충렬사 등에 비하면 매우 작지만 1973년 6월 11일, 사적 233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우암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쓴 이충무공묘비와 사우 그리고 충무공비와 충민공비, 내삼문, 외삼문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청해루와 장군의 가묘가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하동에서 남해를 향해 찍은 풍경인데 노량앞바다에 거북선이 있으며, 충렬사는 숲에 가려져 보이지 않습니다.

 

 

 

충렬사 입구에는 두 기의 비석이 있습니다.

자암 김구 비와 삼도통제사 이태상 비입니다.

 

 

김구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이 아닌 자암 김구로 남해에서 13년간 유배생활을 한 어른이며, 자암 김구 비 옆에 있는 태상의 비는 태상의 공덕을 기려 세운 비로, 이태상은 충무공의 5세손으로 청해루를 세운 사람이며, 영조 임금 때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이 남해 바다를 지킨 장수입니다.

 

 

남해 충렬사의 봄입니다. 마른나무에는 새싹이 돋으며 벚꽃이 만발했습니다.

 

 

충렬사 외삼문으로 들기 전에 청해루가 있습니다.
청해루 앞에는 남해군민과 경남도내 초등학생의 성금으로 건립되었으며, 정인보가 글을 짓고 김충현이 쓴 충무공 한글비가 있습니다.

'노량바다는 리충무공 전사하신데라 여긔에 충렬사를 세우노라'

 

 

충렬사 외삼문입니다. 가운데 문에 큰 태극문양이 있습니다.

충렬사는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위치하며 사적 제 23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남해대교 아래 노량포구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남해 충렬사(忠烈祠)는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1598. 11. 19)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입니다.
남해 충렬사는 통영 충렬사와 함께 '충렬'이라는 현판을 처음부터 같이 사용해 왔으며 조선 인조 임금 때 지어졌습니다.

외삼문 현판은 서예가 박병호의 글씨입니다.

 

 

외삼문을 들면 내삼문 아래에 '남해 충렬사비'가 있고 좀 위험한 계단을 올라 내삼문을 들면 사당 사이에 비각이 있습니다.

내삼문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입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우암 송시열이 지은 비문이 새겨진 비각이 있습니다.
비각안에는 有明朝鮮國三道水軍統制使贈諡忠武李公 廟碑(유명조선국삼도수군통제사 증시충무이공 묘비)가 있는데 큰 비석에 깨알같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각에는 '補天浴日(보천욕일)'이라는 글귀가 있는데, 보천은 중국의 고대 신화속에 나오는 여와가 뚫린 하늘의 구멍을 오색돌을 갈아 올라가 막았다고 보는 것이고, 욕일은 하늘의 태양이 빛을 잃자 희화라는 여신이 직접 해 10개를 낳아 씻어서 하늘에 띄워 세상을 밝게 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라고 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모셔진 사당입니다.

사당의 충렬사 글씨는 조선 18대 임금인 현종의 어필이라고 합니다.

묵념!

 

 

사당 양쪽으로 충민공비와 충무공비가 있습니다. 충무공비 뒤쪽의 문으로 들면 충무공의 가묘가 있습니다.

 

 

가묘로 가기전 눈여겨 볼 것이 있는데 충문공비(사당) 뒷담장 너머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던 히말라야시다가 잘려 있었습니다.

 

 

역시 가묘로 들기전 충무공비쪽에서 충렬사와 남해읍으로 가는 국도 19호선의 벚꽃을 잠시 감상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가묘는 사당뒤에 있습니다. 묵념!

가묘옆에는 키가 큰 히말라야시다가 있는데, 역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념식수입니다.

 

 

가묘 안내입니다.

1598년 11월 19일 전사하신 충무공의 유해는 충렬사 자리에 안치되어 있다가 고금도를 거쳐 12월 중순경 아산에 도착, 1599년 2월에 정식 발상하여 11일 안장, 금성산에 안장되었다가 1614년 현재의 어라산 묘소에 안장되었습니다.

충렬사 건립은 충무공의 순국을 슬프게 느낀 남해사람 김여빈과 고승후가 충무공 사당 건립을 주장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1633년(인조 10)에 한 칸짜리 초가 사당을 건립하고 위패를 봉안하여 처음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이 충렬사의 시작입니다.

 

 

히말라야시다입니다. 나무 앞에는 기념식수 년도와 수종이 적혀 있으며 박대통령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히말라야시다는 소나무과의 상록성 히말라야시다는 이름 그대로 세계의 지붕인 히말라야산맥이 고향인 나무입니다.

히말라야라고 하면 눈 덮인 만년 빙하를 상상하기 쉽지만 산맥의 끝자락은 습하고 따뜻한 아열대에 가까운 지역이 많으며, 인도에서는 서북쪽의 따뜻한 땅에 수만 년 전부터 둥지를 틀었습니다. 원산지에서는 무리를 이루어 자기들끼리 숲을 만드는 나무입니다.
나무 하나하나에는 땅에 거의 닿을 듯이 아래로 늘어진 가지가 사방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위로 갈수록 차츰 짧아져서 전체적으로 원뿔모양의 아름다운 자태를 만드는 나무입니다.

우리나라에는 1930년경에 수입되어 대전 이남의 따뜻한 지방에서 주로 심고 있는데 지금은 서울에서도 충분히 자란다고 합니다. 기후의 온난화로 나무의 북방한계선이 올라간 탓일 겁니다.
대구의 동대구로에 심은 히말라야시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가꾸어 놓은 곳으로 유명한데, 박정희 정권 시절 대통령이 이 나무를 좋아한다고 알려지자 그때 처음 조성된 동대구로에 가로수로 심어 오늘날의 히말라야시다 거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나무가 크게 자라면서 바람에 잘 버티지 못하고 큰 덩치가 맥없이 넘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남해 충렬사의 히말라야시다가 잘린 이유도 같은 이유같습니다.

 

 

 

 

 

728x90

댓글